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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트 2] 올드 스타일과 Silver Lining

Onepark 2021. 12. 3. 08:10

전편에서 계속

 

IV. 산 너머 산

 

어젯밤의 홀가분한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제까지의 작업은 국문 연설 원고였고, 회장이 OK하면 바로 영어로 번역하는 후반 작업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전자가 말하는 사람(speaker) 기준이라면 후자는 듣는 사람의 반응(response from listeners)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기에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인 것이다. 사무실에는 국제영업통, 해외유학파가 수두룩해도 영어 연설문 원고가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회장님의 눈에 들기는 쉽지 않았다.

 

2월 19일 오전 일찍 회장실에 들어간 L 부장이 좀처럼 나오질 않아 시간이 갈 수록 걱정이 에스컬레이트되었다.

기다리다 못해 회장 비서실로 확인해보았다. 다행히 연설 원고 때문이 아니라 중간에 내방 손님이 있어서 지연되었다는 대답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한 시간 만에 부장이 사무실에 돌아왔다.

회장님이 새 원고를 읽어보고 몇 군데 손을 대기는 했으나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수정판을 완결 짓고 난 후 일단 K는 영역 작업에서는 손을 떼기로 했다. L 부장이 K에게 또 다른 일거리를 맡긴 데다 이번 옴니쇼럼 컨퍼런스는 본래 해외 자금조달 담당인 N 과장 소관이었기 때문이다.  N 과장도 해외 MBA 출신일 뿐더러 영어도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다.

L 부장은 N 과장을 불러 지시를 하였다.

"드래프트 만드느라 우여곡절이 있었소. 이제 영어 번역이 남았는데 미국 사람을 시키든지 영국 사람을 시키든지 내일 아침까지 영문 원고를 보여 주세요."

* 출처: 통번역 다음블로그 sky4770/203

 

그러나 다음날 아침 자그마한 소동이 일어났다.

L 부장이 N 과장 외에 K까지 불러서 독회(讀會)를 하자고 말했다. L 부장 역시 영어라면 자신이 있지만 하도 회장의 핀잔과 지적을 많이 받았던 터라 처음부터 단도리를 할 작정인 것 같았다.

그런 기준에서 L 부장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했다. 몇 문장은 번역이 누락된 것 같고, 그 동안 몇 차례 불려다닌 것에 미루어 볼 때 회장의 의도 내지 관심사가 영어로 된 문장과 문맥에서는 충분히 드러나지 못한 것 같다는 지적이었다. L 부장의 말에 K가 고개를 끄덕였더니 L 부장이 K를 보고 말했다.

"국문 원고를 쓴 사람이 더 잘 알겠지. 이번 번역작업에는 당신도 참여하는 게 좋겠소."

그 결과 K도 잠시 물속에 들어갔다가 물귀신에게 끌려가는 형국이 되었다. K는 자기 할 일은 제쳐둔 채 영문 번역작업에도 깊숙히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초의 번역자가 어려움에 봉착하여 의역으로 건너뛴 대목이 몇 군데 있었다. 그렇다고 L 부장의 의견에 따라 축자적(verbatim)으로 번역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K로서는 영한사전, 한영사전에 동의어사전(Thesaurus)까지 총동원해가면서 번역에 고심하였다.

한국 사람이 쓴 영문을 읽을 때면 ‘고작 이렇게 밖에 못쓰나’ 속으로 비웃곤 한다. 하지만 막상 자기가 쓸려고 하면 첫 단어부터 막히는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K는 자신이 써놓고서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What do you mean by that?) 자문(自問)을 해가며 글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어렵사리 쓴 영문이기에 그랬나? 오후에 L 부장이 회장에게 원고를 다시 보여드렸더니 이번에는 어조가 너무 진지하고 몇 군데는 직역투가 난다며 미국 사람들이 유쾌한 마음으로 들을 수 있게끔 고쳐달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같은 내용이라도 이를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전달하는 것은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일까?  L 부장으로부터 회장의 코멘트를 전해 듣는 K로서는 직장생활 하던 중에 제일 어려운 과제를 떠안은 심정이 되었다.

밤 늦게까지 남아 회장 지시대로 고쳐놓았으나 이번에는 교열(proof reading)을 볼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N 과장은 시간이 너무 늦은 데다 그동안 서울에 나와 있는 미국 증권회사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부탁을 했기 때문에 더이상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다고 걱정했다. 그러더니 시차(時差)가 있으므로 지금 뉴욕의 사무실에 나와 있는 컨퍼런스 공동주최 측(Merrill Lynch)[2]에 팩스 교열을 부탁하겠다고 아이디어를 냈다.

최종본을 뉴욕에 보내고, 일을 확실히 위해 다시 한 번 더 보내고 비로소 K는 한숨을 돌렸다. 이날 밤은 N 과장 라인의 O 대리가 차를 가지고 나왔으므로 눈도 약간 내린 밤길이었지만 K는 그 차에 편승하여 어려움 없이 귀가할 수 있었다.

 

* 먹구름 가장자리의 빛나는 테두리가 실버라이닝이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Coffee&Travel

 

V. 반전(反轉)

 

이튿날 금요일 아침 메릴린치 본사에서 보낸 교열을 마친 원고가 하필이면 메릴린치 서울사무소로 가는 바람에 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그네들은 公과 私가 분명하고, 따로 요금을 물지 않아도 되는 자기네 전용회선을 쓰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아무튼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N 과장과 K가 받아본 영문 수정원고는 역시 네이티브 스피커가 손을 댄 만큼 어색하던 문장들이 매끄럽게 고쳐져 있었다. 그리고 영어를 잘하고 못하는 것이 이런 쉬운 단어를 제대로 쓰고 못 쓰는 데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날 점심은 회장님으로부터 최종 OK와 함께 칭찬까지 들은 L 부장이 며칠씩 수고를 한 직원들을 위로하는 회식을 갖겠다고 말했다.

회사 부근 은행나무가 우거진 고깃집 여종업원이 반찬그릇을 놓다가 물 컵을 엎지른 해프닝이 있었다. K의 바지 앞이 물에 젖어 마치 K가 오줌 싼 것 같은 모양새였다.  

김칫국물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마를 테니 이 일은 그로부터 몇 시간 후에 벌어질 상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수고가 모두 도로(futile labor)로 끝나버릴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감독 당국으로부터 우리 회사의 노사협상이 타결될 때까지는 회장의 해외출장을 허가할 수 없다는 엄중한 메시지가 왔다고 했다.

"회장이 참석하는 행사가 아니라면 그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는데”하는 생각과 함께 "어떻게 이런 사태도 미리 예측하지 못했나?" 하는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 다음 일도 결코 수월치는 않았다. K가 새로 지시 받은 일은 회장의 불참에 따른 사과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회장이 대신 낭독할 원고로 고치는 한편 질의 응답 순서를 생략한 데 따른 내용 수정이 불가피했다. 일이 꼬이기 시작하니 밑도 끝도 없었다.

같이 일하는 R 대리의 말처럼 레슬링에서 헤드록 걸린 선수처럼 빠져나올 길이 막막했다. 이 일에 직접 간접으로 관련된 N 과장 이하 다른 직원들의 고초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항공권의 예약부터 주요 인사와의 면담약속에 이르기까지 회장의 일정 변경에 따라 처리해야 할 소소한 업무가 한(限)이 없었다.

 

결국 워싱턴 옴니쇼럼 컨퍼런스는 부회장이 대신 참석하기로 행사 일정이 변경되었다. 그리고 1주일 이상을 끌며 감독기관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노사협상은 회사 측이 노조의 팔을 비틀어 간신히 노사합의를 얻어냈다. 그리함으로써 회장은 워싱턴을 제외한 나머지 해외출장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할 수 있었다.

K는 1992년 초부터 시작된 컨퍼런스 기조연설문 작성 건이 반전을 거듭하다가 허망하게 끝나버린 것에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직접 담당하는 일을 제쳐 놓은 채 덩달아 며칠씩 야근을 했던 K는 쓴 웃음만 나왔다.

그리고 창밖으로 구름 몇 점 떠 있는 하늘을 올려다 볼 때 연설문 중에 청중의 주의를 끌기 위해 삽입했던 영어 속담이 떠올랐다.

"Every dark cloud has a silver lining."

(아무리 고생스러운 일이라도 보람 있는 대목이 있기 마련이다.)

월급쟁이의 푸념이기도 하지만, 마음속으로 외쳤다.

"That's all right. The show must go on."

(괜찮아. 이런 일 한두 번 겪었나? 닥치면 또 해야지.)

 

* 워싱턴DC 도심의 옴니쇼럼 호텔 옥외 풀장. 일정이 바쁜 투숙객들에게는 '그림의 떡'이 아닐 수 없다.

 

VI. 에필로그

 

K가 IMF 위기 전 1990년대에 직장생활 중에 겪었던 일은 위와 같이 콩트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장편(掌篇)소설, 즉 손바닥만한 소설은 대개 사람들이 살아가는 한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짧은 대신 유머나 기지로써 읽는이를 감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K의 짧은 이야기는 감동보다는 "그땐 이랬었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군" 하는 놀라움과 비웃음의 대상이 될 것 같다. 바로 그러한 단선적(單線的)이고 아날로그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해 그로부터 10년이 못 되어 금융산업부터 IMF 위기를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짧은 이야기지만 요즘의 젊은이가 보기에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업무관행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우선 한국 기업들이 진출한 시장이 세계 전역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기업경영과 지배구조에 외국인 참여가 늘어나면서 전문 통ㆍ번역사를 채용한 회사도 많아졌다.  또한 세계화와 조기유학 덕분에 30년 전에 비해 영어 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어에도 능통한 사람이 부지기수다. 아니 구글이나 파파고 같은 번역기를 동원해도 통ㆍ번역은 너끈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주 52시간제의 시행에 따라 밥 먹듯이 야근하던 관행도 사라졌다고 한다.

또한 지금은 수행원을 여럿 거느리고 다니거나 프로토콜을 중시하는 재벌총수도 없다고 한다. 그랬다가는 '갑질'한다고 인터넷 게시판이나 사회관계망(SNS)이 그를 비난하는 댓글로 도배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는 그 당시에는 이런 식으로 앞뒤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우리가 이만큼 잘 살 수 있게 되었다고 강변하는 심정이 되었다.

 

Note

2] Merrill Lynch & Co.는 미국 월가의 제일 큰 리테일 전문 증권회사였다. 그러나 2008년 서브 프라임 위기 당시 모기지 채권을 기초로한 파생상품 CDO(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 투자에서 엄청난 손실을 입고 말았다. 그 결과 2009년 뱅크 오브 어메리카에 인수되어 지금은 BofA Securities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때 월가의 다른 대형 금융회사들도 무사하진 못했다. CDO를 가장 많이 만들어 팔았던 Lehman Brothers는 서브프라임 멜트다운으로 아예 도산해 버렸고, CDO와 CRS (credit defaut swap)로 엮였던 AIG 보험회사는 정부의 구제금융으로 겨우 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