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시로 일컬어지는 주요한의 '불놀이'(1919)를 전에 소개한 바 있다.
처음엔 이 산문시를 스무살도 안된 일본 유학생이 썼다는 점에 놀랐고, 1910년대의 평양 시내의 연등행사에 주목해서 영문으로 번역하는 데 치중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이 시의 내용을 심도 있게 살펴보게 되었다.
운율을 내재한 이 산문시에서 1인칭 화자는 연등행사 불놀이를 보면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연인을 생각하며 슬픔과 분노에 차 있다가 대동강 놀잇배에 오른다. 기생의 창을 들으면서 하늘과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오늘의 삶을 비탄에 빠져 보내서는 안되겠다며 깨우치는 과정을 활동사진처럼 보여준다.
밤 늦게까지 하룻 동안 연속해서 일어난 일련의 극적인 사건은 마치 흑백영화 "로마의 휴일"을 보는 것 같았다.
얼마 전 사형제 폐지에 관한 영화를 찾다가 알랜 파커 감독의 'The Life of David Gale'(2003)을 보게 되었다. 미국 텍사스 주에서 여자 대학원생 성추행으로 학교에서 면직된 철학과 교수가 주인공 데이비드 게일(케빈 스페이시 분)이다. 유명 교수가 사형폐지 운동을 같이 해온 여자 동료(로라 린네이 분)를 강간하고 살해한 죄목으로 재판을 받은 끝에 사형 당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한 잡지사가 파란만장한 그의 이야기를 기사화하기 위해 50만 달러를 지급하고 게일이 지명한 기자를 파견한다. 사형집행 직전에 인터뷰를 진행하던 미모의 여기자(케이트 윈슬렛 분)가 그가 함정에 빠졌음을 발견하고 구명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어디까지나 픽션[1]이라 해도 너무 끔찍한 내용이라 실망했는데 죽은 여자동료가 백혈병 말기였음을 비밀로 해왔다는 게 복선(伏線)이었다. 주인공과 말기암의 여자동료가 서로 진솔한 대화를 나누면서 통상 암환자가 겪는 DABDA 5단계를 이야기할 때 나 역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DABDA 모델이란 스위스계 미국인 정신과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übler-Ross 1926~2004) 박사가 1969년 On Death and Dying 책에서 처음으로 제시하였다.[2] 퀴블러로스는 오랜 임상체험을 통하여 죽음을 앞둔 환자가 일반적으로 겪게 되는 5단계의 심적 동요와 변화(5 Stages of Grief)를 DABDA로 정리했다. 암과 같은 불치병에 걸린 환자는 처음에는 "그럴 리가 없다"며 부정하다가 점차 "왜 하필 나지?" 분노와 원망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신을 향해 "살려만 주시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타협하려고 하지만 부질 없음을 깨닫고 절망 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죽음에 임박해서는 이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사람에 따라 5단계의 과정이 조금씩 다를 수는 있다. 하지만 죽음이 아니더라도 극심한 심적 고통에 직면한 사람들이 대부분 이러한 반응을 보인다는 점에서 수긍이 갔다.
주요한의 '불놀이'는 다음과 같이 5개 연으로 구성된 산문시이다.
① 저녁놀이 지고 초파일 연등행사를 벌이는 시민들과 달리 화자(話者)는 연인이 곁에 없음을 애써 부정하며 슬픔에 겨워 평양 시내 이곳저곳을 배회한다.
② 자기 곁에서 사라진 님을 생각하며 안타까운 가슴을 불로 태울까, 물에 빠져 죽어버릴까 상상하다가 딱총 소리에 놀라 정신을 차린다.
③ 사람들과 어울려 대동강 놀잇배를 타고 기생의 창을 들으며 술을 마시다가 배 밑창에 눕는다.
④ 꿈틀거리는 정욕에 뱃전으로 나가보니 껌껌한 하늘 아래 강물이 괴상한 웃음을 짓는다.
⑤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없음을 깨닫고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자고 다짐한다.
위와 같이 5개 연에서 Denial - Anger - Bargaining - Depression - Acceptance의 DABDA 5단계를 아주 충실하게 따르고 있음을 알고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 원문을 읽고 그 내용을 요약한 다음 DABDA 5단계와 비교해 보기로 한다. 우리의 천재시인은 퀴블러로스 박사보다 50년 전에 시로써 극한 슬픔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아주 리얼하게 그려 놓았던 것이다.
불노리 - 주요한
아아, 날이 저믄다. 서편(西便) 하늘에, 외로운 강물 우에, 스러져 가는 분홍빗 놀……… 아아 해가 저믈면 해가 저믈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이라 파일날 큰길을 물밀어가는 사람 소리만 듯기만 하여도 흥셩시러운 거슬 웨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업는고?
⇒ 사월 초파일 부산한 사람들을 보며 참을 수 없는 눈물
DENIAL (부정)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싯별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城門) 우에서 나려다보니, 물 냄새 모랫 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어시 부족하야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절믄 사람은 과거(過去)의 퍼런 꿈을 찬 강물 우에 내여던지나, 무정한 물결이 그 기름자를 멈출리가 이스랴? ---- 아아 꺽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업건마는, 가신 님 생각에 사라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겟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와 버릴가, 이 서름 살라 버릴가, 이제도 아픈발 끌면서 무덤에 가 보앗더니 겨울에는 말랏던 꽃이 어느덧 피엇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다시 안 도라 오는가, 찰하리 속 시언이 오늘 밤 이 물 속에. 그러면 행여나 불상히 녀겨 줄 이나 이슬가………할 적에 퉁, 탕, 불티를 날니면서 튀여나는 매화포, 펄덕 정신(精神)을 차리니 우구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 더 강렬(强烈)한 열정에 살고 십다. 저긔 저 횃불처럼 엉긔는 연기, 숨맥히는 불꽃의 고통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십다고 뜯밖게 가슴 두근거리는 거슨 나의 마음.
⇒ 저 불길로 태워버리고 싶은 가슴속의 설움
ANGER (분노)
4월달 다스한 바람이 강을 넘으면, 청류벽, 모란봉 노픈 언덕 우헤 허어혀켜 흐늑이는 사람 떼, 바람이 와서 불적마다 불비체 물든 물결이 미친 우슴을 우스니, 겁 만흔 물고기는 모래 미테 드러벡이고, 물결치는 뱃슭에는 조름오는 「니즘」의 형상(形象)이 오락가락----- 얼린거리는 기름자, 닐어나는 우슴소리, 달아 논 등불 미테서 목청껏 길게 빼는 어린 기생의 노래, 뜯밖에 정욕(情欲)을 잇그는 불구경도 인제는 겹고, 한 잔 한 잔 또 한 잔 끝업슨 술도 인제는 실혀, 즈저분한 뱃 미창에 맥업시 누으면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間斷)업슨 쟝고 소리에 겨운 남자들은 때때로 불니는 욕심에 못 견듸어 번득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여 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 가는 촛불은 우그러진 치마깃 우에 조을 때, 뜯잇는드시 삐걱거리는 배잣개 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 뱃놀이 기생의 창을 들으며 정욕을 일어나 불구경
BARGAINING (타협)
아아 강물이 웃는다. 웃는다. 괴샹한 우슴이다. 차듸찬 강물이 껌껌한 하늘을 보고 웃는 우슴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슬프게 삐걱거리는 배가 오른다.
⇒ 껌껌한 하늘 아래 괴이하게 웃음짓는 강물
DEPRESSION (우울)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을 저어 오르라. 거긔 너의 애인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곳추 너의 뱃머리를 돌니라. 물결 끝에서 니러나는 추운 바람도 무어시리오. 괴이(怪異)한 우슴 소리도 무어시리오, 사랑 일흔 청년의 어두운 가슴 속도 너의게야 무어시리오. 기름자 업시는 발금도 이슬 수 업는 거슬 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노치지 말라. 오오 사로라, 사로라! 오늘밤! 너의 발간 횃불을, 발간 입셜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발간 눈물을.
⇒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고 살자!
ACCEPTANCE (수용)
Note
1] 여전히 사형제가 존치되고 있는 미국에서 이를 둘러싼 논란을 정면에서 다룬 영화가 숀 펜, 수잔 서랜든 주연의 'Dead Man Walking'(1995)이다. 사형수 대기 감방이 있는 텍사스주 헌츠빌 교도소에서 실제로 있었던 실화로 이 영화에서도 그 장소와 무대를 그대로 차용했다. 논픽션으로는 'The Firm', 'Pelican Brief' 같은 법정소설을 발표해 온 존 그리샴 변호사의 The Innocent Man (2006)이 있다. 전직 야구선수가 오하이오 주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고 형 집행을 기다리다가 DNA 검사 결과 진범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석방된 실화를 다루었다. 미국에서는 1992년에 설립된 비영리단체 Innocent Project의 지원을 받아 DNA 검사결과를 토대로 재심을 청구하여 사형수가 무죄 석방된 사례(DNA-based exoneration case)가 현재 375명에 이른다고 한다.
2] 2차대전 당시 취리히에서 많은 피난민과 같이 살았던 엘리자베스 퀴블러는 전후 폴란드에 있는 유태인 강제수용소를 가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수용소 벽에 수백 마리의 나비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 죽음이 닥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훨훨 날아가는 나비를 그린 사람들을 생각하며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취리히 의과대학에 유학온 로스라는 미국 청년과 결혼한 후 미국 뉴욕의 병원에서 레지던트를 시작한 퀴블러로스가 임신을 하여 전공과목을 정신과로 바꾸고자 할 때 칼 융과 빅터 프랭클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은 나치 점령 하에서 강제수용소로 끌려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 이유가 사람은 자기가 의미를 부여한 일을 완수하려고 애쓴다는 논문을 쓰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새로운 정신치료 요법인 Logo Therapy 이론을 주창하였다.
Annex
필자는 전에 봉직했던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의 학술지 《글로벌 기업법무 리뷰》에 위의 글을 토대로 아래의 글을 기고한 바 있다. 은퇴한 교수가 법전원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하는 형식을 취했다.
* [講義餘錄] "주요한의 불놀이와 사형제 폐지 논의", KHU 글로벌 기업법무 리뷰, 제14권 2호, 2021.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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