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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Day] The BEATLES 비틀즈 평전

Onepark 2023. 10. 13. 07:00

G : 고등학교 동창들하고 춘천 여행 잘 다녀오셨습니까?

P : 고등학교 졸업 50주년 행사로 계획했던 것인데 코로나 팬데믹으로 52주년인 금년에 실시했습니다. 기획자가 공자님 말씀을 인용해 '종심소욕(從心所欲) 낭만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여 청명한 가을날씨에 친구들과 정말로 유쾌한 소풍을 다녀왔어요. 

 

G : 오늘은 무슨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P : 네, 지난 달처럼 신간서적이 아니라 오랫동안 제 서가에 꽂혀 있었던 책입니다. 2003년 베텔스만에서 번역 출간한 《비틀즈(The BEATLES)》(지은이 헌터 데이비스, 옮긴이 이형주, 감수 정석원)입니다. 거의 500쪽에 달하는 하드바운드로 제본된 책이어서 장식용으로 그만이었죠.

 

G : 비틀즈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영국의 밴드이고 그들의 활동상황이나 대표곡도 많이 알려져 있어서 찐팬이 아니면 굳이 책을 소장할 필요가 있나 생각됩니다. 교수님도 퇴직할 때 버리지 않고 연구실에서 집으로 들고 가신 것을 보니 비틀즈 팬이시군요.

P : 네, 두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첫째는 아까 말씀드린 장식용이었고, 둘째는 그 멤버 중 폴 메카트니에 관심이 많아서 그랬습니다. "Yesterday", "Let it be", "Something" 같은 나의 최애곡 창작의 원천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보고 싶었지요.

또 다른 한 가지 이유가 있어요. 요즘 도서관마다 오래 된 종이책을 처분한다고 그러잖아요? 공간도 부족할 뿐더러 요즘 도서관을 찾는 젊은 독자들은 전자책과 전자저널 같은 디지털 도서를 선호하기 때문에 책 서가를 치우고 전자 부스를 많이 차린답니다.

지금도 연필로 원고를 쓰는 대표적인 종이책 작가 김훈 씨는 몇 년 전 망팔(望八)을 맞아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한다면서 가볍게 죽기 위해서는 미리 정리해놓을 일이 있다고 하셨어요.

 

내 작업실의 서랍과 수납장, 책장을 들여다보았더니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의 거의 전부(!)가 쓰레기였다.

이 쓰레기더미 속에서 한 생애가 지나갔다. 똥을 백자 항아리에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둔 꼴이었다.

나는 매일 조금씩, 표가 안 나게 이 쓰레기들을 내다버린다. 드나들 때마다 조금씩 쇼핑백에 넣어서 끌어낸다.

나는 이제 높은 산에 오르지 못한다. 등산 장비 중에서 쓸 만한 것들은 모두 젊은이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나머지는 버렸다.

책을 버리기는 쉬운데, 헌 신발이나 낡은 등산화를 버리기는 슬프다. 뒤축이 닳고 찌그러진 신발은 내 몸뚱이를 싣고 이 세상의 거리를 쏘다닌, 나의 분신이며 동반자이다. 헌 신발은 연민할 수밖에 없는 표정을 지니고 있다. 헌 신발은 불쌍하다. 그래도 나는 내다 버렸다. 뼛가루에게 무슨 연민이 있겠는가. 출처: 조선일보 주말섹션, 소설가 김훈, "어떻게 죽을 것인가", 2019.06.15.

 

G : 김훈 작가 작업실의 장서나 집기가 쓰레기일 리는 만무하고 사후에 다른 사람이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물건은 당신이 미리미리 정리한다는 말씀이겠지요. 

P : 그렇지요. '중고나라'에서도 살 사람이 없을 정도의 경제적 가치가 떨어지거나 정서적으로 소중한 가치가 없는 것은 다 쓰레기라는 아주 실용주의적 발상이신 거죠. 작년에 방문했던 하동의 박경리 기념관에서 고인이 쓰던 돋보기, 책상머리의 국어사전은 아주 귀중한 유물로 모셔져 있었어요. 《칼의 노래》, 《남한산성》 같은 베스트셀러 화제작을 발표한 김훈 작가는 나중에 기념관을 세워드릴 만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자전거 여행 1,2》 등 수많은 작품을 남기셨기에 낡은 등산화도 귀중한 기념물이 될 수 있는데 불쌍하다 하면서도 내다 버리셨더군요.

 

G : 오늘 《비틀즈》 책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포인트는 무엇인가요?

P : 비틀즈 밴드의 실력이 크게 늘어난 게 함부르크 시절이라는 것은 지난 번 《아웃라이어》에서 자세히 말씀드렸으니 여기서는 처음 밴드를 결성하고 '딱정벌레'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경위, 그리고 폴 메카트니의 창작의 원천에 대해 해당 구절을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리버풀에서 학교에 다니면서 어울려 기타를 치고 놀던] 그들은 경연대회라면, 설령 아주 엉망인 대회라 해도 언제나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 시대 최고의 경연대회 전문가가 리버풀에 온다는 소식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버풀 에코(Liverpool Echo)에 실린 광고에서는 '스타 제조기 캐럴 레비스' 가 스타 찾기(Caroll Levis Discoveries)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방문한다고 떠들어 댔다. 촬영 예정지는 맨체스터였지만, 리버풀 시민들 중에 인재가 있는지 찾아보기 위한 오디션이 리버풀의 엠파이어 극장 에서도 열렸다. 리버풀에 사는 10대들의 절반 정도가 그 오디션에 참가했지만, 마침내 결선을 통과 하여 맨체스터의 본 프로그램 촬영에 참가하게 된 소년들은 바로 존 레논, 폴 매카트니와 조지 해리슨이었다.
오디션 신청서에 적어낸  '조니 앤 문독스(Johnny and the  Moondogs)' 앞으로 보내온 합격통지서를 받고 그들은 뛸듯이 기뻤다. 리더가 꼭 있어야 한다면 당연히 존이 맡아야 했다. 
그들은 맨체스터에서 연주를 했고 제법 환호를 받았다. 캐럴 레비스 쇼에서는 보통 마지막에 그룹 마다 다시 무대에 나와서 노래 중 몇 마디를 연주하고, 관중들의 이 마지막 박수 소리로 우승자를 결정했다. 하지만 가난한 리버풀 소년들로 구성된 조니 앤 문독스는 시간이 늦으면 리버풀까지 돌아 갈 교통이 없었기 때문에 녹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촬영 시간이 늦어져서 리버풀 행 마지막 기차를 놓칠 판이었다. 맨체스터의 호텔에서 묵을 돈은 물론 없었다. 마지막 박수의 시간 이 되었을 때는 조니 앤 문독스가 이미 떠난 뒤였다. 당연히 그들은 우승하지 못했다. 주목을 받거나 주의를 끌거나 방송 관계자들에게 격려를 받지도 못했다. 존, 폴, 조지는 무척 실망했다. 진짜 가수가 될 수 있는 첫번째 기회가 손에 닿을 만큼 다가왔다가 멀어져 버렸던 것이다.
  121쪽.

 

[비록 출발은 존 레논의 고등학교 이름을 딴 쿼리멘(Quarrymen) 밴드였지만] 1959년 후반이 되자 그들은 진지하게 그룹의 이름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들은 캐럴 레비스 오디션을 막 치르고 또 다른 중요한 오디션을 치를 참이었다.
비틀즈라는 이름이 나온 것이 이 무렵이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없지만, 폴과 조지의 기억으로는 존이 어느 날 그 이름을 말했다고 한다. 그들은 미국의 로큰롤 밴드인 '바디 홀리 앤 크리케츠'의 팬으로 그 음악과 밴드의 이름을 모두 좋아했다. 크리케츠(crickets)라는 이름이 가지 의미가 있어, 하나는 순수하게 단어 그 자체의 뜻으로 '귀뚜라미' 이지만, 다른 하나는 미국인이라면 잘 알 수 없는 '영국의 전통적 운동경기'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 역시 그룹 이름을 크리케츠 같은 것으로 하고 싶었다.
크리케츠의 이름을 생각하면서 존은 비슷하게 장난칠 만한 벌레 이름을 이것저것 떠올렸다. 어린아이처럼 공책 가득 그런 말장난을 채워 넣곤 했다.

"딱정벌레(beetles)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나는 그 철자를 BEATles로 바꾸어 써보았다. 비트(beat) 음악을 연상시키는 말장난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이름에 얽힌 단순한 진실이었지만, 비틀즈는 누군가 그들에게 이름에 물어볼 때마다 엉뚱한 거짓말을 지어 대곤 했다. 가장 자주 해주던 이야기는 마법의 양탄자를 탄 남자가 창문에 나타나서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마침내 그들 모두 좋아하는 이름을 찾아내긴 했지만 그들이 고정적으로 비틀즈라는 이름을 쓰게 되기까지는 그 뒤로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어본 친구가 있었다. 비틀즈라고 대답하자 그 친구는 그룹 이름이란 길어야 한다고 말했다.

"키다리 존과 실버 비틀즈(Long John and the Silver Beatles)는 어때?"

당시에는 그냥 넘겨 버렸지만, 결국 중요한 오디션에서 이름을 묻자 그들은 '실버 비틀즈'라는 이름을 댔다. 이 이름은 1959년 남은 기간 동안 그들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126쪽

 

그들이 참가하기로 한 중요한 오디션의 주최자는 그 유명한 래리 판스였다. 리버풀에서 열린 오디션은 영국의 로큰롤 가수 빌리 퓨어리의 반주를 맡을 그룹을 선발하려는 것이었다. 래리 판스의 마음에 든 그 그룹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실버 비틀즈에게 2주간의 스코틀랜드 연주 여행을 제안했는데, 래리 판스가 거느리고 있던 가수들 중에서 가장 신인이자 가장 유명하지 않았던 조니 젠틀의 반주를 맡으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그들의 연주 여행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실버 비틀즈는 아주 단역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전문 음악인으로서 처음으로 맺은 제대로 된 계약이자 처음으로 떠나는 진짜연주 여행이었다. 아무리 짧고 아무리 2류 대접을 받아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127쪽

 

G : 세계적인 밴드도 처음 시작은 아주 초라했군요. 역사에 길이 남을 Beatles라는 이름이 말장난하듯 지어졌다니 놀랍네요.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도 학교 공부보다도 다른 연주자들을 흉내내며 기타를 연습했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오디션에 참여하는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P : 비틀즈 그룹이 함부르크에서 보낸 3년이 그들에게 세계적인 스타가 되기 위한 단련기간이었다고 하는데 리버풀에서 함부르크로 가게 된 것도 우연 같은 필연의 연속이었어요. 그 당시 조지 해리슨은 미성년자여서 독일 경찰의 단속에 걸려 영국으로 추방되기도 했습니다. 그때까지 임시방편으로 잠깐씩 연주하던 드러머를 1962년 리버풀의 다른 밴드에서 드럼 치던 링고 스타를 영입함으로 비로소 완전체가 되었지요.

 

리버풀에서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던 앨런 윌리엄스는 다른 사람들이 그룹을 찾을 때 또는 그룹들이 일거리를 찾을 때 에이전트 겸 매니저 역할을 맡기도 했다. 비틀즈에게 래리 판스 오디션을 받게 해준 것도 그였다. 스코틀랜드 연주 여행에서 비틀즈가 받을 돈은 해리스가 지불했지만 그들을 연주 여행에 나설 수 있게 해주었던 앨런 윌리엄스를 통해서 비틀즈에게 전해졌다.
리버풀의 작은 나이트클럽 소유주인 앨런 윌리엄스가 함부르크로 그룹들을 보내는 일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조금 더 복잡했다. 어떤 독일인 선원이 리버풀의 한 클럽에서 서인도제도의 철제 타악기 스틸 밴드 연주를 듣고 함부르크에 가서 소문을 낸 것이 발단이었다. 함부르크 나이트클럽에서 그 밴드와 계약을 하게 되었고, 그들과 동행했던 앨런 윌리엄스가 리버풀의 다른 그룹도 여기저기 소개했다. 심지어 모든 영국 그룹이 리버풀 출신이라고 과장을섞어 떠벌였다.

함부르크의 클럽 관계자가 영국 런던을 방문했을 때 리버풀 그룹들이 조금도 유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영국 록의 중심지였던 소호의 클럽에서 우연찮게도 앨런 윌리엄스를 마주치게 되었다. 앨런 윌리엄스는 어느 리버풀 그룹을 데리고 일자리를 구하러 온 참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함부르크로 보내게 되었고 그들에 대한 반응이 아주 좋아서 다른 리버풀 그룹이 함부르크에 속속 진출하게 된 것이다.
비틀즈는 함부르크에서 원하는 5인조 그룹은 아니었으나 비틀즈에는 빠진 드러머를 급구해 함부르크로 떠날 수 있었다. 1960년 다섯 명의 비틀즈는 앨런 윌리엄스의 인솔하에 미니 밴을 타고 서섹스의 하리치와 네덜란드의 후크를 거쳐 함부르크에 도착했다.
  135, 141쪽

 

* 런던의 Abbey Road 횡단보도를 건너는 비틀즈 멤버들

G : 그로부터 몇 년 후 비틀즈의 등장은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꿔놓았다고 할 정도로 영국 뿐만 아니라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하지요. 1964년 더벅머리의 청년 넷이서 여러 히트곡을 들고 미국 무대에 등장했을 때 British Invasion (영국인의 침략)이라고 하는 등 미국 음악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까 말씀하신 비틀즈 음악 창작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P : 비틀즈의 초창기인 1965년에 발표된 불후의 명곡 "Yesterday"를 예로 들어 말씀드리지요. 이 곡은 맨처음 폴 매카트니가 작사ㆍ작곡을 하였고 존 레논과 힘을 합쳐 완성을 하였다고 해요. 폴이 어쿠스틱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는데 현악4중주가 반주를 맡고 있는 아주 서정적인 멜로디예요. 가사는 남자가 무슨 말을 잘못해서 연인이 아무 말 없이 떠나버렸고, 사이가 좋았던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내용이지요. 그런데 이 노래가 20세기 불후의 명곡으로 평가되며 수많은 가수들이 불렀고 클래식 음악으로도 편곡이 되어 연주되고 있습니다.

 

G : 네, 저도 이 노래를 아주 좋아합니다. 중학생 사춘기 시절 외어서 불렀던 팝송 중의 하나였죠.

P :  이 곡이 세대 불문하고 많은 사람이 좋아하게 된 것은 우선 가사가 실연의 아픔을 안타까워하는 점도 있지만 "Yesterday"에는 과거의 추억 뿐만 아니라 예전의 인간관계까지 모두 포함하는 다의적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폴 메카트니는 어떻게 이 곡을 만들게 되었는지, 또 이 곡이 대박을 터뜨릴 줄 알았는지 Wikipedia에 소상히 밝혀놓았기에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폴 매카트니는 어느 날 밤 당시 여자친구였던 제인 애셔(Jane Asher)와 그녀의 가족이 살고 있던 윔폴 스트리트의 자신의 방에서 꿈속에서 전체 멜로디를 작곡했다고 한다. 잠에서 깨자마자 그는 이 곡을 잊지 않기 위해 서둘러 피아노로 가서 연주했다. 꿈속에서 악상을 얻었다니! 너무 쉽게 쓰여져서 처음에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의 작품을 표절한 게 아닌가 걱정할 정도였다. 한 달 동안 음악 업계 사람들을 돌아다니며 이 곡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었다. 경찰서에 유실물 습득한 것을 제출했다가 몇 주 후에도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습득자 것이 되는 모양새가 되었다.

멜로디를 베끼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자 매카트니는 멜로디에 맞는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 레논과 매카트니가 그랬던 것처럼, "스크램블 에그"(작업용 가사는 "Scrambled eggs/Oh my baby how I love your legs/Not as much as I love scrambled eggs")라는 제목의 대용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부르곤 했다.

 

* 폴 매카트니가 수영장에 뛰어드는 장면. 촬영: 린다 매카트니, 서울 대림미술관  2014.12.


"Help!" 앨범 자켓을 촬영하던 중 스튜디오 한 켠에 피아노가 있었고 매카트니는 틈틈이 노래를 손질했다. 카메라 감독이 작업에 방해가 된다며 매카트니에게 작곡을 집어치우든가 피아노를 치워버리겠다고 말했다. 다른 비틀즈 멤버들의 인내심도 거의 한계에 도달했다. 조지 해리슨는 이렇게 말했다. "맙소사, 그는 항상 그 노래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우리는 베토벤이 나타난 줄 알았어요!"

매카트니는 1964년 비틀즈의 프랑스 투어 중에 이 곡을 작곡했다고 말했는데 발표는 1965년 여름에야 이루어졌다. 그 사이에 비틀즈는 두 장의 앨범을 발매했으므로 A Hard Day's NightBeatles for Sale 앨범에 이 곡이 들어갈 수 있었다. 매카트니가 자세히 설명한 적은 없지만, 이 곡의 편곡에 대한 매카트니와 프로듀서와의 의견이 달랐거나 또는 다른 비틀즈 멤버가 다른 곳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빠졌을지 모른다.

 

존 레논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 곡은 완성하기까지 몇 달 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녹음을 위해, 또는 곡을 쓰기 위해 모일 때마다 이 곡에 대해 논의를 했다. 폴이 거의 대부분을 썼지만 아직 마땅한 제목을 찾지 못했다. 농담처럼 '스크램블 에그'라고 부르면서 이 제목이 거의 굳어지는 듯 했다. 한 단어로 된 제목이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차에 어느 날 아침 폴이 일어나 이 노래 가사와 제목을 확정지었다. 그 일로 우리가 너무 많이 웃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미안하기도 했다."

매카트니는 1965년 5월 포르투갈 여행 중에 가사에 대한 돌파구가 열렸다고 말했다.
"멜로디를 흥얼거리다가 갑자기 한 단어로 시작하는 구절이 떠올랐다. 'da-da da, yes-ter-day, sud-den-ly, fun-il-ly, mer-il-ly and Yes-ter-day' 이거 괜찮네...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All my troubles seemed so far away', 'say, nay, today, away, play, stay' 등 a 운율이 좋았고 쉽게 맞아떨어질 것 같았다. Sud-den-ly, 그리고 b와 e 같이 쉬운 운율, me, tree, flea, we 등 단어에 주의를 기울였다."

1965년 5월 27일 매카트니가 그의 여자친구 애셔와 함께 리스본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숙소에서 어쿠스틱 기타를 빌려 "Yesterday" 작업을 마쳤다. 이 노래는 비틀즈가 녹음을 하기 전에 다른 유명 가수에게 데모로 들려주었는데 그는 "너무 부드럽다"고 생각하여 거절했다. 1967년 3월 인터뷰에서 매카트니는 레논이 "Scrambled eggs"를 대체할 "Yesterday"라는 단어를 생각해냈다고 말했다.

 

G : 그럼 이 노래 가사를 들어보지 않을 수 없네요. 그 때문에 이 곡의 뮤직 비디오를 보면 대부분 가사가 자막으로 붙어 있었군요. 각운(脚韻, rhyme)을 맞추려고도 했던 것 같아요. 

P : 그런데 우연의 일치라고나 할까, 매카트니의 삶이 노래 가사와 똑같이 되어버렸어요. 그는 이 곡을 쓰는 계기를 만들어준 제인 애셔와 약혼까지 했으나 이 곡이 히트한 뒤 매카트니를 뒤쫓아다니던 미국 사생팬과 바람을 피우다 1967년 파혼을 당하고 말았지요. 매카트니가 LSD 약을 하고, 존 레논과 함께 초월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에 심취하는 등 성격과 라이프스타일의 차이가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고 해요. 가사에도 나오지만 매카트니는 '숨을 곳'을 찾고 있었나 봅니다.  

 

Yesterday, all my troubles seemed so far away
Now it looks as though they're here to stay
Oh, I believe in yesterday.

예전엔 고통이란 나와 상관 없는 건 줄 알았지
하지만 이젠 온갖 고통이 여기 내게 모여든 것 같아
아, 그 때가 좋았는데.

Suddenly, I'm not half the man I used to be,
There's a shadow hanging over me.
Oh, yesterday came suddenly.

갑자기 예전의 나의 반도 못 미치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나에겐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갑자기 지난날의 기억이 밀려왔어.

Why she had to go
I don't know she wouldn't say.
I said something wrong, now I long for yesterday.

그녀는 왜 떠나야 했을까?
알 수가 없어 그녀는 말하려 하지 않았지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나봐, 이제 지난날이 그리워.

Yesterday, love was such an easy game to play.
Now I need a place to hide away.
Oh, I believe in yesterday.

예전엔 사랑이 쉬운 게임 같았는데…
이제 난 숨을 곳이 필요해
그 때가 좋았지.

 

G : "Yesterday"가 우리에겐 쉽고 편하게 들리지만 이 곡을 만든 사람은 엄청난 창작과 현실의 고통이 있었네요.

P : 그러게요. 하지만 이 곡은 그래미 명예의 전당(Grammy Hall of Fame 1997)에도 올랐고, 폴 메카트니가 록 뮤직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장르의 음악에 능통한. 크리에이티브한 음악가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