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여름은 여러 모로 기록적이었다.
5월부터 '여름 같은 봄'이라더니 기록적인 폭염과 열대야, 한반도를 남북으로 관통한 태풍 등 신기록이 풍성했다.
다행한 일이라면 원전을 풀가동하여 기록적인 전력사용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정전(blackout)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고, 그나마 4대강 사업을 벌인 덕에 4대강 유역에서는 홍수가 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젠 지구 온난화(warming)가 아니라 지구 열화(熱化, boiling)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 금년 여름이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것이라는 말에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기후재난은 우리집에서 먼저 시작되고 있었다.
아파트 시스템 에어컨이 고장나 버린 것이다. 안방의 에어컨이 리모컨에 일체 반응을 하지 않더니 몇 시간 후에는 한번 켜진 다음 꺼지질 않는 것이었다. 온도를 올리면 절로 꺼지지 않으려나 생각했으나 그도 아니었다.
최근 몇 차례 인상된 전기요금 폭탄이 현실화되리라는 걱정에 배전반의 에어컨 전원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시스템 에어컨 메이커에 AS신청을 했다. 그로부터 악몽 같은 사건이 잇달았고 또 에어컨에 관한 지식을 몇 가지 새로 배울 수 있었다. 이를테면 지금까지 나만 몰랐던 상식(common knowledge)이었다.
* 시스템 에어컨의 어느 하나 전원을 차단하면 다른 방의 에어컨도 정상 작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
* 시스템 에어컨의 전체 전원을 내리면 실외기도 꺼져 버리므로 전원을 다시 올리더라도 당장은 더운 바람이 나오고 찬바람이 나올 때까지는 여러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
* AS신청이 폭주할 때는 무한정 통화연결을 기다리느니 온라인 신청이 접수가 빠르지만, 이것도 챗봇의 일차 심사를 거친 후 배정받은 출장수리 날까지 역시 무한정 기다려야 한다는 것. 우리집의 에어컨 고장은 챗봇에 입력되지 않은 현상이었는지 동문서답을 거듭한 끝에 AS 신청을 위해 뻔한 고장을 입력하고서야 접수를 할 수 있었다.
* 웃돈을 주고 에어컨 사설업체를 부를 수도 있으나 지역분할제(territory partitioning), 메이커 부품 구득난으로 제대로 수리를 할 수 없다는 것. 그 적용을 받지 않는 신제품 구입 시에는 훨씬 빠르게 에어컨을 설치할 수 있다고 한다.
* 이 모든 것이 에어컨의 AS수요가 한여름에 몰린다는 것과, 주 52시간제의 시행으로 AS인력운용에 전혀 융통성을 발휘할 수 없는 사정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렵사리 AS신청을 마쳤으나 출장수리는 3주 후에나 가능하다는 말에 기가 막혔다. 그럼 여름더위는 거의 물러간 뒤인데.
고장난 안방 에어컨을 고치기는커녕 한여름 무더위에도 온 집안의 에어컨을 쓰질 못하게 만들었으니 내가 결자해지(結者解之)를 해야 했다. 왕년의 법학교수로서 위와 같은 문제점을 파악했으니 해결책까지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나 같은 사람이 적지 않을 테니 이 문제를 공론화할 수 있는 국민청원을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신청서를 작성하였다.
기대와는 달리 대통령실에는 국민제안 사이트만 있지 직접 취급하질 않았다. 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 미국 백악관에서도 'We the People Petition' 제도를 흐지부지 없앴다고 들었는데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사정인 모양이었다.
물론 국민청원 사이트는 국회와 정부에 개설되어 있다. 그런데 나의 청원은 입법 사항이 아니라 여러 부처와 관련된 사항이므로 하는 수 없이 국무총리실을 청원대상기관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의 제안서를 제출했다.
첫째, 에어컨 수리기사에 대하여는 주 52시간제의 적용을 탄력성 있게 운영하도록 함.
에어컨 수리작업은 일반 제품 생산과는 달리 소상공인의 민생, 국민 건강과 복지, 심지어는 생명과도 직결되는 사안임. 그러므로 일반 제조업체나 건설업체의 근로작업과는 다른 의료기관의 환자진료와 비슷하다고 하겠음. 주 52시간제가 법률로 정해진 만큼 당장 폐지할 수는 없을지라도 기상청의 폭염주의보, 폭염경보가 내려진 날을 포함한 주간에 대해서는 예외를 인정할 필요가 있음. 당국이 '국민건강'이라는 위법성조각 사유로 사업주에 대한 불기소 내지 불벌(不罰) 방침을 천명한다면 숨통이 트일 것임.
둘째, 메이커에서 계절적 수요가 큰 에어컨 수리기사를 4계절 채용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구시대적 발상임.
지금은 플랫폼 시대이므로 대리운전기사, 배달근로자처럼 파트타임으로 지역별 장터(플랫폼)를 만들어 임시 채용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음. 물론 여기에 반대하는 근거와 주장도 많겠지만 어떤 법규정일지라도 국민의 건강과 안전 앞에서는 걸림돌이 될 수 없음. 수출을 많이 하는 국내 메이커들은 이에 관한 문제해결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생각함.
셋째, 빈발하는 에어컨 AS 수요증가에 대해서도 정부나 협회 차원에서 기술지도, 품질관리, 부품공급 측면의 대책마련이 시급함.
국산 백색가전이 세계적으로 우수한 품질을 인정받고 있는 터에 에어컨의 고장이 잦고 AS에 한 달씩 걸린다는 게 국제적으로 알려진다면 에어컨은 물론 다른 가전제품의 수출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음.
요컨대 국무조정실을 비롯한 고용노동부, 법무부, 경찰청, 산업통상자원부 등 해당 정부기관에서는 다음 사항의 제도 개선을 서둘러 주시기 바람.
1. 에어컨 수리에 관한 한 기상청의 폭염주의보ㆍ폭염경보가 내려진 주간에 대하여는 주 52시간제 적용의 예외를 인정하고, 수사기관에서는 이 건에 관한 법 위반 사항일지라도 국민건강을 이유로 불벌 방침을 천명함.[1]
2. 에어컨 수리기사는 메이커에서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프리랜서와 같은 자율성을 부여하고 지역별 장터(플랫폼) 운영을 장려함.
3. 빈발하는 에어컨 고장은 수요자에 대한 해당 부품 공급을 무제한 원활히 보장하고, 정부와 협회 차원의 대책을 마련하도록 함.
위의 청원에 대해서는 담당자가 나의 연락처로 진행상황을 계속 알려왔다. 그러나 "사공이 많아서 배가 산으로 가다가 영 죽도 밥도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2023. 08. 08 청원24에서 "에어컨 수리기사의 주52시간제 탄력적 운영 등에 관한 청원" 접수 통보
- 2023. 08. 10 청원법 제15조 제2항[2]에 따라 국무조정실에서 '사인간 거래 분쟁'[3]을 다루는 소비자원으로 이송
- 2023. 08. 21 역시 위의 법 조항을 들어 소비자원에서 고용노동부(임금근로시간정책과)로 이송
- 2023. 08. ?? ???
내가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비분강개심으로 제안했던 청원이 여름이 다가도록 정부기관 사이에 핑퐁처럼 오가는 것을 보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다른 한편으론 담당 공무원이라면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이해가 가기도 했다.
- 주52시간제를 한 마디라도 잘못 건드렸다간 '국민역적'이 될 텐데 뻔히 아는 답을 뭘 내놓으라는 건지?
- 어르신이 정 더우면 찬물에 씻고 낮잠이나 주무시지 않고 ······.
- "위법하지만 불가벌"이라고 말했다간 3권분립의 헌법취지도 모르느냐 공격을 받을 텐데 ······.
- 타다금지법이 국회와 법원에서 막혀 버렸는데 무슨 홍두깨 같은 플랫폼(가전제품 수리 지역별 장터) 발상인가요?
- '안 된다'는 이유를 찾기로 하면 열 개 스무 개도 넘을 것이다.
사실 우리집 에어컨이 고장나서 내가 직접 피해를 보지 않는다면 뉘집 개가 짖느냐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닥친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법이 없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태원에서, 오송 지하차도에서 발생한 그런 사건 사고를 숱하게 듣고 보고 있지 않은가! 관련 부처에서 법조문을 따져가며 "(우리 부처에는) 해당 사항 없음"이라고 보고하기는 쉽다. 그런 공무원이 일 잘한다고 상사로부터 칭찬을 들을 것이다.
전에 튀르키에 일주 여행을 할 적에 이스탄불에 가 본 적이 있다. 금각만(Golden Horn)의 풍경은 그지없이 평화로웠다.
1453년 튀르크의 술탄 메흐메드2세(Mehmed II)가 해군 함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에 처들어 갈 때 금각만 입구는 튼튼한 쇠사슬로 막아놓아 튀르크의 함선이 이곳을 통과하여 도저히 성 아래로 진격할 수 없었다.
그때 술탄은 건너편 산을 가리키며 모든 함선을 산 너머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곧 이어 배가 산을 넘어가는 진풍경이 벌어졌는데 허를 찔린 동로마제국 군대는 그만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전에 로스쿨에서 학생들에게 강조한 바 있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실망하진 말자.
산 너머에 더 멋진 항로가 기다리고 있다면 힘들더라도 산을 넘어가야 한다.
문제가 복잡해 보여도 한두 가지만 제치면
의외로 일이 쉽게 해결될 수 있음을 명심하자."
Note
1] 일선 수사기관에서는 주 52시간제 위반 사건의 고소고발장을 접수한 후에야 처벌 여부를 결정할 수 있으므로 사전에 본건 사건의 불벌 방침을 천명하는 것은 훨씬 그 윗선(국무총리 또는 행정안전부장관, 법무부장관)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 파악도 없이 주 52시간제 법규정을 어기고 회사의 명성과 ESG 평가등급을 떨어뜨리는 위험을 자초할 가전 AS업체의 CEO가 있을지는 극히 의심스럽다.
2] 청원법 제15조 (청원서의 보완 요구 및 이송)
① 청원기관의 장은 청원서에 부족한 사항이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보완사항 및 보완기간을 표시하여 청원인(공동청원의 경우 대표자를 말한다)에게 보완을 요구할 수 있다.
② 청원기관의 장은 청원사항이 다른 기관 소관인 경우에는 지체 없이 소관 기관에 청원서를 이송하고 이를 청원인(공동청원의 경우 대표자를 말한다)에게 알려야 한다.
③ 그 밖에 청원서의 보완 요구 및 이송 등에 필요한 사항은 대법원규칙, 헌법재판소규칙, 중앙선거관리위원회규칙 및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3] 국무조정실 엘리트 공무원이 문해력(文解力)이 부족해서 본건 청원을 소비자원으로 이첩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법 규정만 따지면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 결론을 내기 어려우니 플랫폼 사업 같은 '사인 간의 계약관계'에 방점을 찍고 한국소비자원에서 검토해 보라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 문제를 열흘 가까이 검토한 소비자원의 담당자는 주 52시간제 논의가 핵심이라고 곧이 곧대로 해석하고 상사의 결재를 얻어 다시 고용노동부로 이송한 것이라 여겨진다. '불가'라는 이들의 논리나 일처리 방식에는 일견 잘못이 없어 보이는 한편으론 나의 제안이 바닥 없는 블랙홀에 빠져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못내 아쉬운 점은 우리집 에어컨 고장으로 접하게 된 우리나라 공직사회의 실제 면모에서는 중세 콘스탄티노플의 철옹성을 무너뜨린 이방인의 패기(覇氣) 같은 게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자기 책무는 성실히 하는 줄 알았던 사법부의 젊은 법관(배석판사)과 법원서기들이 판결문 작성은 주 3건 이내, 재판은 저녁 6시까지만 하기로 정해놓았다고 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재판 결과에 목을 매고 있는 사건 당사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영화 <포세이돈 어드벤처>(1972)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진 해크먼이 열연했던 스코트 목사가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외쳤던 말이 생각났다. "제발 도와달라고 하지는 않을테니 방해는 말아주세요."
제발 창의적인 젊은 사업가들의 벤처 정신을 꺾지는 말아주시기를~
PS. 청원 처리결과와 이유
위의 청원 사항이 한국소비자원과 고용노동부를 핑퐁처럼 오간 끝에 마침내 2023. 12. 4 고용노동부 임금근로시간정책과 담당자로부터 회신을 받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처리결과: 기시행 중
ㅇ 청원인의 말씀과 같이 에어컨 수리기사의 경우 계절적인 요인에 따라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음
- 현행 근로기준법에는 이와같이 계절적 영향이 큰 업종 등에서 성수기에 많이 일하고 비수기에 적게 일할 수 있도록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도입하여 운영 중에 있음
□ 처리결과에 대한 이유
ㅇ 현재 근로기준법에서는 1주 최대 52시간(법정 40 + 연장 12)을 기본으로 하면서, 노·사 합의에 따라 근로시간의 운영과 배치를 유연하게 변경할 수 있는 유연근로제도*가 도입되어 있음 *
▴탄력적 근로시간제(일이 많은 주의 근로시간을 늘리는 대신 다른 주의 근로시간을 줄여 평균적으로 법정근로시간(1주 40시간)을 맞추는 제도),
▴사업장 밖 간주근로시간제 (출장이나 그 밖의 사유로 근로시간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업장 밖에서 근로하여 근로시간 산정이 어려운 경우 노사가 합의한 시간을 근로한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 등
○ 계절적 영향으로 기간별 업무량의 편차가 큰 경우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사업장 밖에서 이루어지는 업무로서 근로시간 산정이 어려운 경우 사업장 밖 간주 근로시간제 등을 활용하여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이며, * (탄력근로제 활용 예시) 성수기인 6~8월에는 법정근로시간 한도를 초과하는 근로(1주 최대 64시간) 후 비수기인 9~12월에는 적게 근로(1주 최대 40시간) **
보다 상세한 내용은 ‘19.8 유연근로시간제 가이드(고용노동부 홈페이지 – 정책자료실) 참조
○ 근로시간 운영의 어려움 해소를 위해 1:1 기업 맞춤형 컨설팅을 제공*하고 있으므로, 필요한 기업에서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음을 안내드림 * 한국공인노무사회(www.kcplaa.or.kr) → 노동시간단축 컨설팅 참여기업 신청
○ 아울러 현재 정부는 획일적·경직적인 근로시간 제도를 개편하여 다양해지는 현장 수요를 반영하고, 근로시간 선택권 확대를 통해 실근로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정책을 검토 중에 있으며,
○ 현재 대국민 설문조사를 통해 국민과 노·사의 의견을 수렴하는 등 현장의 다양한 수요를 반영해 나갈 예정임
처리 담당자: 소속 임금근로시간정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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