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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트 1] 옴니쇼럼과 No Way Out

Onepark 2021. 12. 1. 08:10

I. 프롤로그

 

점심을 먹고 TV를 보던 K는 그렇고 그런 내용을 되풀이하는 종편의 시사토론에 짜증이 났다.

종편 시사 프로를 이리저리 순방하는 K에게는 늘 보는 얼굴들이었다. 종편 채널을 옮겨가며 등장하여 같은 말을 순서와 어조만 바꿔 말하는 자칭 '시사평론가'들에게 식상한 터였다. 하지만 내년 대선을 앞두고 큰 파란 없이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지도자가 선출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점심 먹은 게 소화가 덜 된 듯하여 낮잠을 자는 것을 조금 미뤘다. K는 거실 소파에 앉아 습관처럼 TV 리모컨을 들고 '변 사또 기생점고'하듯이 채널을 돌렸다. 언제부터인가 가정 집에서도 TV 채널 수가 100개가 넘어서 선택의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아직은 좀 멀었지만 TV를 신형으로 바꿀 때 주인의 취향에 맞게 채널을 찾아서 대령해주는 알고리즘을 장착한 것을 골라야지 하고 마음 먹었다.

 

옛날 드라마를 재탕해주는 채널을 지나, 스포츠 채널은 건너뛰고 영화 채널로 들어갔다. 영화 프로는 VOD로도 볼 수 있으니 그 선택지는 무한대로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고전극, 서부극, 사극, 스릴러를 차례로 순방할 때였다. 하얀 장교복을 입은 아주 젊은 케빈 코스트너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저게 언젯적 영화야? 케빈 코스트너가 군복을 입고 찍은 또 다른 영화 <늑대와 함께 춤을>(1990) 보고 감동을 먹은 적이 있기에 '채널 고정' 모드로 들어갔다.

영화 제목을 보니 <노 웨이 아웃>(1987)이었다. 이 친구 뭔가 외통수로 걸린 모양이군. 주인공이 '세계의 수도' 워싱턴DC에서 근무하는 하얀 제복의 무관이니 미모의 여성이 나오는 파티 장면은 빼놓을 수 없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화면에 워싱턴DC의 비즈니스 호텔인 옴니쇼럼(Omni Shoreham) 호텔 입구가 나오는 것이었다. K는 마치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올라 숨조차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 진 해크먼은 미 국방장관. 케빈 코스트너는 파티장에서 만난 장관의 정부와 사랑에 빠진다.

 

II. 옴니쇼럼 컨퍼런스

 

1992년 새해가 밝자마자 회사의 국제금융 파트 직원 모두 금년도 해외 자금조달 계획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해외 자금 파이프 라인이었던 일본계 은행들이 자기자본비율(BIS ratio)을 채우기 위해 국제금융시장에서 물러서면서 전세계적으로 크레딧 크런치(credit crunch) 현상이 우려되고 있었다. 최근 들어 한국의 은행과 금융회사를 대하는 일본 은행사람들의 태도 역시 전과 같이 곱지 않았다. 금리를 높이자거나 심지어는 전체 금액을 깎자고 나오는 형편이었다.

 

1월 초 어느 날 임원실에 다녀온 L 부장이 M 차장과 함께 K를 불렀다.

“회장님의 옴니쇼럼 컨퍼런스 연설문을 써줘야겠어. 강연식으로 쓰는데 테마는 '한국 경제의 발전과 우리 회사의 역할'이라고 할까, 우리 금융회사가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이러저러한 일을 많이 하고 있으니 미국 자본시장에서 펀드 레이징을 할 때 잘 협조해달라는 내용이야.”

일단 ‘한번 해보겠습니다’ 하고 부장실을 나왔으나 다른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터라 걱정이 앞섰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아는 K의 직속상사인 M 차장이 자신이 직접 하겠다고 말했다. M 차장이야말로 미국에서 MBA 학위를 받고 돌아온 회사 내에서 박식함을 자랑하는 실력파였으므로 K는 M 차장이 부탁하는 자료만 챙겨주고 손을 떼기로 했다.

 

일 주일 쯤 지난 뒤 M 차장이 원고를 완성하여 직접 부장실로 들고 가는 눈치였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L 부장이 M 차장과 K를 불렀다.

“이것은 핀트가 좀 어긋난 것 같은데. 회장님 연설 대상은 미국 기관투자가들과 유수 인베스트먼트 뱅커들이야. 한국의 자본시장 개방이 초점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발전과정과 그 자금을 공급해온 금융회사의 역할이므로 리서치 파트에서 비슷한 내용의 리포트가 있는지 알아보고 다시 새로 써봐.”

이번에도 M 차장이 다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K는 이런 작업을 한두 번 해본 게 아니었므로 일말의 불안감이 앞섰다. 그러나 1991년도 국외점포 영업실적분석, 1992년도 국외점포장 회의자료 준비 관계로 K로서는 코가 석자나 빠져 있는 상황이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며칠 후의 정기 인사에서 M 차장이 해외로 발령이 나고 조달반의 해외 본드 발행도 성공적으로 끝났으므로 회장의 강연 원고는 자연스럽게 M 차장으로부터 조달반의 N 과장한테 넘어가게 되었다.

N 과장 라인에서는 팀원들이 저녁 늦은 시간까지 남아 영역(英譯)을 하고 한쪽에서는 타이핑을 하고 교정 보고 야단이었다. 이미 다른 사무실로 옮긴 M 차장이 가끔 찾아와 추진상황을 물어볼 때마다 N 과장은 볼멘 소리로 아직 부장 선에서 이리저리 고치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III. 롤러 코스터

 

2월 초, 입춘과 한 날로 겹친 설 연휴도 지나고 국외점포장 전략회의도 무사히 끝났다. 그리고 K도 모처럼 한 숨 돌리고 있었다.

2월 18일 화요일, K는 그동안 국외점포장 회의 준비하느라 야근을 밥 먹듯 하였기에 오늘은 일찍 귀가하여 모처럼 아이들과 함께 놀 수 있겠다 싶어 마음이 무척 한가로웠다. 책상을 정리하고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중역실에 다녀오던 L 부장이 K를 손짓하며 불렀다.

“일이 생겼어. 회장님이 연설문 원고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퇴짜를 놓았는데, 여기 리서치 파트에서 올린 강연 원고를 참고로 하여 새로 한번 써보도록 하지.”

이 일의 진행상황을 볼 때 더 이상 누구도 회장과 부장의 요구사항을 맞추기 어렵게 되었다. 더욱이 옴니쇼럼 컨퍼런스 일정이 코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L 부장은 회장이 일본 도쿄에서 행할 강연 원고를 K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은 리서치 파트에서 이미 작성해 올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강연 원고는 한국산업의 고도화 전략에 관한 것이었으므로 그대로 인용하기는 어려웠다.

“회장님이 내일 아침 일찍 수정된 원고를 다시 보자 하시므로 밤을 세워서라도 한번 써봅시다.”

걱정스런 어조의 부장 말씀에 K 역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거 정말 Now Way Out이군. 그러나 자판기에서 커피 나오듯 단추 누른다고 글이 술술 나오나?’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다른 야근하는 직원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할 때에도 전혀 밥맛이 없었다.

그러나 K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기억과 함께 이 일도 잘 해낼 수 있다는 각오와 다짐을 하게 되었다.

6년 전 GOC[1]팀에서 다음날 아침까지 외빈으로 축사를 하러 오는 감독기관장의 강연원고를 만들어야 한다며 SOS를 청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K는 다른 부서에 가 있었음에도 오죽하면 그에게까지 손을 빌리자 할까 생각하고 기꺼이 약속시간 내에 완성해준 일이 있었다. 또 한 번은 9년 전 회사의 다큐멘타리를 만들면서 회사의 비전과 미래상을 집필할 사람이 마땅치 않다고 K에게 부탁이 왔는데 그때에도 큰 무리 없이 일을 마쳤던 것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렇지만 원고를 쓰기 전에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 저에게 지혜를 허락하소서. 저는 메마른 가지 잎사귀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튼튼한 포도나무에 저를 붙들어 매어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싱그러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지금의 짧은 시간 안에 만족할 만한 글이 써지도록 제 오른 팔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이 저의 재능을 필요로 하실 때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재목으로 삼아 주시옵소서.”

 

기도의 위력이었다고 할까, 아무튼 2시간 반 만에 원고를 완성하고 그때까지 남아서 기다리던 L 부장한테 원고를 보여드릴 수 있었다.

L 부장이 요구하는 대로 몇 줄 고치고 나니 시간은 이미 자정을 훨씬 넘어 있었다. 프린터로 깔끔하게 인쇄까지 마치고 L 부장이 회장에게 드릴 한 세트를 더 만들어 놓고 사무실을 나서니 이미 1시 반이 되어 있었다.

그 시간에는 심야에 택시 잡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한동안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었는데 가까스로 탈출로를 찾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밤길을 걸으며 K는 ‘덕분에 오늘밤은 정월 대보름 달을 실컷 보는구나’ 실소를 금치 못했다.

 

To be continued . . .

 

* 첩첩산중에서도 아침 해는 떠오른다. 출처: 생태사진여행 밴드 가을느낌(마이산)

Note

1] GOC (Guest Observer Course)란 해외점포에서 근무하는 현지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연수 프로그램을 말한다. 근무성적이 좋은 현지인들에게 소속감을 고취하고 금융회사의 기능과 업무에 대해 교육시키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IMF 위기 이후 해외점포의 축소와 함께 이 프로그램도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