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문 친구가 학교 동창들 단체 카톡방에 "오늘의 시"를 올렸다. 얼리버드 회원이 글을 올리면 그와 관련이 있는 기존 포스팅 기사를 다른 회원들도 함께 읽어볼 수 있게 그가 운영하는 네이버 블로그의 주소를 링크시켜 놓는 식이다.
얼마나 부지런한지 2006년 11월부터 "한사람 시와 마음"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 동안 포스팅한 항목이 무려 7천개가 넘는다. 1일 방문자가 1천 명이 넘는 날이 많고 15주년이 되는 지난 11월 말에는 누적 방문자 수가 드디어 1백만을 돌파했다고 한다.
12월 10일 그가 링크시켜 놓은 네이버 블로그의 표지사진은 빨갛고 노란 채송화꽃, 목필균 시인의 "송년회"였다.
그의 고정독자인 나로서는 스무 고개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곤 한다. 짧으면 다섯 고개 이내로 끝나지만, 어떤 때는 되돌이를 거듭하여 스무 고개가 넘도록 결론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복불복'이라 할까, 아니면 '취향의 차이'라고나 할까.
1. 시인은 내가 운영하는 온라인 영문 한국법률문화 백과사전 KoreanLII에 이미 소개한 적이 있는가?[1]
2. 이 시인의 대표작은 무엇인가?
3. 그의 시를 이미 누가 영어로 번역해 놓은 게 있는가?
4. 웹사이트(예: 서강대 안선재 명예교수, 고 송재평 교수 등[2])에 실려 있는가, 아니면 구글로 검색할 수 있는가?
5. 동영상의 자막으로 YouTube에 올려져 있는가?
6. 이미 번역된 시가 있으면 그 퀄리티는 어느 정도인가? 저작권 문제는 없겠는가?
7. 새로 또는 처음 번역함에 있어서 어려운 점(한국 고유의 정서, 문물, 의성어ㆍ의태어 등)은 없는가?
8. 시인의 다른 작품 중에 KoreanLII에 조만간(말 그대로 sooner or later) 소개할 만한 시가 있는가? 다시 말해서 법 개념(legal concept or legal implication)과 직ㆍ간접으로 관련이 있는가?
9. 그 시를 영어로 번역하면 외국인들도 원시의 의미나 내용, 적어도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10. 영어로 번역된 시가 단서가 되어 다른 한국시에도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 그와 관련이 있거나 비교할 만한 외국의 시가 있는가?[3]
※ 이 블로그에서 이미 영역해 놓은 우리 시에는 무엇무엇이 있는가? 다음 블로그 항목 참조.
위의 문항에 모두 포지티브한 답이 나오면, 특히 만족할 만한 영문 번역을 찾을 수 없으면 그 다음은 내가 며칠이 걸리더라도 공 들여 직접 번역을 해야 한다.[4]
관련이 있는 KoreanLII의 법률항목을 찾을 수 있으면 당장 올리되, 그렇지 않으면 마땅한 항목이 나타날 때까지 웨이팅 리스트에 올려놓고 기다리도록 한다.
12월 10일에 "한사람 시와 마음"에 게재된 목필균(호는 潤疇, 1954~ )의 시 중에서는 때가 때인 만큼 "송년회", "먼 길",[5] "내리막길 따라", "나팔꽃", "채송화 그녀"가 내 마음에 와 닿았다. 나와 연배가 비슷한 데다 교직에 몸담아 경험치가 비슷한 듯 싶었고, 또한 여성으로서의 섬세한 감수성이 많은 여운을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KoreanLII와 관련하여 "먼 길" → Travelogue는 직관적으로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채송화 그녀" → Fortune-telling에 연결시키는 것은 "밝고 명랑한 소녀 같은 여자가 왜 팔자가 그리 사나울까?"하는 생각이 앞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잡초처럼 땅에 깔리듯 자랄지라도 여름철에 아주 밝은 원색의 꽃을 피우는 채송화를 보고 지아비를 여읜 '그녀'가 운명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불행을 극복하기를 바라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졌다. 또 "송년회"는 오래 전에 번역ㆍ소개했던 신달자 시인의 "저 거리의 암자"와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져서 KoreanLII의 Meditation 항목에서 나란히 비교해보기로 했다.
먼 길 - 목필균
Distant Road by Mok Pil-gyun
먼 길 끝에 서 있는
그 사람
He who stands at
the end of a distant road:
길 따라 오르내리며
가슴 터질 듯 폐활량을 높여도
다다를 수 없는 그 곳
It’s the place he can’t reach
ups and downs on foot
tho’ maximizing his lung capacity.
방향 없는 마음만 여러 갈래
그리움의 저편
가다가 지쳐 날은 저물고
His mind is divided with no direction
at the other side of yearning.
He has got tired when night falls.
채송화꽃 그녀 - 목필균
She is Rose Moss
애끓는 사랑은
단칸방 신접살이도
달콤했었지만
Passionate love
was sweet enough
even in a humble honeymoon one room.
살다보면 사랑은
세월에 무디어지고
애증으로 엉킨 정도
세월만큼 익어갔는데
As time goes by,
such burning love gradually cool down.
Love and hate-mixed relations
will become ripe.
노랑꽃 속에
빨간 꽃 속에
키 낮은 잎새 속에
여문 까만 씨앗이
눈물겹도록 작은데
Amidst yellow flowers
and red flowers
with pointed scrubby leaves,
small black seeds seem to be
touching to behold.
어느 날 문득
폐암말기라는 지아비
사십도 못되어 떠나간다는데
모두들 흘러갈 그 길로
떠나간다는데
One day all of a sudden,
her husband was diagnosed with
late-stage lung cancer at the age of forty.
He is doomed to pass away
so earlier than average.
먼지같이 작은 씨알이
흩어져 흔적도 없이
그렇게 미운 정까지
털어내며
Small seeds like a dust
will be scattered and disappear.
Such affection from hatred
will be brushed off.
헤어짐도 아름답게
미소로 보내야 하는데
Departure is scheduled for
a beautiful ritual with smiles.
아깝다아깝다아깝다
엎드려 속울음 삼키는
그녀는 어찌할까
SorrySorrySorry.
What shall she do
with tears hidden in her heart?
송년회 – 목필균
Year-end Party
후미진 골목 두 번 꺾어들면
허름한 돈암곱창집
지글대며 볶아지던 곱창에
넌 소주잔 기울이고
난 웃어주고
가끔 그렇게 안부를 묻던 우리
In an obscure alley bent twice from the road,
there is a humble restaurant called Donam Gopchangjip
where beef tripe barbecue is appetizingly served.
While you drank soju,
I used to respond with smile.
That was the way we say hello each other.
올해 기억 속에
너와 만남이 있었는지
말로는 잊지 않았다 하면서도
우린 잊고 있었나 보다
나라님도 어렵다는 살림살이
너무 힘겨워 잊었나 보다
This year I couldn't remember
if I met with you
even though I was thinking of you,
Sorry to say you remained in oblivion.
It's because we had difficulties in
making both ends meet all the year round.
12월 허리에 서서
무심했던 내가
무심했던 너를
손짓하며 부른다
In the middle of December,
It's me absent-minded
who is beckoning with the hand
another absent-minded person like you.
둘이서
지폐 한 장이면 족한
그 집에서 일년 치 만남을
단번에 하자고
We had better sit together
at Donam Gopchangjip
to talk, eat and drink as much
as for one year, worth of a single bank note.
KoreanLII에 마땅한 항목이 없으면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고민을 해야 한다. 예컨대 지난 주에 번역을 마친 복효근의 "명편(名篇)",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누가 바람을 보았나요?", 서홍관 원장의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세 편의 시는 되풀이해서 읽을 수록 알레고리(allegory)가 재미있었다. 이를테면 채석장 암벽의 연인 표시,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 은행잎 프레임 속의 까까머리 사진 등의 비유는 시 전편이 하나의 알레고리[6]였다. 그 가운데 사랑의 서약, 우리 삶의 바람 같은 존재인 어머니, 그리고 청춘의 추억 같은 '사람이 살아온 길'이라는 하나의 주제가 떠올랐다. 비록 주관적이긴 하지만 왜 그러한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밝힌 후 함께 올리기로 했다.[7]
12월 들어 코비드19 확진자가 7천명 대로 폭증하자 정부는 12월 16일 단계적 일상회복(위드코로나)을 중단하고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를 다시 강화했다.
모처럼 송년회를 계획하던 사람들은 모임 약속을 취소하기 바빴다.
김상문 친구가 몇 달 전에 보내주었던 기형도(1960~1989) 시인의 "빈집"이 생각났다. 역시 이 시를 번역할 때 시인이 잃어버린 것이 '사랑'만이 아니라 '세월'도 있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던 짧았던 밤, 겨울 안개, 촛불, 흰종이가 있었다. 이것들이 모두 내 것이 아닌 열망(熱望, passion)이었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춥고 무서운 한겨울의 빈집'에 갇혀버린 것 같았다.
빈집 - 기형도
Empty House by Ki Hyongdo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After I‘ve lost love, I write.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Adieu to those short-lasting nights,
To winter mist lingering around the window, and
Candlelights with little knowledge, I have to say good-bye.
White papers were waiting for fear,
Tear drops replaced hesitation,
Adieu to the passions which no longer belong to me.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Now like the blind, I grope to shut the door.
Oh, my poor love is confined in an empty home.
Note
1] 온라인 법률백과사전에 시를 번역해서 함께 올리는 이유와 목적은 KoreanLII 10주년을 맞아 법률신문에 실린 인터뷰 기사 참조.
2] 인터넷에서 영어로 번역된 우리 시를 찾아볼 수 있는 사이트는 다음과 같다.
* 서강대 영문학과 안선재 명예교수의 강의자료 : Korean poems translated by Brother Anthony of Taize.
* 고 송재평 교수의 한국시선 : Chae-Pyong Song and Anne Rashid
* Left/Write Lit 한국의 대표시인 70인 : Representative Korean poets and their most famous poem.
* KoreanLII에 수록되어 있는 국내외 시인과 시의 전체 목록은 Poet 참조.
3] 필자는 이 블로그를 통해서 또는 KoreanLII의 법률 항목과 관련 있는 한국의 아름다운 시를 소개함으로써 그 데이터가 집적됨에 따라 한국의 시가 글로벌한 시각에서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음을 실증하고자 한다.
이를테면 영국의 식민지에서 갓 독립한 미국에서는 1811년 17세에 불과한 윌리엄 브라이언트(William Cullen Bryant, 1794~1878)가 "죽음에 관하여(Thanatopsis)"라는 장편의 시를 발표하여 출판사 편집자를 놀라게 만들었다. 영국의 퍼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 1792~1822)는 사생활 문제로 이태리에 체류 중이던 1818년 26살 때 "서풍부(Ode to the West Wind)"를 발표했다.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았다"는 시 구절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무렵 프랑스에서는 시간이 덧없이 흘러감을 슬퍼하며 "사랑하라, 사랑하라! 사람에겐 머물 항구가 없고 시간에겐 당도할 기슭이 없다"는 낭만주의 시가 큰 인기를 끌었다. 1820년 프랑스의 알퐁스 라마르틴(Alphonse de Lamartine, 1790~1869)은 그가 26살 때 알프스 산록의 엑스-레-방에 있는 부르제 호반에서 만났던 연상의 여인이 그 이듬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을 알고 비탄에 잠겨 “호수(Le Lac)”를 발표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100년 후 한국의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은 평양의 연등제를 보다가 세상을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며 슬픔을 극복하고 생의 의욕을 되찾는다는 한국 최초의 근대 자유시 "불놀이(Fireworks)"를 선보였다. 이들은 모두 약관(弱冠)의 시인으로서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발표했을 뿐더러 또 다른 공통점은 네 시인 모두 ‘죽음’에 대해 아주 장중하게 묘사했다는 것이다.
4] 최근 AI번역기의 번역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다. 특히 DeepL이 국내 소개된 뒤에는 그 번역 결과물을 여러 모로 테스트해보고 2023년 3월부터는 KoreanLII의 번역 담당 동역자로 삼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 시의 번역에 있어서는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다. 필자가 경험한 사례는 이 곳 참조.
5] 김상문 친구가 소개한 시 "먼 길"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과정에서 KoreanLII에 올리기에 적합한 동명의 시가 있기에 그것을 골라서 번역한 것이다. 처음 시는 '매복된 아픔', '옹이진 상처', '녹록지 않는 세상살이' 같이 그에 해당하는 영어가 쉽게 떠오르지 않아 번역이 썩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새로 발견한 시에서는 '그리움 저편 여러 갈래의 길', '갈 길은 멀고 날은 저물고'(일모도원/日暮途遠)라는 내용이 있어서 일반 사람뿐만 아니라 법률을 다루는 사람들도 공감하는 바가 적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먼 길 - 목필균
내가 갈 길
이리 멀 줄 몰랐네
길마다 매복된 아픔이 있어
옹이진 상처로도 가야 할 길
가는 길이 어떨지는
물을 수도 없고, 답하지도 않는
녹록지 않는 세상살이
누구나 아득히 먼 길 가네
낯설게 만나는 풍경들
큰 길 벗어나 오솔길도 걷고
물길이 있어 다리 건너고
먼 길 가네 누구라도 먼 길 가네
때로는 낯설게 만나서
때로는 잡았던 손 놓고
눈물 흘리네
그리워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미소짓기도 하며
그렇게 간다네
누구라도 먼 길 가네
돌아설 수 없는 길 가네
6] 알레고리(allegory)란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총체적인 은유법으로 관철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은유법(metaphor)이 하나의 단어나 문장과 같은 작은 단위에서 구사되는 비유법인 것과 차이가 있으며, 상징(symbol)에 비해서도 더 일관성이 있다. 예컨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돼지가 러시아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정치인을 가리키는 것처럼 문학에서는 작가나 시인이 검열이나 비판, 보복을 피하고 간접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 위해 알레고리의 방법을 많이 사용했다. 에드가 V. 로버츠 지음, 강자모 외 옮김, 《영문학의 이해와 글쓰기》, 한울아카데미, 2019, 183쪽.
7] 이러한 작업의 결과물로서 KoreanLII에 Lifepath라는 항목을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독자들과 공감할 수 있는 설명을 곁들여 세 편을 나란히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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