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한동일(韓東一)[1]은 해외파 연주자 첫 세대이다. 우리나라가 전쟁의 잿더미 속에 있을 때 도미(渡美)유학을 하고 줄리아드 스쿨에서 공부한 후 해외 콩쿠르에서 당당하게 우승을 차지했다. 1962년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에서 파블로 카잘스와 나란히 연주를 했다. 1960년대에 세계 27개국을 다니며 피아노 연주를 하고 1969년 28세로 인디애나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 당시 한국의 상황에서는 그가 미국에 유학을 간 것이나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세계순회 연주 다니는 게 모두 ‘대한늬우스’에 나올 정도였다. 음악에 소질있는 사람은 모두 뉴욕 줄리아드에 가는 줄 알았다.[2]
여자골프 박세리 선수가 미국 L{GA에서 우승한 후 한국에 수많은 ‘세리 키즈’가 생긴 것처럼 한동일 뉴스는 수많은 음악에 소질 있는 청소년들도 그처럼 비상하는 꿈을 꾸게 되었다.
물론 한동일의 천재성은 어렸을 적부터 두드러졌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의 성공에는 기막힌 비밀이 숨어 있다. 그것은 결정적인 시기마다 그를 돕는 사람이 나타나 그가 한 단계 도약(quantum jump)할 수 있도록 끌어주고 밀어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귀인(貴人)들이 성공의 문을 열어주었기에 음악의 천재성이 비로소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천재 피아니스트가 만난 귀인들
첫 번째 귀인은 그의 부친이었다.
한동일은 1941년 함흥에서 태어났다. 집에 피아노가 있는 상당히 유족한 집안이었으나 해방 후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피아노를 빼앗아가자 그의 부모는 월남(越南)을 결심했다.
서울에 거처를 마련한 피난민에게 피아노는 언감생심이었다. 그의 부친은 전차를 몇 번씩 갈아타고 종로3가 이화여대 김성복 교수한테 데리고 가서 피아노 레슨을 받게 했다. 그리고 여기서 연습, 저기서 연습을 시켰다.
두 번째 귀인은 생면부지의 미 공군 장성이었다.
한동일은 혜화동에 있는 미 5공군사령부 강당에 있는 피아노를 빌려서 매일 연습을 했다. 마침 이를 눈여겨본 어느 미군이 VIP를 위한 행사가 있는데 거기서 피아노 연주를 해주겠냐고 부탁했다.
그래서 1953년 가을 그는 멘델스존의 ‘론도 카프리치오소’(Rondo Capriccioso Op.14)를 연주했는데 앤더슨 사령관(Samuel E. Anderson, 1905~1982)이 박수를 치고 그를 격려해주며 부친에게는 자신이 스폰서가 되어줄 테니 미국으로 음악 유학을 보내라고 제안했다. 그리고 줄리아드 유학을 주선하는 한편 주한 미군부대 24곳을 돌며 피아노 공연을 해 4500달러나 되는 유학자금을 마련할 수 있게 했다.
마침내 1954년 6월 1일 배재중 1학년생이던 한동일은 여의도 비행장에서 앤더슨 장군의 귀국 비행기를 함께 타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출국 전에 명동 시공관에서 독주회를 갖기도 했다.
세 번째 귀인은 풀스칼라십을 받고 간 뉴욕 줄리아드 스쿨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동일은 줄리아드에서 1주일에 2시간씩 이론과 실기 공부를 했다, 지도교수는 로지나 레빈(Rosina Lhe´vinne, 1880-1976) 선생님이었다. 그는 선생님 집에 가서 피아노 레슨 지도를 받았다. 선생님은 어린 나이에 혼자 미국에 온 그를 친엄마처럼 보살펴 주었다.[3]
선생님 앞에서 처음 피아노를 칠 때 그는 한 음도 틀리지 않으려고 긴장했다. 그러자 레빈 선생님은 쇼팽의 곡을 기계처럼 연주하지 말고 음 하나하나를 사랑하듯이 치라고 말씀하셨다. 엄마가 아들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이듯 음악의 톤을 사랑하라고 웃으며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하나의 휴먼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것임을 명심하게 되었다. 줄리아드에서 아이작 펄먼과 동급생이었는데 성적은 줄곧 탁월하게 우수하다는 ‘EO’(Exceptionally Outstanding) 등급을 받았다.
승승장구의 이력
그때부터 한동일은 부모는 물론 이승만 대통령 부부를 비롯한 온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956. 4. 28 카네기홀 데뷔, 미 CBS 에드 셜리번 쇼에 출연
1958 뉴욕 필과 협연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연주, 극동 순회공연, 시민회관 귀국독주회
1962 케네디 대통령 초청으로 파블로 카잘스 등과 백악관에서 연주
1965 한국인 최초로 레벤트리트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 심사위원장인 번스타인이 ‘동양의 모차르트’라고 극찬
이후 名지휘자 버나드 아이팅크, 허버트 블롬슈테트, 데이비드 진먼 등과 협연을 하고, 쇼팽과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 10여장의 음반을 녹음
1969 28세로 인디애나 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일리노이 주립대, 노스텍사스 대학, 보스턴 대학 등에서 교수 생활을 하며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활약. 프랑스 부인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2001 울산대에 석좌교수로 오랜만에 한국 방문
도미 5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팀파니스트 부친과 함께 연주
2004. 6. 1 예술의 전당 음악당에서 한동일의 도미(渡美) 5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가 열렸다.[4]
조선일보 2004. 6. 3자 7면에 특별한 기사가 실렸다. 한동일과 아버지 한인환의 특별한 연주회 기사였다. 당시 보스턴대학 교수던 아들은 62세, 아버지는 91세였다.
피아니스트 한동일(62)이 서울시교향악단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일명 ‘황제’)을 협연하면서 바라본 것은 지휘자의 비트(지시)만이 아니었다. 그는 지휘자 너머, 단원석 맨 뒷줄, 홀로 서서 팀파니를 치는 아버지에게 연신 눈길을 주었다. 까만 나비 넥타이를 맨 아버지 한인환(91)씨는 팀파니 채를 힘차게 내리치며 아들의 연주를 기둥처럼 받쳤다. 이윽고 연주가 끝나고 한동일은 아이처럼 아버지를 향해 달려갔다. 아버지도 성큼 내달아 아들을 포옹했다. 관객은 일제히 기립박수로 벅찬 감격을 함께 했다.
2005~2007 한동일은 울산대 음대 학장을 지냈고 이후 순천대 석좌교수로 4년을 가르쳤다. 또 일본 히로시마에 있는 엘리자베스 음대에서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2019 영구 귀국하여 한국 국적을 다시 취득했다.
Note
1] '한동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또 한 분의 유명인사가 있다. 한자 하나만 다를 뿐이다. 가톨릭 사제에서 환속한, 바티칸 대법원(로타 로마나) 변호사인 한동일(韓東日) 교수이다. 그는 그는 광주가톨릭대학교와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2000년 천주교 부산교구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후 이탈리아 로마 교황청립 라테라노 대학교에 유학해 교회법을 전공한 뒤, 동아시아 최초로 바티칸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2010년부터 학기 중에는 국내 대학교에서 라틴어, 로마법 등을 강의하고 방학 기간 중에는 로타 로마나로부터 의뢰받는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2] 한동일이 도미한 지 10년 후 서울에서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벌 세노프스키(Berl Senofsky, 1926-2002)의 연주회가 열렸다. 그날 낮 임원식의 소개로 피버디 음대 교수인 세노프스키는 서울음대 1학년 재학 중인 강효의 바흐 연주를 듣고 미국에서 공부를 하라고 권했다. 아니 자기가 나서서 미국 대사관과 문교부, 외무부 등으로 다니며 유학 수속을 밟았다. 어찌나 열심히 뛰어다녔던지 피로에 지친 나머지 그날 저녁 시민회관 연주회에서는 베토벤 협주곡의 카덴짜를 브람스 것으로 잘못 연주하기도 했다. 세노프시키 교수는 강효를 피버디 음대로 데려가기 전에 줄리아드의 도로시 딜레이 교수에게 그를 맡겼다. 결국 강효는 줄리아드에서 계속 공부를 하고 1985년에는 줄리아드에서 동양인 최초이자 최연소 교수가 되었다. 나중에는 예일대로 옮겨 두 곳 통틀어 1천 명이 넘는 제자를 배출했다. 강효 교수의 문하에서 길 샤함, 사라장, 김지연 같은 제자가 나왔다. 용재오닐에게 '勇材'라는 한국 이름을 붙여준 것도 그의 부인이었다. 그는 8개국 제자들로 구성된 세종 솔로이스츠를 창단했고, 대관령 음악제의 산파역을 맡았다. 중앙일보, [j Speicial] "줄리아드 첫 동양인 교수 강효, 25년 스승의 길을 말하다, 2010.12.25.
3] 한동일은 줄리아드 시절의 은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로지나 레빈 선생님은 제게 엄마 같은 분이셨어요. 뉴욕 필이 주최하는 ‘영 피플 콘테스트’에 선발되면 영화관에 데려다 주신댔는데 정말 뽑히니까 시네라마(Cinerama)라는 특별한 영화관에 데려가 주셨어요.
그분에게 처음 레슨 받을 때가 잊히지 않아요. 저는 조금도 안 틀리게, 그저 완벽하게 치려고 했어요. 쇼팽 곡인데 아주 엄격하게 쳤어요. 그러자 선생님은 다정하게 ‘음 하나하나를 사랑하라’고 하셨어요. 또 ‘피아노를, 음악을 만든다는 것은 휴먼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라 하셨죠.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동안 저는 완벽한 기계가 되기를 원했거든요. 음악은 그게 아니었죠. 음악을 사랑하는 것은 테크닉을 잘하는 게 아니었어요. 피아노는 가슴 뭉클하게 만들고 서로 마음이 통해야 하거든요."
4] 김태완, 피아니스트 한동일의 귀향 "人生은 긴 나그네 여행… 음악은 휴먼 스토리", 월간조선, 20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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