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 People

People

[단시] 짧은 시 하이쿠로 바라본 세상

Onepark 2019. 3. 5. 17:35

봄이 왔건만
희뿌연 미세먼지
숨이 막히네

Spring has come.
Catastrophic fine dust has choked
Everybody’s welcome mind.

쌀쌀한 바람
설중(雪中) 복수초
향기는 이미 봄철

Despite freezing wind
Yellow flowers bloom
Foretelling fragrance in Spring.

 

나에겐 취미가 하나 있다. 영어로 17음절의 하이쿠(English Haiku)를 짓는 것이다.

영어 하이쿠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경희대 IBT 홈페이지와 블로그에서도 소개한 바 있거니와 요즘은 두뇌건강과 치매예방을 위해 주 1편 이상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연일 미세먼지가 '아주 나쁨' 기록을 갈아치우던 날 연구실을 치우면서 발견했던, 오래 전의 신동아 잡지(2000년 6월호)기사[1]를 다시 읽어보았다.

*  *  *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인 일본의 정형시 하이쿠 (俳句)는 5-7-5의 운율을 지닌 삼행시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늘날에는 일본과 구미에서 널리 창작되고 회자되고 있다. 서구에서는 1910년대 에즈라 파운드를 중심으로 한 이미지즘 운동이 일어났을 때 소개되어 지금은 가장 세계화된 일본의 정신유산으로 자리잡았다.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 류시화 시인이 "한 줄도 너무 길다"라는 하이쿠 번역시집을 내서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일본의 대중문화에 대한 우려와 마찬가지로 왜색 정서의 침투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은 실정이다.

 

* 교토의 금각사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하이쿠는 바쇼가 노래한 다음의 짧은 동영상 같은 시이다.

 

   오래된 연못 / 개구리 뛰어드니 / 물소리 퐁당!

   ふるいけや / かわずとびこむ / みずのおと

 

이와 함께 오니쓰라(椎本才麿)의 하이쿠도 그에 못지 않다.

 

   대야의 목물 / 버릴 곳이 없구나 / 풀벌레 소리

   ぎょうずいの / すてどころなき / 虫の聲

 

이 두 편의 시를 가지고 하이쿠의 특색을 알아보자.

첫째, 개구리, 풀벌레 같은 계절을 나타내는 말(季語)이 들어가야 한다.

둘째, 암시적인 표현기법이 쓰여야 한다. 개구리가 연못에 뛰어드는 물소리로 정적의 세계가 잠깐 깨졌다가 다시 정적으로 돌아가는 정경, 풀벌레 소리를 멈추게 할 수 없어 대야 물을 못 버리는 모습이 그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은연중 해학이 드러나 읽는 이가 슬며시 웃음을 짓게 만들면 최상의 하이쿠다.

 

이와 같이 하이쿠는 짧막한 17음절 전후의 3행시에 많은 것을 함축한 채 엉뚱한 힌트만 제시해 놓고 나머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는 점에서 선시(禪詩)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일본에는 하이쿠와 같은 5-7-5 17음절의 정형시 센류(川柳)도 있다. 센류(川柳)는 하이쿠와는 달리 계절을 나타내는 키코(季語)나 키레(切れ), 고문(古文) 어휘를 사용하지 않고, 가벼우면서 재치있는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이성복 시인은 하이쿠적 감동을 "일본도로 단칼에 내려쳤을 때 일순 잘린 단면에 아무 것도 안 보이다가 잠시 후 피가 뚝뚝 흐르는" 것을 보는 느낌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 아오모리 리조트의 눈덮인 호수

 

하이쿠가 오늘날 일본의 국민시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세 명의 위대한 아이쿠 시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쇼(松尾芭蕉 1644~1694)와 부손(与謝蕪村 1716~1783), 잇사(小林一茶 1763~1827)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하이쿠라는 상 위에 여러가지 음식을 올려 놓을 수 있는 장을 마련해 놓았다.

 

방랑시인 바쇼는 하이쿠에 자연과 인생의 의미를 부여한 구도자였다.

본래 모란꽃을 즐겨 그린 화가 부손은 하이쿠에 화려한 색감과 낭만을 주입했다.

서민적인 잇사는 흙냄새 물씬나는 토속적인 시를 읊어 하이쿠가 민중시로 거듭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잇사는 무척 가난했지만 반골정신과 너털웃음을 지닌 지극히 인간적인 시인이었다고 한다.

 

세 시인이 죽음에 임하여 남긴 시도 각자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 바쇼 : 방랑에 병들어 / 꿈은 마른 들판을 / 헤매고 돈다

- 부손 : 흰 매화향에 / 하얗게 날이 새는 / 밤이 오누나

- 잇사 : 이 대야에서 / 저 대야로 옮겨가는 / 요지경 인생

 

 

일본의 정형시 하이쿠가 왜 지금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는가?

하이쿠에는 그 짧막함 속에 우리 현대인들의 속성과 반대되는 여유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스피드보다는 세월의 연륜을, 풍부함보다는 여백을, 논리보다 비논리를, 명확한 것보다 감춰진 매력을, 극적인 것보다 일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보빌딩에 걸려 있는 짧막한 시들이 은연중 일본의 하이쿠에도 친밀감을 갖게 해준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또 하나 하이쿠에서 배워야 할 것은 일본인들이 하이쿠를 오늘날까지 사랑함으로써 일본어를 갈고 닦아온 점이다. 사실 하이쿠는 다작하는 가운데 수작이 생겨나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유명한 하이쿠 작가들의 작품도 수만 점 중에서 가려낸 수작들이 전해지고 있다.

 

일본 문학과 하이쿠를 연구하면 할수록, 우리 고유의 리듬과 아름다움을 지닌 시조(時調)에 눈을 돌리게 된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 ."

하이쿠에서는 우리 시조에서 만나는 인생의 달관과 너그러움에서 오는 흥(興)겨운 정서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시조의 형식 안에 신세대의 감수성을 담은 작품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는 것이다.

 

  필자가 17음절로 다듬어 개인 블로그에 올린 국ㆍ영문 단시(短詩, haiku)의 전체 목록은 이곳을 클릭

 

 

마침 전 직장선배였던 정봉렬 시인이 시집을 펴냈다는 소식이 들렸다. 가족과 떨어져 마산에 홀로 내려가 지방은행의 임원을 하는 동안 지은 시와 시조를 모아 아담한 책자[2]로 만들어 보내왔다.

그 중의 "인생사(人生事)"[3]라는 시 속에는 짤막한 하이쿠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페이쏘스(pathos)가 깃들어 있었다. 그 아래는 이 시를 필자가 영어로 옮긴 것이다.

 

생각이 많다 보니
할 말을 잊고 사네
아무 생각 아니해도
세월은 빨리 가네
추웠다 더웠다 하는 인생사
가슴 이슬 맺히네

Too much thinking has left less words.
Now time flies with no thought at all.
Ups and downs of life make
Teardrops in my heart.

Note

1] 유옥희 (계명대 일어일문학 교수), "하이쿠 감상법: 17자의 촌철살인, 자연ㆍ해학ㆍ고독의 노래", 월간 신동아, 2000.6, 535~545면 참조.

2] 정봉렬, 「다 부르지 못한 노래」, 세창미디어, 2019.1.

 

3] 젊어서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았던 다산 정약용도 유배지에서 세월을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혼자 웃는 이유(獨笑)"를 밝힌 바 있다. 원문과 영역은 KoreanLII에 '영고성쇠'란 뜻의 'Vicissitudes' 항목 참조.

 

양식 넉넉한 집엔 먹을 사람 없는데
자식 많은 집에서는 굶주림을 걱정하네
영달한 벼슬아치는 어리석기만 한데
재주 있는 사람은 기회조차 얻지 못하네
복을 두루 갖춘 집 드물고
지극한 도는 늘 펼쳐지지 못하네
아비가 아낀다 해도 자식이 늘 헛되이 쓰고
처가 지혜로운가 싶으면 남편이 꼭 어리석네
달이 차도 구름이 가리우기 일쑤고
꽃이 피어도 바람이 떨구네
세상만사 이렇지 않은 게 없으니
혼자 웃는 그 뜻을 아는 이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