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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주요한의 '불놀이'와 평양 연등회 축제

Onepark 2020. 11. 23. 08:58

은퇴 후 내 나름대로 잘할 수 있는 일로 우리의 아름다운 시를 영어로 옮기는 것을 실천하고 있다. 본래 온라인 법률백과사전인 KoreanLII에 딱딱한 법률 콘텐츠가 아닌, 외국인들이 K-Pop 영향으로 관심을 갖게 된 시와 노래도 함께 소개해보자는 취지였다.[1] 그래서 KoreanLII의 Friendship 항목에도 올렸던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많은 사람이 찾아 보는 등 기대 이상의 반응을 얻은 것에 자극 받아 후속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견지에서 앞서 소개한 '지란지교' 같은 산문시(散文詩)의 원조에 해당하는 주요한의 '불놀이' 영역작업에 착수했다.[2] 그런데 불과 100년 전 우리나라 자유시(自由詩)의 효시가 된 작품이었던지라 놀라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 영국화가 Elizabeth Keith가 1920년 경에 그린 평양 대동강변

우선 1919년 2월 3.1운동 직전 이 시를 문학동인지 [창조]에 발표한 주요한(朱耀翰, 1900 ~1979)이 만 18세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이와 같이 진중한 시를 썼다는 점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3] 처음으로 자유시(modern free verse)를 쓴 것이므로 쉼표로 구분하였으나 되풀이해서 읽을 수록 전통적인 운율이 살아 났다.

 

당시 한글 맞춤법이 정립되기 전이므로 그림자를 기름자라고 하는 등 어색한 표기가 적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1910년대 평양 시내에서 4월 초파일 연등 행사를 어떻게 벌였는지도 궁금했다.[4] 왜냐하면 제목인 '불노리'를 직접 불을 가지고 노는 'Playing with Fire'로 할 것이냐, 아니면 남이 하는 불꽃놀이를 구경만 하는 'Fireworks'로 할 것이냐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답도 시 속에 들어 있었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자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바로 부처님 탄신일인 음력 4월 초파일에 이땅의 중생들을 부처님의 지혜로 밝혀달라고 기원하는 연등회(燃燈會)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사찰은 물론 곳곳에 연등을 달고 불교신자들은 연등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거나 횃불을 들고 강변으로 나갔던 모양이다. 돈 있는 사람이나 단체의 사람들은 기생을 태운 유람선을 대동강에 띄우고 봄철의 연등축제를 즐겼던 것 같다.[4]

일제의 식민지배가 막 시작된 터라 일반 민중은 화약을 많이 쓰는 폭죽(爆竹)을 터뜨리지 못 하고 매화포(梅花砲)라고 하는 종이 딱총이 고작이었다. 하늘 높이 치솟지는 못해도 불똥 튀는 모양이 매화꽃 떨어지는 것과 비슷하여 그걸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5]

 

* 대동강 청류벽과 청류정. 출처: Pinterest

불노리  - 주요한

Fireworks    by Chu Yo-han

 

아아, 날이 저믄다. 서편(西便) 하늘에, 외로운 강물 우에, 스러져 가는 분홍빗 놀……… 아아 해가 저믈면 해가 저믈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이라 파일날 큰길을 물밀어가는 사람 소리만 듯기만 하여도 흥셩시러운 거슬 웨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업는고?

Ah, it's getting dark. The sky in the west is glowing with pink lights disappearing on the lonely river. Ah, in the evening after sunset, the night will come again when I'm crying in the shade of an apricot tree. Today, it’s the eighth of April [Buddha's Birthday] when the joyful voices of people flow in and out in the streets. Why should I endure my tears in my heart alone?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싯별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城門) 우에서 나려다보니, 물 냄새 모랫 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어시 부족하야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절믄 사람은 과거(過去)의 퍼런 꿈을 찬 강물 우에 내여던지나, 무정한 물결이 그 기름자를 멈출리가 이스랴? ---- 아아 꺽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업건마는, 가신 님 생각에 사라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겟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와 버릴가, 이 서름 살라 버릴가, 이제도 아픈발 끌면서 무덤에 가 보앗더니 겨울에는 말랏던 꽃이 어느덧 피엇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다시 안 도라 오는가, 찰하리 속 시언이 오늘 밤 이 물 속에. 그러면 행여나 불상히 녀겨 줄 이나 이슬가………할 적에 퉁, 탕, 불티를 날니면서 튀여나는 매화포, 펄덕 정신(精神)을 차리니 우구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 더 강렬(强烈)한 열정에 살고 십다. 저긔 저 횃불처럼 엉긔는 연기, 숨맥히는 불꽃의 고통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십다고 뜯밖게 가슴 두근거리는 거슨 나의 마음.

Ah, it's dancing and swaying. A bright red fire ball is dancing. When I looked down at the top of a quiet castle gate, I could smell waters and sands below. As torches which were biting the night and the sky later bit off themselves as if something was running short, a young man with a depressed heart threw away his promising dreams in the past into the cold river. How could the cold-hearted river stop such shadow of dreams? - - - Ah, there is no flower which wouldn't wither when it is cut off. Even though I stay alive, my mind is dying when I think of the deceased lover. What the heck! I'd rather burn my heart with that fire and to cast away my sorrow. When I visited the tomb with painful footsteps, flowers, which withered during the winter, were in bloom. I wish the spring filled with love come again. I'd rather die in that water, then someone would feel sorry for myself. . . . At that time, tung, tak a paper fire cracker is fired flying sparks. When I am awakened, uproarious onlookers seem to laugh at or scold me. Ah, I'd like to live with stronger passion. I see the smoke of torches getting tangled. In the agony inside the breathless fire, I think unexpectedly with a pounding heart, I want to live a more passionate life.

 

4월달 다스한 바람이 강을 넘으면, 청류벽, 모란봉 노픈 언덕 우헤 허어혀켜 흐늑이는 사람 떼, 바람이 와서 불적마다 불비체 물든 물결이 미친 우슴을 우스니, 겁 만흔 물고기는 모래 미테 드러벡이고, 물결치는 뱃슭에는 조름오는 「니즘」의 형상(形象)이 오락가락----- 얼린거리는 기름자, 닐어나는 우슴소리, 달아 논 등불 미테서 목청껏 길게 빼는 어린 기생의 노래, 뜯밖에 정욕(情欲)을 잇그는 불구경도 인제는 겹고, 한 잔 한 잔 또 한 잔 끝업슨 술도 인제는 실혀, 즈저분한 뱃 미창에 맥업시 누으면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間斷)업슨 쟝고 소리에 겨운 남자들은 때때로 불니는 욕심에 못 견듸어 번득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여 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 가는 촛불은 우그러진 치마깃 우에 조을 때, 뜯잇는드시 삐걱거리는 배잣개 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When warm winds of April cross over the river, there appear flocks of people in white at the high hills of Cheongryu-byeok and Moran-bong. Each time wind blows, the waves of river reflecting nearby lights look like crazy laughter, and fearful fish hide themselves in the river sands. At the side of a boat swaying on the waves, a variety of shapes come and go. ----- With shadows swinging and laughter bursting, a little singer is singing under the lamp light. I'm tired of watching fireworks which unexpectedly led me to sexual desire. Now I like to drink no more - endlessly glass after glass. So I lie down on the dirty floor of the boat with my tears flowing from warm eyes without cause. At the ceaseless drumbeat, guys are springing up to the boat side with their eyes open occasionally out of desire. The candle lights are left sleepy on the littered clothes. I feel depressed at the meaningful sound of boat rowing.

 

아아 강물이 웃는다. 웃는다. 괴상한 우슴이다. 차듸찬 강물이 껌껌한 하늘을 보고 웃는 우슴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슬프게 삐걱거리는 배가 오른다.

Ah, the river is smiling. Smiling. It's a bizarre laughter. It looks as if the icy-cold waters of river are laughing at the dark sky. Ah, the boat is rising up. The boat rises up. Each time wind blows, the boat rises up creaking with sorrow and sadness.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을 저어 오르라. 거긔 너의 애인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곳추 너의 뱃머리를 돌니라. 물결 끝에서 니러나는 추운 바람도 무어시리오. 괴이(怪異)한 우슴 소리도 무어시리오, 사랑 일흔 청년의 어두운 가슴 속도 너의게야 무어시리오. 기름자 업시는 발금도 이슬 수 업는 거슬 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노치지 말라. 오오 사로라, 사로라! 오늘밤! 너의 발간 횃불을, 발간 입셜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발간 눈물을.

Row the boat to Neungra-do, a sleeping Island far away. Row the boat upstream in the rapidly flowing Daedong-gang river. Go directly to the hill where your lover is waiting for you with bare feet. What's up with the cold wind arising at the tip of waves? What's up with such a strange laughter? What's up with the dark-hearted young man who lost love? You know, without a shadow, there is no light. Oh, don't lose today ensured for you. Oh, stay alive. Alive! Tonight! Keep your bright torch, red lips, pupils and your warm tears.

 

Note

1] 국내 굴지의 대기업 임원(CEO)을 역임하고 은퇴한 어느 박학다식한 분(윤순봉 전 삼성서울병원 사장)은 달변가의 장기를 살려 유튜버로서 사회공헌 활동을 벌인다고 했다. 하지만 나의 경우 왕년에 논문 쓰던 가락으로 내가 아는 법률지식 + 영어와 시에 대한 관심 + 큐레이션 서비스 정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시를 번역하는 데 보람을 느낀다. 이런 식으로 그 결과물을 인터넷에 올림으로써 국내외의 여러 사람과 공유할 수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따라 KoreanLII의 일부 항목에는 필자가 번역하거나 전재해서 올린 우리 시와 전통시, 외국시를 싣고 있다. 그 일람표는 Literature and art 항목에 있으며, 또 아직 관련 항목을 찾지 못한 번역시는 임시로 정리해 놓았다.

 

2]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이 시를 영역한 것이 외국 서적에는 있는 듯 싶지만 그 책을 구해서 영역시를 여기 옮겨 싣기는 어렵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원작을 속속들이 이해도 할 겸 내 스스로 번역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 시인은 100년 후 한강 여의도의 불꽃놀이를 뭐라고 표현하였을까? 출처: 서울시 2018 불꽃축제.

3] 주요한은 8남매의 맏이였지만 평양 출신 부친이 도쿄의 한국인 유학생 선교단체 목사였으므로 고등학교부터 일본에서 공부하였다.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가서 춘원 이광수와 함께 임시정부 기관지도 발행하고 흥사단 활동을 했으며 상하이 후장대학(滬江大學)을 졸업했다. 송진우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동아일보에서 기자와 번역가로 활동했다. 일제 말기에 친일변절한 행적이 폭로되기도 했으나, 해방 후 정치인과 관료, 기업인으로사 활동한 공적을 인정받아 197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해방 후에는 정치인과 관료로 변신하였는데, 동생 주요섭은 [사랑손님과 어머니]를 쓴 소설가・번역가였다.

 

4] 등불을 쓰는 행사로 역사가 제일 오랜 것은 통일신라 때 시작되어 고려시대에 전국에 보급된 4월 초파일 소원등을 밝히는 연등회(燃燈會)이다. 우리나라의 연등회는 2020년 UNESCO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밖에 정초에 지역축제로 야간에 등불을 밝히는 연등제(燃燈祭), 진주 남강에서 논개를 기려 강물에 등불을 띄우는 유등제(流燈祭) 등이 있다. 산불 위험이 큰 풍등(風燈)은 우리나라에서는 널리 행해지지 않는다. 전력보급이 안 된 1910년대 평양에서의 연등회는 날이 어두워지면 곳곳에 횃불을 밝혀놓고, 사람들이 모란봉 을밀대, 청류정 등지에 놀러가거나 대동강물에 배를 띄우고 술을 마시며 기생들의 창(唱)을 듣는 풍류를 즐겼던 것 같다.

 

5] 축제 때 불꽃을 만들기 위해서 대나무 통에 종이와 화약을 다져 넣은 폭죽(爆竹)에 불을 붙여 터뜨린다. 중국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세시풍습의 하나로 섣달 그믐날 폭죽을 터뜨려 악귀를 쫓아내는 풍습이 있었다. 산조는 깊은 산 속에 사는 뿔 네 개 달린 괴수인데, 밝은 빛과 폭발음을 무서워해 폭죽을 터뜨림으로써 쫓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풍습은 오늘날까지 '폭죽 소리에 묵은해와 악귀와 함께 사라진다'며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강을 따라 매달아 놓은 숯가루 주머니를 태우며 떨어지는 불꽃을 감상하는 낙화(落火)놀이가 있었다. 강을 따라 줄지어 불꽃이 떨어져 내려온다고 해서 줄불놀이라고도 불렀는데, 이 풍습은 주로 사월 초파일이나 정월 대보름에 선비들이 뱃놀이를 하며 즐겼다. 출처: 조선일보, [사소한 역사] 불꽃놀이, 2023.10.17.

1910년대의 평양에서는 요즘처럼 화약을 많이 쓰는 불꽃놀이는 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매화포라고 하는 종이딱총을 많이 썼던 것으로 보인다.

 

Post Script

산문시 "불놀이" 번역을 계기로 상세히 알게 되었는데, 주요한은 이른바 '문제적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기고, 저널리스트로, 흥사단 사회운동가로, 기업인으로서 맹활약을 펼친 게 사실이다. 반면 일제말 친일부역자로 활동한 경력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세의 나이로 원숙한 경지의 시를 썼을 뿐더러 춘원과 함께 상해에서 임시정부 기관지를 만들기도 했다. 불놀이의 내용과 전개를 보면 퀴블러로스 박사보다 50년 전에 DABDA 모델의 전형을 제시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찬송가(579장 "어머니의 넓은 사랑" 외) 작사와 시조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바 있다.

그런데 Wikipedia 영문판을 보면 한글판 위키백과와 달리 그에 관한 단편적인 소개에 그쳐 있었다. 그래서 필자가 마음 먹고 "불놀이"의 첫 2연을 소개하는 한편 종합적인 해설기사를 작성해서 올렸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오늘도 글을 쓴다

Like drops from a single point
to pierce a rock,
I’m writing something to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