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게 어인 일입니까!
편찮으시다는 말을 듣고 지난 연말에도 새해에는 건강을 잘 챙기자는 덕담도 서로 나눈 참이었는데 신문 부고 난에서 1.11(수) 별세 소식을 들었습니다. 더욱이 엄중한 코로나 시국에 조문도 사절하신다고 하여 마지막 가시는 모습도 뵙지 못했습니다. 정말 송구합니다.
다행히 판사님[1]과 친분 있는 송웅순 변호사가 작년 말 《법치주의를 향한 불꽃》 책자[2]를 보내줘서 판사님의 빛나는 발자취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지요. 판사님의 평소의 지론과 지나온 삶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한 저로서도 여러 새로운 면모를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2002년 12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UNCITRAL(유엔 국제상거래법위원회) 담보법제에 관한 워킹그룹 회의 때였죠. 저는 당시 대학 강단에 선 지 얼마 안 된 신참교수로서 법무부 국제거래법연구단의 일원이 되어 의욕이 넘칠 때였습니다. 그리고 원장님은 대학교로는 후배였지만 법조경력은 홍콩과 서울에서 국제거래 전문변호사로 활약한 데 이어 1998년부터는 법원으로 옮겨가 인천지법 부천지원 부장판사로서 국제회의에 참석하신 터였습니다.
UNCITRAL 워킹그룹 회의에서 판사님의 활약상은 단연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습니다.[3] 담보법에 관한 대륙법과 영미법, 제3세계법의 차이로 인해 회의 진행은 난항을 거듭하기 일쑤였지요. 그 때마다 위의 세 종류 법제를 잘 알고 법이론과 법조실무에 밝은 판사님이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을 내놓으시곤 했습니다. 저도 동산담보금융(Asset-based Lending)의 국제동향 파악을 위해 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지요. 우리가 앉아 있는 테이블의 국가 표시 플레이트를 세워놓고 수시로 발언을 신청(이것을 'Flag'를 든다고 하지요)하는 판사님의 모습은 경이로울 정도였습니다.
UN 산하기관의 국제회의는 5개 국어로 동시통역이 되므로 회의시간은 오전과 오후 각각 2시간 이내라는 제약이 있지요. 그래서 논란이 많은 이슈는 사회를 보는 의장이 커피브레이크를 갖자고 제안하여 몇 사람의 핵심 멤버가 구수회의를 통해 이슈를 정리하고 절충안을 제시하곤 합니다. 장광설을 늘어놓는 참석자보다 의안(agenda)에 정통한 핵심 멤버들을 잘 관리해야 명망 있고 유능한 국제회의 진행자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판사님은 첫 날부터 Inner Circle에 들어갔고 그 다음 회의에서는 Rapporteur(보고관)이 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4]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회의가 없는 시간을 이용해 우리는 비엔나 벨베데레 궁전에 전시되어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보러 갔었지요. 그때 전문 해설가 못지 않게 화가와 화풍에 대하여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을 해주셔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녁에는 공항 면세점에서 산 아이스와인을 들고 오셔서 우리 모두 근사한 만찬을 즐길 수 있었지요. 어느 곳을 찾아가든지 그곳에 얽힌 역사적ㆍ문화적 스토리를 말씀해 주실 때에는 평소에 뭘 좀 안다고 자부하던 저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비화는 위의 책에서 법원 합의부 배석을 했던 어느 판사님도 똑같이 이야기하시더군요.
원장님과 함께 근무한 그 기간 동안 정말 소중하고 귀한 것들을 많이 배우고,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법원에서 만난 인생의 스승이자 현인이십니다. 지금도 여러 복잡하고 풀리지 않는 상황들을 접할 때 가끔 '우리 윤성근 원장님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고,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실까'라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원장님과 함께 걸었던 법원 정원의 산책길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수많은 꽃들의 이름과 얽힌 이야기들, 그 가운데서 여러 인생의 소소한 수다들이 그 시절 저에게는 너무 큰 기쁨이자 위로였습니다. (정지영 변호사, 전 서울고법 판사)
판사님은 국제거래법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실무경험을 가지고 법원 내 국제거래법연구회를 이끄셨지요.
2006년 말 동산 및 채권의 양도등기제도 도입을 위한 법원내 태스크 포스가 구성되었을 때에는 팀장을 맡아 여기에 관심이 많은 저도 옵서버로 불러주셨습니다. 2007년 2월 첫 안식년을 맞은 저는 본격적인 논의에 참여하진 못했지만, 나중에 법무부에서 같은 주제로 동산ㆍ채권담보법안을 만드는 실무작업반(T/F)에 참여한 저를 많이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2013년 12월 오크밸리에서 열린 대법원 국제거래법연구회 연찬회에서 "개인정보 보호와 사법주권(司法主權)"에 관한 주제발표를 맡겨주신 것도 감사했습니다. 현재 법원내 같은 스터디 그룹인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들이 현 정권에서 영진하는 것을 보면 그 연구회 회원간의 유대가 남달랐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위의 책을 불과 이틀만에 편찬하신 강민구 부장판사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5] 저 역시 일간신문에 시론으로 기고하신 칼럼을 종종 읽으면서 제가 운영하는 KoreanLII에도 여러 편 소개한 바 있습니다.
법치주의를 향한 '불꽃' 정도가 아니라 '등대' 역할을 할 것으로 믿어지는 몇 편을 발췌하여 여기 옮겨 적고자 합니다.
법치주의(rule of law)는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적 원칙이다. 그런데 이법치국(以法治國)하는 식으로 법치를 단순히 법을 활용한 통치 정도로 이해하는 정치인을 의외로 자주 보게 된다. 준법투쟁이라는 용어도 자신들의 투쟁 목적에 법을 이용하겠다는 의미가 강하다. 이런 생각들에는 법치주의를 수단이나 겉치레 정도로 얕잡아보고 이용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에 봉사하는 법률가들이 이른바 ‘법률기술자’라 하겠다.
국회에서 법을 제정하면 그 법은 주권자인 국민의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 해석과 적용에 국회가 아닌 다른 기관이 사전적 의미 외의 요소를 고려하거나 반영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는 생각이 한때 지배적이었다. 당연히 법관에 의한 법 해석을 최소화하는 것이 민주주의 이념에 더 충실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법이라는 형식만 갖추면 어떤 내용도 주권자의 뜻이라고 이해하는 형식적 법치주의는 결과적으로 법을 빙자한 불법을 자초했다. 그런 생각이 나치즘을 탄생시켰고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인권 유린과 대학살을 불러왔으며 세계대전의 비극을 초래했다. 이제는 입법 과정의 민주적 정당성만이 아니라 그 실질적 내용의 정당성도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에 모두 동의한다. 법의 실질이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 이를 바로잡기 위한 여러 방안도 강구됐다.
국제민간기구 ‘월드 저스티스 프로젝트’는 법치주의의 네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정부기관이 법에 의해 조직되고 책임지는 기제가 확보될 것, 법이 명확하고 공개되며 안정적이고 정당할 것, 법이 제정ㆍ집행되는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될 것, 사법부가 공정하고 접근 가능할 것 등이다. 종국적으로는 독립된 사법부의 존재가 법치주의를 담보하는 중요한 제도적 역할을 한다.
미국 헌법의 아버지로 알려진 제임스 매디슨은 230년 전 “만약 법이 지나치게 방대해서 읽어볼 수 없거나, 앞뒤가 맞지 않아 이해할 수 없거나, 수시로 폐지 변경돼서 오늘은 법이 무엇인지 알아도 내일은 법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면, 국민이 대표를 통해 법을 제정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설파했다. 법이 방대할뿐더러 전문 용어로 채워져 있고, 수시로 개정되며, 서로 모순되기까지 하는 현실을 반성하게 된다. "법치주의에 대한 신앙" (2019.4. 114~116쪽)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고 그 사람들이 믿고 지키려는 가치는 제각각인데 각자 자기의 가치를 남에게까지 구현하려 한다면 그 결과는 파국적이다. 종교를 포함한 이데올로기 진영 간의 갈등이 그렇게 되기 쉽다. 가까운 우리 역사에서 당파 간 싸움이 그런 것이었다. 각 당파 또는 진영에서 신화적 이야기로 가득한 자기편 위인을 내세우고 상대측 인물을 악의 화신처럼 묘사하는 것은 가장 초보적인 자기중심적 세계관의 표출이다. 상대가 악 그 자체라면 싸워서 절멸시키는 것 외에 교섭이나 논의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는가.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이 없다면 결국 실수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는 현생 인류 성공의 비결이 상호주관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서로 협력하는 능력에 있다고 했다. 《역사의 종언》의 저자 프랜시스 후쿠야마에 따르면 한 사회의 신뢰 수준은 사회적 자본의 핵심이다. 신뢰는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믿고 존중하며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사회적 신뢰야말로 인류 성공의 기초이며 국가 번영의 근간이다.
그렇다면 서로 믿고 협조할 수 있는 신뢰의 공통점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다원적 현대사회에서 단일 가치에 대한 합의는 거의 불가능하다. 사회 구성원의 동의가 상대적으로 쉬운 적법절차(due process of law)와 법치주의에 대한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이들은 상호주관적 이데올로기로서 사회 구성원들이 믿으면 존재하고 믿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민주사회에서 법관은 적법절차의 심판을 맡고 있다. 법관의 재판에 대해 그 결론이 자신의 가치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격하면 분쟁의 평화적 해결은 어려워지고,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신뢰는 약화되며, 결과적으로 민주주의가 좌절된다. 사법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쌓기는 무척 어렵지만 훼손되는 것은 순간이다. "다양한 가치의 존중과 적법절차" (2018.7. 121~123쪽)
사람에 따라 정의감에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색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좌절되면 참을 수 없이 분노한다. 수단이 다소 과격하거나 절차가 잘못됐더라도 자신이 믿는 정의를 자기 손으로 실현하고 싶어 한다. 정의에 대한 확신은 직관적 느낌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자신의 정의감을 선험적으로 정당화되는 절대적이고 신성한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직관적 정의감은 진화 과정에서 생성된 정신 기제에 가깝다.
사람은 더 많은 몫을 분배받은 사람을 미워하기도 하고, 상대의 억울함에 공감해 자기 몫을 나눠주기도 한다. 이런 인간의 공감 능력에 의존해 다른 사람의 처지를 경청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며 설득을 통해 서로 동의할 수 있는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기본이 돼야 한다. 세 사람의 농부가 열심히 땀 흘려 각자 한몫씩 생산했다고 하자. 그중 두 사람은 봄이 오기 전에 자기 몫을 다 소비한 뒤 다른 한 사람이 남겨둔 몫을 셋이 나누자고 결의했다. 남겨둔 몫을 뺏긴 농부는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두 사람에게는 사정이 있을 수 있고 정의감도 다를 수 있다. 이때는 세 사람 간에 설득과 공감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 섣부르게 다수결에 의존하면 정의는 훼손된다.
국민 감정이라고 일컬어지는 대중의 정의감도 시대와 준거집단에 따라 상대적이다. 그러나 국민주권주의하에서 대중은 주권자처럼 보이고 선거 결과를 좌우한다. 정치인 입장에서는 생존의 문제다. 언론 역시 대중의 편견과 확증 편향에 영합하는 것이 편하다.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기회주의자들은 대중을 오도하고 갈등을 부추기며 섣부른 다수결에 의존함으로써 다수의 독재를 통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각자의 정의감에 대한 지나친 확신은 심각한 갈등과 분열을 낳으며 관련자 모두의 손해로 귀결되기 쉽다. 자신의 입장이 정의롭더라도 끝까지 관철하지 말고 적법 절차를 지키며 상대방에게 여지를 남겨주는 것이 옳다. "대중의 정의감도 상대적이다" (2019.1. 150~153)
2018.4. 오랜만에 모인 국제금융거래법연구회 회원들: 왼쪽부터 정순섭, 송웅순, 석광현,
필자, 스페셜게스트인 윤성근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김양곤, 반기로 (존칭생략)
판사님은 저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제가 2018년 4월 정년퇴직을 앞두고 국제금융거래법연구회 OB모임을 가질 때에도 참석하셔서 위로와 격려를 해주셨지요. 제가 전 직장에서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실무자들과 함께 국제금융거래법 스터디 그룹 활동을 했는데 우리 회원들이 각자 전문성을 살려 학계와 법조계의 중진이 된 것을 축하해 주셨습니다. 저 역시 그때부터 공통관심사를 서로 연구하고 토론하면서 학자로서 입신할 수 있는 발판을 쌓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판사님이 영면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옛날 자료철을 뒤적거리며 법조인으로 한정하기에는 그릇이 큰 한 인물의 사상과 가치관, 주변에 대한 배려심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침 제가 은퇴 후에 소일거리로 삼는 국내외 시의 번역 과정에서 여기에 맞는 詩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19세기 미국 시인이었던 윌리엄 브라이언트의 "죽음에 관하여(Thanatopsis)"의 일부인데 마지막 석 줄은 판사님이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셨음을 아쉬워하며 제가 덧붙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는 안식을 취하시오. 만일 그대가
침묵 속에 산 것들로부터 물러나고 어느 친구도
그대가 떠난 것을 알지 못해도 어찌하겠소? 숨쉬는 것은
모두 그대와 운명을 나누게 될 것이오. 그대가
못다 이룬 과업도 누군가 깨달음을 얻고
성취할 것임을 기대하시오. 왜냐하면
올바른 일은 외롭지 않은 법이니
석광현 교수의 추모의 글
* 이 글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석광현 명예교수가 국제거래법연구 제31집 제2호 (2022. 12)에 논문을 기고하면서 追記로 올린 추모사이다.
과거 1980년대 후반 김앤장에서 윤 원장님과 처음 인연을 맺은 뒤 국제거래를 다루는 변호사로 일하면서 긴 세월 동안 함께 쌓은 추억들이 많았습니다. 윤 원장께서 법원으로 옮기신 뒤 2005년 9월 비인에서 개최된 UNCITRAL 회의 참석을 계기로 회의장 안팎에서 공유했던 추억들과, 2014년 11월 우한(武漢)인민법원을 방문한 기회에 중국 판사들에게 한국 판결을 승인·집행해야 한다고 역설하시던 일(이제는 한 · 중 간에 상호주의의 존재 인정)과, 황학루(黃鶴樓)에 잠시 올라 한강을 굽어보며 저 유명한 최호(崔願)의 시를 감상 하던 때를 포함하여 제4회 한중국제사법 공동학술대회 참석 차 동행했던 때의 추억들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윤 원장께서 서울중앙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의 국제사건전담재판부 부장판사로 재직 당시 보여주셨던 국제사법학과 국제거래법학에 대한 애정, 필자의 부탁에 따라 국제거래법학회지에 소개할 국제거래법 판례를 수년간 정리해 주신 점 등 양 학회에 대한 관심과 배려, 뉴욕주 변호사로서 가끔 뉴욕주 변호사회의 자료 등을 일부러 챙겨 주시고, 국제거래법과 국제사법에 대한 우리 법조인들의 무관심을 개탄하던 필자에게 법정에서 필자의 저술이 빈번히 제출된다면서 위로해 주시던 따뜻한 마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필자에게 윤 원장님은 합리적인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온화한 성품을 가진 인물로, 그리고 바쁜 실무가이면서도 학술적 관심을 유지하고 국제거래 변호사로서의 실무 경험과 미국·중국 유학 경험 등을 통하여 국제적 마인드를 갖춘 법률가이자, 뒤늦게 법원에 합류했음에도 제자리를 찾아 후배들에게 귀감이 된 법조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자질과 품격이 미달인, 심지어 부끄러움도 모르는 일부 인사들이 법조계의 고위직에 있는 현실에 상실감이 배가됩니다.
윤 원장님의 해상법학, 특히 국제해상법학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해사법원의 설치를 위한 열정과 노력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래저래 국제법무에 관한 한 윤 원장님은 필자의 道伴이셨습니다. 각자의 궤적에 따른 인생 여정에서 인연을 맺고 추억을 공유할 수 있었음에 대해 사의(謝意)도 전하지 못한 채 얼떨결에 맞이한 永別에 비통하였고 지금도 커다란 허전함이 남아 있습니다. 이제나마 감사를 드리니 부디 받아주시고 미구(未久)에 다시 만나 회포를 풀기를 기대한다는 말씀을 전하면서 그때까지 하늘나라에서 평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Note
1] 고인은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로서 조정 관련 사건을 담당했으나 2017년 초까지 서울남부지방법원장을 역임하였다. 고인은 대법관후보 물망에도 오르시던 분이었고, 잘 나가는 로펌 변호사를 그만두고 연수원 동기보다 뒤쳐지는 법관의 길을 택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원장'이라는 직함보다 그가 천직으로 여기셨던 '판사'로 칭하기로 한다.
2] 서울고등법원 강민구 부장판사는 사법연수원 동기이기도 한 동료 윤성근(尹誠根) 부장판사의 와병을 안타까워 하던 중 그간의 언론 기고 칼럼을 전부 모아 단행본을 만들었다. 이미 저자와 기존 칼럼을 모아 책으로 내자는 합의가 있었기에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구글로 검색하여 자료정리에서 편집, 디자인까지 48시간만인 2021. 11. 17 완성했다고 한다. 이미 법원도서관장 재직 시부터 사법부 디지털 전환에 앞장섰고 본인이 스마트폰 100% 활용의 전도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책의 격려사, 추천사에 무려 34분의 동기생, 동료, 역대 배석판사들이 참여했으나 정작 저자는 건강이 여의치 않아 인사말 서문이 백지여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본인의 블로그 <디지털 상록수>에 누구나 전자책(E-Book)을 다운로드 받아 읽어볼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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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필자가 법무부 국제거래법연구단의 일원으로서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동안 그 실력에 탄복한 법관이 한 분 더 있었다. 2008년 대법원에서 비엔나에 파견한 정창호 부장판사였다. 주 오스트리아 대사관에서 근무하면서 사실상 비엔나에서 열리는 한국 관련 모든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자연히 그 의제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UNCITRAL 사무국과 협력관계가 돈독해져서 2011년에는 캄보디아에 설치된 크메르루주 전범재판소 재판관으로 선출되었다. 임지인 광주지방법원과 프놈펜을 오가다가 2015년에는 그의 실력을 인정한 UN 법무국이 적극 천거하여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재판관으로 선출되었다. 우리나라가 법률 분야에서도 세계를 리드할 수 있도록 사법부에서 제2, 제3의 윤성근, 정창호 판사가 출현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UNCITRAL(United Nations Commission on International Trade Law)은 1966년 UN총회의 결의로 설립되어 국제상거래법의 점진적 조화 및 통일을 촉진하고 이와 관련된 국제협약의 성안 및 기존 관행의 성문화를 목적으로 한다. 우리나라에서 민법, 상법에 이어 제3의 사법으로 일컬어지는 국제물품매매협약(Sales Convention)이 대표적인 성과로 꼽힌다. 한국은 2004년 UNCITRAL의 정회원국이 되었으며, 2012년에는 인천 송도에 아시아・태평양 지역사무소(RCAP)가 개설되었다.
4] 2002년부터 담보거래법제에 관한 UNCITRAL 국제회의에 대법원 측 대표로 파견되었던 윤성근 판사는 법무부에서 파견된 필자보다도 먼저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UNCITRAL 실무작업반 회의에서 논의하였던 주요 사항과 국내 담보거래 현황이 잘 정리되어 있으며, 그후 대법원과 법무부에서 국내입법 방안을 논의할 때 주요 참고자료가 되었다. 윤성근, “담보거래에 관한 UNCITRAL 입법 가이드와 국내 담보거래 현황”, 국제거래법연구 제15집 2호(2006.12), 275~318쪽.
5] 이 책의 출간 비용은 '밤나무 검사'로 유명한 송종의 전 법제처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공익법인 천고법치문화재단에서 지원했다. 책이 나오는 것을 알고 법조계에서 십시일반 후원이 쇄도해 출간 20여일 만에 1쇄 5000권이 완판됐다. 법치주의를 위한 저자의 열망을 사회적으로 널리 알리자는 취지에서 전자책으로 무료 발간하는 한편 저자는 책 판매 수익금 중 일부를 자폐성장애를 대표하고,자폐성장애인과 그 가족을 지원하는 한국자폐인사랑협회와 북한 인권단체인 사단법인 물망초에 각각 1000만 원씩 기부했다. 문화일보, "윤성근 판사, 칼럼집 수익금 2000만원 기부", 202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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