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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연후(然後)에 알게 된 깨달음

Onepark 2022. 1. 7. 07:00

1월 6일 저녁 클래식 FM 방송을 듣다가 마음을 울리는 詩 한 구절이 귀에 꽂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귀를 기울여 나머지 구절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마치 배경음악(BGM)이 뉴스특보(Breaking News)로 바뀐 것처럼 손과 머리속이 부산해졌다.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일을 돌아본 뒤에야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음을 알았네.
문을 닫아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이전의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네.
마음을 쏟은 뒤에야 평소의 마음 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네.

출처: 류시화,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 말년의 르누아르는 관절염이 악화돼 붓을 손에 묶고 그림을 그렸다. 영화 "르누아르"의 한 장면

 

진계유라는 시인 이름을 가지고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내가 찾는 시 "뒤에야(然後)"의 전문은 물론 한문으로 된 원시(原詩)까지도 찾을 수 있었다.

진계유(陳繼儒, 1558~1639)는 자가 중순(仲醇), 호는 미공(眉公)이라 하였으며, 중국 명나라 말기에 묵으로 매화를 즐겨 그렸던 문인화가로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시험 1차에 해당하는 향시(鄕試)에 연거푸 고배를 들고나서 벼슬길(宦路)은 포기한 채 은거하면서 저술과 편집에 힘쓰고 서화로 명성을 떨쳤다.[1] 같은 고향, 같은 연배의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이 과거에 합격하여 태자의 강관(講官), 장관에 오르는 등 높은 벼슬을 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2]

한문으로 읽어보니 어떤 규칙성이 느껴졌다. 줄마다 然後 知平日之 (…한 뒤에야 평소에 … 하였음을 알았다)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安得長者言

靜坐然後 知平日之氣浮
守默然後 知平日之言躁
省事然後 知平日之費閒
閉戶然後 知平日之交濫
寡欲然後 知平日之病多
近情然後 知平日之念刻

 

* 명나라 말기의 문인화가 眉公 진계유의 묵매도(墨梅圖)

 

영어로 번역된 것이 있는지 진계유의 영문 표기 Jiru Chen과 첫 구절 靜坐然後 After sitting quietly로 구글링을 해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우선 첫 줄을 영어로 옮겨보았다.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번역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After sitting quietly, I become to know that I was usually bouyant. 

Until I sat quietly, I didn't know that I was usually bouyant. 

 

앞의 번역은 직역에 해당하고, 뒤의 번역은 not … until "…한 뒤에야 비로소" 라는 관용적 표현이지만 그 뉘앙스는 사뭇 달랐다. 전자가 미래지향적인 반성을 내포하고 있다면, 후자는 과거지향적인 후회를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어느 스님의 수필집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같은 스타일의 때늦은 깨달음이라 할까 그 아류(亞類)가 적지 않음을 알았다. 

 

1월 7일 조간신문의 헤드라인만 살펴보아도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어느 분야에서나 이러한 패턴을 적용할 수 사건과 사연이 부지기수였다. 이를테면:

- 북한이 발사한 극초음속 미사일을 보고서야 우리의 국방에 허점이 있음을 알았다.

- 조직이 내홍을 겪은 뒤에야 국민의 여망과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알았다.

- 온실가스 감축의 불이 발등에 떨어진 뒤에야 탈원전만 외칠 수 없음을 알았다.

- 소방관이 여럿 순직한 뒤에야 화재예방과 불조심에 소홀하였음을 알았다. 

- 한류에 대한 외신 보도를 접한 뒤에야 우리나라 딴따라(엔터테이너)들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았다.

 

* 만년의 르누아르 모델 헤슬링 역을 맡은 Christa Theret
* 젊은 여성이 르누아르를 찾아와 죽은 "부인이 가서 만나보라"고 했다며 비서 겸 모델을 자청한다. 출처: OBS 캡쳐.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떠난 님에 대한 뒤늦은 사랑의 깨달음처럼 가슴을 치게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 그대가 떠난 뒤에야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았소.

 

이 구절은 오래 전에 번역을 해 놓고도 KoreanLII에서 마땅한 항목을 찾을 수 없어서 대기상태(Waiting list)로 두었던 댄 포겔버그의 "Seeing You Again"의 가사와 정확히 일치함을 알게 되었다.

 

Seeing You Again  by Dan Fogelberg

그대를 다시 만나고 - 댄 포겔버그

 

Seeing you again
Was like meeting for the first time
In a foggy dream so many years ago.
Strangers in an airport
Searching for a word to break the ice.

그대를 다시 만나보니
몇 해 전 안개 자욱한 꿈속에서
처음 만날 때 같았소
뭐라 할 말을 찾으려 애쓰는
공항의 낯선 이처럼

Holding you again
Even for the briefest moment
Made me realize how much I love you still
Wanting you to want me,
Still not knowing if you ever will.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대를 다시 안아보니 지금도 여전히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달았소
그대도 나를 원하길 바라지만
앞으로도 그럴지는 모르겠구려

Refrain

Seeing you again,
Seeing you again
Was the sweetest torture
I may ever know.
Seeing you again,
Seeing you again
Made me wish I’d never let you go.

<후 렴>

그대를 다시 만나보니
그대를 다시 보는 건
아주 감미로운 고문과 같았다는 걸
이제야 알 것 같소
그대를 다시 만나보니
그대를 다시 보는 건
결코 떠나보내지 않기를 소망하게 하는구려

Seeing you again,
Running free along the beaches
Where our shadows first began to intertwine.
Listening to your laughter,
Wishing that your love could stll be mine.

그대를 다시 보며
우리의 그림자가 처음으로 뒤얽혔던
해변을 따라 마음껏 달려가며
그대의 웃음소리를 듣고
그대가 사랑하는 이가 나이기를 바라오

Refrain

<후 렴>

Did you only come to say You’re sorry,
Or give it one more try,
Or did you only need to see
There was nothing left for me
Inside worth saving.

미안하단 말을 하려고 왔단 말인가요
아니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소
아니면 만나보기만 할 뿐
내게는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았나요
마음속에 간직할 만한 그 무엇을

Running for your train,
You smiled back through the doorway
Like you used to
When our hearts still beat as one
And as I turned away,
I knew the lonely day had just begun.

그대는 기차를 타러 뛰어가며
승강대에서 뒤돌아보고 미소를 지었소
우리의 심장이 하나가 되어 뛸 때
그대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가 돌아설 때
내겐 외로운 나날이 시작되었음을 직감했소

Refrain × 2

<후렴 × 2>

 

* "Seeing You Again" 댄 포겔버그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출처: YouTube

 

뒤늦게 깨달았다면 사태를 전혀 되돌릴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진 않다. 저녁에 해가 진 뒤에도 밤 사이에 잘못된 것을 시정하기 위해 배전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이튿날 아침 해가 다시 떠오르기 전에 쇄신책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앞서 진계유 시인이 지적한 들뜬 기분, 가벼운 언사, 시간과 돈의 허비, 지나친 교제, 잦은 병치레, 각박한 마음 씀씀이 등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용히 앉아 묵상을 하거나 지난 일을 성찰하고, 집에 들어앉아 욕심을 가라앉힌 다음 정성을 쏟아야 한다. 그렇게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그 정성이 상대방에게, 또 하늘에도 통하지 않겠는가! 

갈 길은 먼데 날이 저문다고 지레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밤을 도와 천리 길도 달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 Sunset at Lake Como, Italy

 

엊그제 동해에 떠오르는 아침해를 보았는데 갑자기 16년 전 이태리 벨라지오 코모 호숫가에서 보았던 석양이 생각났다.

그렇지~ 해가 뜨고 지고 이렇게 하루하루가 반복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터였다.

영화에서 르누아르가 어떻게 위대한 화가의 삶을 살았는지 보았던 만큼 진계유의 정좌(靜坐)를 가지고 단시(短詩, haiku)를 한번 지어 보기로 했다.

 

조용히 앉아 하늘을 응시하니 펼쳐진 극장
구름을 은막 삼아 상영되는 드라마 같은 삶
중요한 건 관중의 인기 아닌 하나님의 평가

When I sat quietly and gazed at the sky,
there appeared a theatre.
Then my dramatic life was on display
with clouds as a silk screen.
What matters is not the response from audience
but the comments of God.

 

Note

1] 진계유는 상하이 동사산(東佘山) 아래 은거하여 평생 많은 저술을 남겼다.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에 실린 저서가 31종, 『보안당비급(寶顔堂秘笈)』 400여 권, 『견문록』 9권, 『태평청화(太平清話)』 4권과 고계(高啟), 왕면(王冕)에서부터 이지(李贄)에 이르는 문인의 시를 모두 수집하고 작자에 대한 간략한 열전을 붙인 『국조명공시선(國朝名公詩選 )』 등이 있다. 그의 저술은 당대의 모든 지식을 백과사전 식으로 정리하고 요약한 일종의 “지식인들의 독서지침서” 같은 역할을 했다. 원서를 사서 읽지 않고도 그 다이제스트 판을 볼 수 있게 되자 그의 편저서는 일반인들에게 크게 인기를 끌었다. 그의 책이 많이 팔리게 되자 그는 과거에 낙방한 가난한 서생들을 모아 주제별로 구절들을 뽑고 항목별로 분류하여 수많은 서책을 펴내는 사업을 벌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동 시대 조선의 허균이 그의 책을 종종 인용할 정도였으니 그가 엮거나 지은 책이 얼마나 인기리에 널리 반포되었는지 알 수 있다.  송주영, [Artist Essay 아티스트 에세이 (4)] "명나라의 천재 출판편집인, 진계유가 닫았던 문", News & Information for Chemical Engineers, Vol. 36, No. 4, 2018.

 

2] 명나라 말기의 진계유와 동기창 같은 지식인은 우리나라에서는 연대는 다르지만 정약용, 김육, 서유구 같은 실학자에서 비슷한 사례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성리학의 질곡 속에서 비주류의 사상과 지식은 보급될 수 없었으며 그만큼 근대화가 지체되고 말았던 것이다. 말 그대로 "근대화에 앞선 일본의 침략을 받은 뒤에야 한국의 지성(知性)과 발전역량이 구질서의 억압을 받아 왔음을 깨달았다." 

 

 

3] 이 글에 삽입된 스틸 사진은 프랑스 영화 르누아르(2012)의 몇 장면이다. 이 글의 내용과 직접 관련은 없으나, 영화에서는 만년의 르누아르가 관절염의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를 찾아온 젊은 여성(Catherine Hessling, 본명은 Andrée Heuschling)을 만나 그녀를 모델 삼아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운다. 그 무렵 1차 대전 중 부상을 입고 요양 차 집에 온 아들과 미묘한 삼각관계가 벌어진다. 그러나 아들이 귀대한 뒤에 부자간의 정을 새삼 깨닫는다는 스토리가 연상되어 여기 올리게 되었다. 출처: OBS, "전기현의 씨네뮤직", 2022. 1. 4. 재방송분.

실제로 카뜨린느 헤슬링은 앙리 마티스의 소개로 르누아르의 모델이 되어 "장미와 블론드 소녀" 같은 여러 작품에 등장하였다. 르누아르가 세상을 뜬 다음해 카뜨린느는 차남 쟝 르누아르와 결혼하여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쟝이 연출한 무성영화 서너 편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Annex

1. 위의 "연후(然後)" 외에 고전 한시(漢詩)나 중국과 일본의 시를 번역해 놓은 것을 필자가 운영하는 KoreanLII에 "Poems by subject" 라는 항목으로 따로 정리해 두었다. 위의 KoreanLII 사이트 아래쪽 소제목 "Traditional" 또는 KoreanLII에 들어가서 해당 기사(KoreanLII Article)를 검색하면 된다. 한글 제목에 * 표시가 있는 것은 따로 번역자가 있는 경우로 해당 페이지에 출처를 밝혔다.

 

2. 우리의 삶이란 “하늘의 구름 위에 펼쳐진 드라마를 어느 관객이 보는 것”이라고 한 결론의 국ㆍ영문 단시는 각 연이 17음절이다. 17음절은 일본 하이쿠를 본뜬 것이지만 필자같은 아마추어가 시상을 다듬고 압축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조건이다. 영어로 옮겨 보면 두뇌훈련에도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뇌체조 삼아 17음절로 다듬어 아래와 같이 블로그에 올린 국ㆍ영문의 http://koreanlii.or.kr/w/index.php/Short_poem_haiku단시(短詩, haiku)의 전체 목록은 이곳을 클릭

 

   *  하루키의 또 다른 세계 (2022. 6)

   *  진리에 기초한 하나님의 심판 (2022. 6)

   *  이제야 알았네 (20/20 Hindsight, 2022. 6)

   *  붉은 작약을 다르게 보기 (2022. 5)

   *  Yanni와 뉴에이지 뮤직 (2022. 5)

 

   *  진정한 애국자는 바로 어머니 (2022. 4)

   *  대타로 출세한 음악가 (20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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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de to Unprecedented Spring (2020. 3.)

   *  짧은 시 하이쿠로 바라본 세상 (바쇼, 부손, 잇사 - 2019. 3.)

 

   *  하이쿠 창작의 즐거움 (2019. 3.)

   *  My Haiku 3행시 짓는 즐거움 (2009. 4.)

   *  미국에서 꼭 가볼 곳 (Must-see places - 200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