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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고요할 '靜' 자에 얽힌 사연

Onepark 2022. 1. 25. 18:25

우리나라의 남녀노소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좋아하는 가요 중에 이선희의 인연(因緣)이 있다.

영어로는 "Fate" 또는 "Destiny"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내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영어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고달픈 삶의 길에 당신은 선물인 걸
이 사랑이 녹슬지 않도록 늘 닦아 비출께요
취한 듯 만남은 짧았지만 빗장 열어 자리했죠
맺지 못한데도 후회하진 않죠 영원한 건 없으니까

You're an unexpected gift in my life filled with misery and troubles.
I'll brush upon the lovely gift lest it should get any stain.
Our encounter briefly passed as if in a drunken mode, but firmly settled down.
I have no regret even though we have no further relations because nothing is everlasting.

 

영어로 바꿔서 읽어보니 'unexpected gift in my life'란 표현이 훨씬 실감나게 느껴진다. ("인연" 노래 가사의 전문 영역은 이곳을 클릭)

서양 예술사를 보면 로댕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관계가 그러했다.

1902년 젊은 시인은 루 살로메와의 폭풍과 같은 연인관계를 정리하고 파리로 갔다. 그리고 한 예술잡지의 청탁으로 정상에 우뚝 선 조각가 로댕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1] 

우리나라에서도 1920-30년대 문화계  인적 관계도를 보면 근대문학과 미술의 세계를 개척하던 예술가들이 동인지와 신문ㆍ잡지를 통해 서로 활발한 교류를 나눴음을 알 수 있다.

 

* 1920-30년대 화가 문인들의 휴먼 네트워크스. 출처: 덕수궁 현대미술관 2021.5. 전시회

필자도 전에 근무했던 한국산업은행(이하 "산은") 조사부에서 겪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최근 나의 'Digital Life'에 대해 생각하던 중 국내 처음으로 개인용 컴퓨터(PC) 사용법을 배워 업무에 적극 활용하던 일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1977년 말 산은에 입사한 필자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음에도 몇 년 간 외화 산금채 발행 등 국제금융 업무를 다루다가(신입사원으로서 업무를 '배웠다'는 말이 더 적확할 것이다) 조사부로 옮겨 경제조사과에 배치되었다. 조사부를 대표하는 경제조사과의 책임자는 김기성(金玘成) 과장이었다.  나는 글씨를 잘 쓴다는 죄(?)로 임원실에 보고하는 각종 보고서를 도맡아 쓰게(hand writing) 되었다. 그 중에서도 매주 '주간업무계획'을 손으로 쓰는 일이 매우 곤욕스러웠다. 조사부에 여러 과(課) 조직이 있고 하는 일도 많았기에 임원실에 제출하기까지 수없이 수정판을 새로 써야 했던 것이다.

 

때마침 PC 워드프로세서로 이 작업을 간단히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 필요성을 상사에게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래서 은행에 단 3대를 들여올 때 나도 조사부 요원으로서 삼성NEC에 가서 PC 사용법에 대한 연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당시 직속 상사이던 김기성 과장은 행내 정보통이었으며, 주경야독으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분이었다. 무엇보다도 한국 경제의 현안 이슈의 핵심을 파악하고 브리핑함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자였다.[2]  당시 김 과장의 휘하에는 학술연수 후 박사학위를 받고 충북대 경영학교수로 전직한 강성룡 조사역, 중앙경제신문사로 이직하여 나중에 중앙일보 이코노미스트 대표를 역임한 허의도 씨, 미국 유학을 마치고 POSCO 경영연구소를 거쳐 POSRI 차이나 대표를 맡고 있는 강태영 씨 같은 쟁쟁한 행원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새해가 되어 김기성 이사님에게 연락을 드렸다.

코로나 팬데믹이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었으나 작년에도 몇 차례 연기를 하였기에 오미크론이 우세종이 되어 더 확산되기 전에 만나 뵙고 싶었다. 

김 이사님은 은퇴 후 한문을 정식으로 공부해 한문고전에도 조예가 깊으시고 색소폰 연주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이고 계신다. 그래서 내가 얼마 전 블로그에 올렸던 진계유의 연후(然後)를 미리 보여드렸다.

1월 24일 시내에서 뵙자마자 김 이사님이 고요할 '정(靜)' 자로 말문을 여셨다.

'연후'라는 진계유 글의 첫머리에 나오는 '정좌(靜坐)'가 한문 고전에 많이 등장하는 것을 아느냐고 물어보셨다.

 

靑나라 주석수(朱錫綬)는 《유몽속영(幽夢續影)》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日間多靜坐, 則夜夢不驚; 一月多靜坐, 則文思便逸."

(낮 동안 오래도록 고요히 앉아 있으면 밤에 꿈자리가 뒤숭숭하지 않고,
한 달동안 오래도록 고요히 앉아 있으면 글 속에 담긴 생각이 문득 맑아진다)

 

또 이런 말도 남겼다고 한다.[3] 

"不靜坐, 不知忙之耗神者速; 不泛應, 不知閑之養神者眞."

(고요히 앉아보지 않고는 바쁨이 정신을 얼마나 빨리 소모시키는지 알지 못한다.

이리저리 불려다녀 보지 않으면 한가로움이 정신을 얼마나 참되게 길러주는지 알지 못한다)

 

예산 추사 고택 기둥에도 주자(朱子)의 '반일정좌(半日靜坐), 반일독서(半日讀書)'가 추사의 글씨로 걸려 있다.[3]

"하루의 절반은 고요히 앉아 마음을 기르고, 나머지 절반은 책을 읽는다."

 

* 호수 위의 보름달. 출처: tistory 산과 야생화

내가 정년퇴직 후 2019년 5월 중국 강남 일대를 두보와 이백, 주희의 발자취를 따라 문사철 기행으로 다니면서 동정호 악양루에 가서는 마오쩌둥 주석이 두보의 시 《登岳陽樓》를 친필로 쓴 편액을 본 적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김 이사님은 宋나라 밤증엄(范仲淹)이 쓴 《岳阳楼记》에도 '静影'이라는 보다 문학적이고 시각적인 표현이 등장한다고 하셨다.[3]

 

   而或長烟一空    때때로 넓게 퍼져 있는 연무가 모두 흩어지고 

   皓月千里           휘영청 밝은 달빛이 천리를 비추니

   浮光耀金           물결이 일면 반사된 달빛이 금빛으로 빛나고

   静影沉璧           조용한 호수 위에 비친 밝은 달은 푸른 옥구슬이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 같구나 

 

김 이사님은 위의 글을 친히 한자로 써서 보여주셨다.

나는 '정좌'란 말을 가지고 단시(短詩)를 지어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앉아'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았을 뿐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김 이사님은 이 말이 불경과 중국 고전의 곳곳에 나와 있음을 지적해 주신 것이다.

 

일찍이 최인호의 《商道(상도)》에 나오는 고사 - 임상옥이 석숭 스님에게 받은 세발솥 '정(鼎)' 자의 비밀을 탐구하기 위해 추사 김정희를 찾아갔던 일화가 생각났다. 그 결과 임상옥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홍경래의 난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수준 높은 중국 고전에 접하게 되어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도 연상이 되었다. 미치 앨봄이 대학 때의 은사가 루게릭 병을 앓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화요일마다 모리 교수를 방문하고 한 학기에 해당하는 14주에 걸쳐 인생강의를 듣고 기록한 책이 아니던가!

 

마침 그날 약속장소로 가기 위해 지하철 역사에서 전철을 기다리던 중 <사랑의 편지> 게시글에서 읽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인디언의 우화 중에 눈이 오면 한 사람 발자국 밖에 생기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적에게 그들의 모습을 들키지 않도록 추장이 다녔던 길을 다른 사람들도 그 발자국을 따라서 걷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날 전철을 타고 귀가하면서 나도 여간해서는 스승의 발자국을 넘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Note

1] 스물일곱의 시인은 황혼의 나이에도 대리석과 청동에서 살아움직이는 생명체를 꺼내놓는 조각가를 섬세한 필치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로댕의 비서가 되었으나 사사로운 오해로 해고를 당하기도 하고 다시 화해하는 등 관계의 기복을 겪었다. 릴케는 말이 필요 없는 시간 속에서 정신적 교류가 사치스러울 만큼 쉼 없이 땀 흘리는 육체 예술의 현장을 지켜보며 사물을 관찰하는 시각에 대한 접근방법을 180도 바꾸었다고 한다. 출처 : [안중찬의 書三讀], "여인과 장미를 사랑한 로맨티스트, 라이너 마리아 릴케", 넥스트데일리, 2017. 2.17.

 

2] 1970-80년대의 산은 조사부는 정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을 줄곧 수행해 왔다. 그렇기에 조사부의 3, 4급 과장, 대리는 요즘으로 치면 정부 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이 하는 일과 흡사했다. 당시 산은 총재는 정부 차관급 인사가 임명되어 그 다음 장관급으로 가는 중간 포스트였으므로 산은 총재 이하 임원들은  매주 '금요 조찬회'를 열고 행내 전문가들로부터 국내외 경제동향에 대한 설명 듣기를 좋아했다.

당연히 경제조사과 김 과장한테는 축구 경기의 센터포드 같은 역할이 주어졌다. 그가 박람강기(博覽强記) 박학다식(博學多識)한 것도 평소에 일본 서적을 구해서 읽고 싱가포르 해외근무를 통해 쌓은 폭넓은 경험의 소산이었다. 그 중의 핵심 내용은 2003년 퇴직 후 전남대와 숭실대 강단에 서면서 강의교재로 저술한 《기업금융론》(2006)과 《기업경영사》(2007)에 여실하게 드러나 있다. 김 과장은 그 후 국제기획부장, 종합기획부장, 리스크관리본부장 등을 거쳐 이사(요즘은 부행장이라 함)를 역임했다.

 

3] 한문 원문은 다음 출처를 각각 참고하였다.

* 주석수(朱錫綬), 《유몽속영(幽夢續影)》 : '여름개굴' 블로그

* 추사 고택의 글, [정민의 세설신어 98] 담박영정(淡泊寧靜). 조선일보, 2011.3.24.

* 《岳阳楼记》의 전문과 해석은 '정백성의 중국' 블로그 참조. 이 글은 北宋의 문인 범중엄(范仲淹)이 1046년 10월 새로 수축한 악양루를 보고 지은 산문이다. 파릉군(巴陵郡) 태수(太守)로 있던 벗 등자경(滕子京)의 요청으로 岳阳楼에 대하여 쓴 것이라고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