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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Day] 도발적 사진작가 헬무트 뉴튼

Onepark 2022. 1. 13. 07:30

G: 매달 13일 책을 한 권씩 소개해 주시기로 했는데 벌써 한 달이 지났네요.

P: 네, 은퇴 후의 삶이 지루하다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시간이 시속 70km로 빨리 달리는 것 같습니다.

 

G: 오늘은 무슨 책인가요?

P: 제가 미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학기 중에 꼭 소개하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연금술사>를 쓴 코엘료, 영화 <꿈(Dreams)>을 만든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 그리고 오늘 소개할 '관음과 욕망의 연금술사'로 불렸던 헬무트 뉴튼 세 사람이었지요.

 

G: 앞의 두 사람은 저도 알겠는데, 헬무트 뉴튼은 처음 들어보는 것 같습니다.

P: 그럴 거예요. 패션 사진작가였거든요. 그런데 그의 삶의 이력이 좀 독특하여 에로티시즘(官能美)을 패션 사진에 끌어들인 분으로 유명하지요. 그런 공과도 있지만 20세기의 격변기를 헤쳐온 삶이 젊은이들에게 거울이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G: 아~ 그 당시 카메라라는 새로 나온 기기를 활용하여 어떻게 세계적인 사진작가가 되었느냐는 이야기인가요?

P: 제가 이 책을 손에 넣게 된 것도 우연이었습니다. 가을철이면 캠퍼스 중앙도서관 앞에서 도서전이 열리곤 했는데 한 사진작가 자서전의 "관음과 욕망의 연금술사"라는 부제에 눈길이 끌렸지요. 내용을 훑어보니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유대인으로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던 그의 생존분투기에 관심이 컸습니다.

 

헬무트 뉴튼(Helmut Newton, 본명은 Helmut Neustädter)은 1920년 10월 31일 베를린 인근의 쇠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1차 대전 러시아 전선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애 딸린 부유한 미망인과 결혼하여 그녀의 전 남편 소유의 단추공장 사장이 되었다. 그는 팔삭둥이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가 결혼식을 올렸을 때 이미 임신 2개월째였기 때문이다. 당시 베를린에 있는 미국인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는 한편 이바(Yva, 본명은 Frau Simon)라고 하는 유명한 사진작가의 도제(徒弟)로 일하면서 체력단련을 위해 수영강습을 받았다.

 

G: 여기까지는 가정형편이 넉넉한 부모가 여러 군데 학원을 보내는 한국의 사정이나 다를 바 없네요. 우리나라에도 영어를 가르친다고 서울의 외국인학교, 송도나 제주도의 국제학교에 보내는 가정이 많다고 들었어요.

P: 역시 그의 아버지도 한국의 아버지와 진배 없었습니다. 학교 성적이 형편없이 나쁜 그를 보고 실망한 나머지 말했습니다. 남이 알아주는 괜찮은 기술도 없이 아들은 영화 카메라맨이 되고 싶다고 하질 않나,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은 장난감 같은 카메라였으니까요.

 

“얘야, 넌 깡통을 차게 될 거다. 네 머릿속에 든 거라곤 여자와 사진뿐이니 말이다.”

당시 젊은 유대인들은 이민을 준비하기 위해 갖가지 교육을 받고 있었다. 의사, 변호사, 건축가 등의 전문직 종사자들도 목수, 인쇄공, 기계공 등의 기술을 배웠다. 손으로 생계를 버는 수단이 생사를 가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필사적으로 배우는 중년의 학자나 사업가들이 많았다. (73쪽)

 

그러나 유럽에 전운이 감돌면서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함에 따라 유대인인 그의 가족은 1934년 뉘른베르크 인종차별법에 의해 사업체를 포함해 거의 모든 재산을 박탈 당하고 말았거든요.

 

G: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장래가 어둡다고 보았지만, 어머니의 혜안으로 수영 및 영어회화 실력, 사진 촬영 및 인화 기술 등 외국에 나가서 살 수 있는 실탄은 갖춘 셈이었군요.

P: 네, 그의 어머니가 수완을 발휘해서 만들어준 출국 여권과 중국 톈진까지 가는 증기선의 티켓, 약간의 여비를 가지고 1938년 12월 트리에스테에서 혼자 배를 탔습니다. 반면 나치에 사업체와 재산을 뺏긴 '꼰대' 아버지는 그간의 고초로 상노인이 되어 어머니와 함께 남미로 떠났지요. 베를린 주(Zoo)역에서 작별할 때까지도 기성세대의 눈에는 그가 놀기를 좋아해 제 몫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고 해요.

여기서 헬무트 같은 신세대의 생존력을 알 수 있습니다. 젊고 활달한 데다 독신이며 영어를 할 줄 알고 카메라를 손에 들고 있다는 사실이 유리하게 작용한 거죠. 제가 우리 학생들에게 강조한 것도 젊음을 바탕으로 글로벌한 감각과 영어 실력, 그리고 어디서나 써먹을 수 있는 컴퓨터/정보기술(IT)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곤 했지요.  

 

 

G: 하지만 요즘 MZ세대는 누드 사진을 언급하기만 해도 포르노라든가 페미니즘, 성차별, 성희롱을 연상하고 심지어는 교수의 발언을 녹음하고 동영상으로 찍는 사례마저 있으므로 조심하셔야 했겠습니다.   

P: 물론 제가 강의 시간 중에 헬무트 뉴튼의 작품사진까지 보여준 것은 아니었고 관심있는 사람은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더 알아보라 하고 아주 건전(?)하게 끝내곤 했지요.

 

저 개인적으로는 그가 어머니를 비롯한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핸디캡을 극복하였고, 자칫 섹스나 밝히는 '잡놈'으로 끝날 뻔 하였음에도 새 시대를 여는 예술가로 자리매김한 점에 주목했습니다. 나중에 말씀드리지만,[1] 싱가포르에서 구세주 같았던 여성이 그를 타락으로 이끌지 않고 고차원적인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어요. 그가 운이 좋았다고 할까 당시 정세가 악화되면서 독일계 주민으로서 몇 년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송되어 비교적 자유로운 신분으로 수용소와 군대라는 조직에서 생활해야 했지요.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의 뮤즈이자 부인이 된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 리비도(Libido)를 승화(昇華)[2]시킨 창의적인 사진 예술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 Woman Examining Man, Saint Tropez, 1975

 

헬무트 뉴튼 자서전의 나머지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의 글을 인용하기 어려운 것은 19금에 해당하는 여성편력을 적나라하게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2004년 7~8월 그의 작품 사진들이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전시되었을 때 여실히 드러났다. 관람객들은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누드 사진에 놀라움을 표시했다고 한다.[3]

 

나치의 박해를 피해 싱가포르로 간 헬무트는 일본군이 가까이 진격해오자 여권이 만료된 독일계 유대인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로 강제 이송되었다. 수용소에서 지내던 중 안정된 신분을 되찾기 위해 1942년 오스트레일리아 군에 자원입대하여 운전병으로 복무했다. 1946년 전역한 후 그의 특기를 살려 멜버른에 자그마한 사진 스튜디오를 열고 현지 극장에서 연극을 하던 새내기 여배우 준 브라운(June Browne, 사진작가명 Alice Springs, 1923-2021)과 1948년 결혼했다.

헬무트가 싱가포르에 머물게 된 것은 싱가포르의 복지위원회가 피난선에 탄 승객 중에서 싱가포르에 필요한 기술과 재능을 가진 사람을 선발하여 체류증을 발급해주고 취업까지 알선했기 때문이다. 채 스물도 안 된 그는 1938년 크리스마스 전날 싱가포르에서 하선하여 스트레이트 타임즈 사진부에 배속되었다. 싱가포르 입국허가는 그의 생애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던 것이다.[1]

 

헬무트 뉴튼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파리로 이주하여 아름답고 도발적인 여인의 사진을 찍으면서부터이다. 1960년대 보그, 퀸, 엘르, 플레이보이 등 세계 일류의 잡지와 일하면서 패션 누드라는 영역을 개척하였으며 세계적인 사진작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문화훈장(1966), 파리시의 전국 그랑프리(1990), 독일연방공화국의 대십자훈장(1992), 모나코 문화훈장(2001) 등을 수여받았다.

사진집으로는 회고적 성격이 강한 Helmut Newton Works, Big Nudes, Sumo 등이 있다. 특히 그의 첫 사진집인 White Women은 세간에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변태의 제왕', '포르노의 왕자'라는 별명을 안겨주기도 했다. 헬무트 뉴튼은 2004년 1월 미국 할리우드에서 자동차 급발진으로 인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 Yves Saint Laurent 의상을 입은 모델. Vanity Fair, 1992
* 헬무트 뉴튼이 Vanity Fair 화보로 찍은 가수 마돈나, 1990

 

Note

1] 헬무트 뉴튼의 자선을 읽다보면 1938년 크리스마스 전날 그의 운명을 뒤바꿔 놓았던 한 여성에 대한 강렬한 추억이 그의 작품활동을 지배하였음을 알게 된다. 그는 싱가포르 복지위원회의 선상 심사관이었던, 빨간 매니큐어를 한 현지 사업가 조세트였다. 그 때문에 싱가포르에 정착한 후 그녀와 재회하여 육체적인 사랑을 나눈 것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자세한 회고록을 남겼던 것 같다. 남성을 압도할 정도의 '힘 센 여자'라는 Woman Examining Man (1975), Big Nudes 연작 (1980)과 주방과 세탁기 앞의 Domestic Nude (1992) 사진을 찍게 만들었음에 틀림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를 낳고 키워준 어머니나, 그의 모델이자 사진작품의 마케팅을 맡아 평생 반려자가 된 준 브라운보다도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여인이었다.

 

베를린 도심의 동물원(Zoo)역 부근에는 헬무트 뉴튼 사진미술관이 있다. 그가 1938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부모의 배웅을 받으며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났던 정거장이다. 사진미술관 계단 전면에는 Big Nudes 연작 사진 5점이 걸려 있다. 아무런 의상도 걸치지 않은 여인의 사진이 새로운 차원의 패션 사진의 기원이 되었다는 게 아이러니컬하다.

헬무트 뉴튼은 1981년 패션 모델 넷이 똑 같은 포즈와 걸음걸이로 옷을 입은 모습과 벗은 모습을 나란히 대비시킴으로서 여성 패션을 보는 두 가지 시선을 사진작품 "Sie Kommen, Paris (Dressed and Naked)"(1981)에 담았다. 

 

2] 헬무트 뉴튼이 세간의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패션 누드 사진작가라는 예술가의 영역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독일, 모나코, 미국 등 내노라 하는 예술 애호국으로부터 최상급의 대우를 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마치 프란치스코 고야가 "옷을 입은 마야", "옷을 벗은 마야" 연작을 남긴 것을 연상케 한다. UN성냥곽에 인쇄된 "옷을 벗은 마야"는 우리나라에서 공연음란죄에 관한 대법원 판결(70도1879)이 나오게끔 만들었다. 누드 여성이 멋있는 패션 의상을 입었을 때의 모습이 훨씬 더 고상하고 아름답다는 인식(물론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지만 그것은 보는 이의 상상의 자유)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3] 헬무트 뉴튼의 자서전을 번역한 이종인 씨도 '예술과 외설' 논란을 의식한 나머지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여 놓았다.

 

나는 유대인인 뉴튼이 나치의 마수를 피해 싱가포르로 도피한 다음 다시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기까지의 과정이 진술되어 있는 챕터까지 번역하면서 그의 솔직하고 숨김없는 애정 행각 고백에 놀라기도 하고. 또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왜 이렇게 섹스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뒤에 그가 사진작가로 성공하는 과정에 이르러서는 아, 정말 그에게는 섹스가 평생의 화두였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 ······

 

사실 뉴튼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는 섹스하고, 사진 찍고,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인생의 전부였던 사람이다. 생애 후반으로 갈수록 그가 유일하게 재미를 느끼는 것은 아름다운 여자들을 사진 찍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섹스하기와 연장선상에 있는 활동이었다. …… 그러나 그가 찍은 것은 섹스의 기억이지 섹스 그 자체는 아니었다.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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