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 피서를 갔다가 며칠 전 내 삶을 한 번 뒤돌아보는 계기가 있었다.
전국이 폭염에 시달리고 있을 때 시원한 온천욕을 하고 싶었다. 마침 아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다음날 아침 일찍 오색온천으로 갔다.
양양 주전골 그린야드 호텔의 탄산온천수는 철분과 탄산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섭씨 26~29도의 냉천수(冷泉水)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얼마 후 내 몸이 근질근질해지고 작은 기포가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벽면의 점성술 12궁도를 바라보며 20분 이상 멍 때리고 앉아 있으면 몸과 마음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강원도에 가면 반드시 찾게 된다.
이날도 온천욕을 마친 후 주전골 산채전문 음식점에서 점심까지 잘 먹은 후 평창 숙소로 향했다.
주전골에서 양양으로 나오는 데 강릉과 서울의 갈림길에서 무심코 네비게이터가 일러주는 왼쪽길로 접어들었다.
대관령에서 오색온천에 가려면 영동고속도로의 마지막 분기점에서 강릉으로 가는 쪽이 아니라 속초-양양으로 가는 북쪽 길을 택해야 한다. 게다가 우리는 강원도에서의 휴가가 끝나면 서울로 가야 했으므로 그 선택은 조건반사 같은 것이었다. 더욱이 네비게이션이 화살표와 목소리로 왼쪽 길을 가리켰던 만큼 그 선택에 추호도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판단 미스였음을 깨달았다. 이정표가 춘천으로 가는 양양-서울 60번 고속도로임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다음 나들목에서 U-턴을 하기로 했다.
아뿔싸~ 이 고속도로에는 인제 내린천 휴게소까지는 나가는 길(Exit)이 없었다. 게다가 길고 짧은 터널의 연속이었다. 순간의 판단 미스로 말미암아 왕복 60km를 달려야 했으니 최근 터널에 침수와 화재 사고로 적잖은 희생자가 나왔다고 들었던 터라 으시시해졌다.
운전을 하는 아내와 나는 누구 잘못을 따질 계제도 아니었다. 평소에 네비의 지시를 반드시 따르지도 않았으므로 네비 탓만을 할 수도 없었다. 바깥 경치도 구경하지 못하고 터널 속을 계속 달려야 하는 아내를 위로도 할 겸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 겪었던 중대한 갈림길의 경험담을 서로 나누게 되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돌이켜보니 나의 삶 속에서도 좌 우의 갈림길이 적지 않게 있었다.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만 꼽아도 열 개가 훌쩍 넘었다.
* 사법시험에 몇 차례 낙방한 후 돈을 벌며 고시공부를 계속할 작정으로 산업은행에 입사
* 은행에서 법서(法書)를 볼 수 있는 조사부가 아니라 법률과 무관한 해외채권 발행 등 국제금융 업무를 수행. 나와 비슷한 동기에서 입사한 친구는 연수가 끝나고 조사부 아닌 부서로 발령을 받자 사표를 내던지고 다시 공부에 매진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 네덜란드로 장기 연수를 떠나면서 처자를 동반, 아무 대책도 없이 떠났다가 사촌처형의 도움으로 둘째를 베를린에서 출산
* 은행 업무와 전혀 관계없는 산은 사료(史料) 기획전시 업무를 담당하면서 통일 후 산업은행이 할 일을 고민
* 결재 과정에서 손으로 새로 고쳐쓰기를 반복해야 하는 각종 품의서의 수기(手記) 대신 워드프로세서 도입에 앞장 서고 독학으로 Basic 등 컴퓨터의 기본 기능을 숙지
* 박사 학위 취득 후 은행 연봉(2급 부부장)의 절반도 안 되는 대학 전임강사로 전직
* 한 연구기관으로부터 원고료만 받기로 하고 개인정보의 해외이전에 따른 문제점 검토. 그 다음해 비슷한 주제의 KISA 용역과제 수행
* 아무런 사례 없이 호주 대학의 "한국의 개인정보 보호 법제" 학위논문의 레프리로 심사. 담당 호주 교수의 추천으로 국제 워크숍에 참가
* 친분관계 만으로 無보수로 산은 자회사의 정부조달 사업 입찰 서류 검토. 수주는 못 했으나 이를 계기로 그 회사의 법률자문역 계속 수행
* 평소의 관심 사항을 정리하여 국내 특허 출원, 큰돈을 들여 해외에서도 PCT 출원했으나 해외특허 취득에는 실패
* 아내의 잡지사 사직과 창업 제안에 조건 없이 투자 동의, 그 결과 여성잡지 출판업의 신기원을 이룩
* 변호사 등 자격시험에 대한 미련과, 포기할 때마다 선택했던 차선책(국제금융 업무, 박사학위논문, 온라인 백과사전 등)으로 나름대로 입신에 성공
* 집단지성 참여를 전제로 온라인 영문 법률백과사전(KoreanLII.or.kr)을 만들었으나 동역자(Collaborator) 없이 나 홀로 수행. 이 일이 아니었으면 정년퇴직 후에 달리 보람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다행으로 생각
* 한계에 달한 백과사전의 콘텐츠에 아무런 배경지식도 없이 한국의 시와 노래를 영역하여 소개하기 시작. 지금은 알아주는 사람 없어도 누구에겐가 또 언젠가는 사람들이 고맙게 여길 것이라 확신
마침 강원도의 피서지에 합류한 아들, 손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생각났다.
사회생활, 직장생활을 하는 가운데 돈이나 명예가 따르지 않는 일일지라도 내가 성섬껏 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겨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된다는 진솔(眞率)한 체험담을 들려주고 싶었다.
학자로 변신한 뒤에는 특별한 메리트 없이도 논문 한두 편 쓸 수 있으면 기꺼이 하겠다고 무슨 제안이든 받아들였었다. 그렇게 한 일들이 대부분 커다란 성과로 나타난 것도 자랑스럽고 명심할 사항이었다.
또 네비게이션 같은 전자기기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말고 큰 지도(Big Picture)를 보고 전체 구도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파악한 다음 진로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도 꼭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빼놓을 수 없는 말은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라는 생전에 어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새찬송가 301장의 가사였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God's great grace it is has brought us, All this way in faithfulness.
God's unbounded love which sought us, How can tongue of man express?
His strong hand is watching over us, Whether sleeping or awake.
He makes all things pleasant for us, In the Lord for Jesus' sake.
때마침 '한사람 시와 마음' 블로그를 운영하는 김상문 시인이 보내준 다이어그램이 어떤 말보다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삶' 글자를 풀어보면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을 합쳐보니 '삶'이 된다는 경구(警句)였다.
늘 하던 식으로 17음절의 영어 하이쿠로 옮겨보니 그 의미가 더욱 명료해졌다.
곡절 많은/ 우리 삶을 풀어보니/ 사람이 되고
서로 부대꼈던/ 사람을 합쳐보니/ 삶이 되네
What do you think Life is?
Its Korean letter shows two-word 'human being'.
I've come to know those people around me
Interwound in Life all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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