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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Day] 간과했던 성공요인: 아웃라이어

Onepark 2023. 7. 13. 08:00

G : 장마철에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요즘 비가 자주 내리는데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는 것도 아주 좋겠어요.

P : 네, 7월의 Book's Day에는 무슨 책을 소개하는 게 좋을까 궁리하다가 제 서가를 훑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화제가 되었던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에 눈길이 갔어요.

 

G : 네, 저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가 어느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1만 시간, 즉 하루 3시간 이상 10년은 꾸준히 해야 한다는 법칙을 내놓아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지요.

P : 그렇습니다. 이번에 정부가 한국 나이를 없애고 만 나이로 통일한 것 잘 아실 거예요. 저는 《아웃라이어》 첫머리에 나오는 캐나다의 스키 선수 중에는 압도적으로 1, 2월 생이 많다는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습니다.

 

G :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엄마 뱃속에서 한 살 먹고 또 설날에 떡국을 먹으면 한 살 더 먹고 지혜가 그만큼 늘어난다고 보지 않았나요?

P : 저 역시 우리 아이들 생일이 1월, 2월이어서 학교 다닐 때 힘들지 않을까 우려했었지요. 결국 둘  대학 들어갈 때 재수를 하였지만요.

 

캐나다에서 생일이 빠른 아이들은 하키를 잘하게끔 태어난 것일까?
이러한 현상에 대한 설명은 간단하다. 점성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1년의 첫 세 달이 어떤 마법적인 힘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캐나다에서 1월 1일을 기준으로 나이를 헤아리고 그에 맞춰 하키 클래스를 짜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월 2일에 열 살이 되는 소년은 그해 말까지 만으로 열 살이 되지 못한 소년과 함께 하키를 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사춘기 이전에는 열두 달이라는 기간이 엄청난 발달의 차이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때 몇 달간 더 숙달될 수 있는 기회를 누린 소년들이 더 크고 보다 재능이 있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후보군으로 선별된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지역 리그에 남아 고작 20여 경기를 뛰는 아이들과 달리 보다 훌륭한 코치, 뛰어난 팀 동료와 함께 한 시즌에 75경기를 소화하고 두세 배로 연습하게 된다. 그밖에 다른 기회도 폭넓게 주어진다. 물론 출발점을 놓고 보면 후보군의 강점은 선천적이라기보다 그저 몇 개월 더 일찍 태어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창 성장기에 있는 소년들은 홀륭한 코치와 강도 높은 연습 덕분에 정말로 뛰어난 선수로 거듭나게 된다. 말하자면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Robert Merton)이 말한 '자기실현적 예언'의 가장 완벽한 예시라고 할 만하다. 캐나다인은 9~10세 소년 중 누가 최고의 하키선수인지에 대해 잘못된 정의를 내린다. 그들은 그저 해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소년을 선별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 소년들을 '올스타'로 대접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처음의 잘못된 정의가 옳은 것처럼 보이게 한다.

혹자는 연령대를 기준으로 사람을 선발하고 분류하고 차별적으로 대하게 되면, 특정한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이 집중적으로 혜택을 누리는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른 나이에 누가 잘하고 누가 그렇지 못한가를 결정하면, 다시 말해 재능의 유무를 가리고 재능 있는 아이들에게 보다 나은 경험을 하게 해주면 특정한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이 이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38-40쪽

 

G : 남보다 유리한 고지에 서 있다가 주어진 기회를 선점(先占)하여 성공하는 것은 이 세상에 흔한 일 아닙니까? 서울 강남의 어린이들이 본래 머리가 뛰어나서 좋은 대학교에 많이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가정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니 집에서 가까운 학원에도 다니고 그러한 경쟁적인 분위기 속에서 공부를 하게 되므로 이른바 SKY 대학에 많이 들어가는 것 아니겠어요!  

P : 네, 맞습니다. 이 책 저자의 관찰과 분석이 예리한 것은 바이올리니스, 비틀즈 사례 연구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타고난 재능이라는 게 있을까?"
당연히 대다수가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1월에 태어난 모든 하키 선수가 프로 레벨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 중 오직 타고난 재능이 있는 이들만 그렇게 된다. 성취 공식은 '재능 더하기 연습'이다. 문제는 심리학자들이 재능 있는 이들의 경력을 관찰하면 할수록 타고난 재능의 역할은 줄어들고 연습이 하는 역할은 커진다는 데 있다.

두명의 동료와 함께 베를린 음악 아카데미 학생들을 연구한 심리학자 K. 안테르스 에릭손(K. Anders Ericsson)은 1990년대 초에 <재능 논쟁의 사례 A> 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우선 그들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려는 학생을 학업성과와 기량에 따라 세 그룹으로 나누어 그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집어든 순간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해왔는가?"

 

세 그룹에 속하는 모든 학생은 대략 다섯 살 전후에 연주를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초기 몇 년간은 대략 일주일에 두세 시간씩 비슷하게 연습을 했지만, 여덟 살이 될 무렵부터 변화가 나타났다. 자기 반에서 가장 잘하는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연습을 더 했던 것이다. 아홉 살 때는 일주일에 여섯 시간, 열 살 때는 열두 시간, 열네 살 때는 열여섯 시간으로 연습시간은 점점 길어졌고, 스무 살이 되면 자신의 실력을 갈고닦겠다는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일주일에 서른 시간을 연습했다. 결과적으로 스무 살이 되면 엘리트 학생은 모두 1만 시간을 연습하게 된다. 반면 그냥 잘하는 학생은 모두 8,000시간, 미래의 음악교사는 4,000시간을 연습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와 프로 피아니스트들을 비교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아마추어들은 어릴 때 일주일에 세 시간 이상 연습하지 않았고, 그 결과 스무 살이 되면 모두 2,000시간 정도 연습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프로는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매년 연습시간을 꾸준히 늘려 바이올리니스트와 마찬가지로 결국 1만 시간에 도달했다.
에릭손의 연구에서 무릎을 치게 되는 부분은 그들이 '타고난 천재', 즉 다른 사람이 시간을 쪼개 연습하고 있을 때 노력하지 않고 정상에 올라간 연주자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더불어 그들은 미완의 대기(大器), 다시 말해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지만 정상의 자리에 오르기엔 뭔가가 부족한 사람도 발견하지 못했다.

복잡한 업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탁월성을 얻으려면, 최소한의 연습량을 확보하는 것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은 수많은 연구를 통해 거듭 확인되고 있다. 사실 연구자들은 진정한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매직넘버에 수긍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1만 시간이다.
신경과학자인 다니엘 레비틴(Daniel Levitin)은 어느 분야에서든 세계 수준의 전문가. 마스터가 되려면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작곡가, 야구선수, 소설가, 스케이트선수, 피아니스트, 체스선수, 숙달된 범죄자, 그밖에 어떤 분야에서든 연구를 거듭하면 할수록 이 수치를 확인할 수 있다. 1만 시간은 대략 하루 세 시간. 일주일에 스무 시간씩 10년간 연습한 것과 같다."
  54-56쪽

 

* 1960년대 세계적 인기와 명성을 얻기 시작한 초창기 시절의 The Beatles

1960년 비틀즈가 그저 열심히 노력하는 고등학교 록 밴드에 불과할 때 그들은 독일의 함부르크 클럽 사장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당시 함부르크에는 록앤롤 클럽이 없었다. 전부 논스톱으로 붉은 조명 아래 쇼를 하는 스트립 클럽이었다. 그곳에 브루노라는 클럽 사장이 있었는데 그는 리버풀 출신의 밴드를 불러 매시간 많은 사람이 들이닥치고 또한 빠져나가는 사이에 사람들 발걸음을 붙잡아놓는 연주를 하게 했다. 

그때 리버풀에서 온 록밴드 비틀즈는 브루노뿐 아니라 다른 클럽 사장들과도 연줄을 맺게 되었다. 

 

함부르크에서는 과연 어떤 특별한 일이 있었을까? 급료가 제대로 나온 것도 아니고 음향이 훌륭했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관객은 귀를 기울여 들어주었을까? 그렇지도 않았다. 특별한 것은 단지 그들이 엄청난 시간을 연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비틀즈의 연주 실력은 점점 좋아졌고 자신감을 얻었다. 날이면 날마다 밤새도록 연주를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함부르크의 스트립 클럽에서 더욱 열심히 노력했고 노래에 마음과 영혼을 담으려 애썼다. 리버풀에서는 고작 한 시간만 연주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장 잘하는 곡만 반복해서 연주했다. 하지만 함부르크에서는 여덟 시간씩 연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곡들과 새로운 연주방법을 시도할 수 있었다.

여덟 시간을 연주했다니 그 연습량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당시 비틀즈는 함부르크 클럽에서 일주일에 7일 밤을 연주했다.

비틀즈는 1960년에서 1962년 말에 걸쳐 다섯 차례나 함부르크에 다녀왔다. 처음 방문했을 때 그들은 106일 밤을 매일 네 시간 이상 연주했다. 두 번째 여행에서는 92번이나 무대에 올랐고 세 번째에는 48번을 무대에 올라 172시간이나 연주했다. 마지막 두 번의 함부르크 무대 공연은 1962년 11월과 12월에 있었는데, 그때 90시간을 더 연주했다. 모두 합하면 비틀즈는 1년 반 넘는 기간에 270일 밤을 연주한 셈이다.
그들이 처음으로 성공의 대박을 터뜨린 1964년까지 그들은 모두 1,200시간을 공연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것은 얼마나 특별한 경험일까? 오늘날 수많은 밴드는 전체 경력을 통틀어도 그만큼의 연주를 하지 않는다. 함부르크의 용광로는 비틀를 다른 밴드와 다르게 만들어 낸 요소 중 하나다. 함부르크에서 돌아오자 그들은 차별화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65-68쪽

 

G : 이 책의 부제는 "성공의 기회를 발견한 사람들"인데요, 출간 당시부터 같은 이민자래도 심한 차별을 받았던 동유럽의 유태인들이 남유럽의 이태리 사람들보다 미국 사회에서 단기간에 주류 사회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 화제가 되었었지요. 

P : 네, 그렇습니다. 성공한 이태리 이민자들이 기껏해야 리틀 이탤리에서 레스토랑을 차린 반면 유태계 이민자들은 뉴욕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의류 산업을 주름잡았습니다. 한국 이민자들은 성공을 해도 플러싱에서 그로서리와 세탁소를 운영하는 데 그쳤지만요. 빈주먹 맨손으로 미국 땅을 밟은 유태인들은 초기 정착 단계에선 고생이 막심했지만 이민 2세대에서 미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3세대에선 변호사, 의사 등 전문직으로 진출하는 성공 신화를 썼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 미국에 건너온 유태인 이민자는 다른 이민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아일랜드나 이탈리아계 이민자는 유럽의 낙후된 지역의 농노나 소작농이 대부분이었지만 유태인은 그렇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수세기 동안 유태인의 토지 소유가 금지되었고 이들은 게토(Ghetto: 중세 이후 유럽에서 유태인을 강제로 격리하기 위해 설정한 유태인 거주지역)에서 교역과 특정 분야에 종사했다. 1930년대까지 혹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엘리스(이전에 이민검역소가 있던 뉴욕항의 작은 섬)을 통과한 동유럽 출신 유태인 이민자 중 70퍼센트는 특별한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작은 상점이나 보석상을 운영해온 그들은 책을 제본하거나 시계를 수리하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유태인이 의류사업에 뛰어났다. 그들 중에는 양복장이, 드레스 기술자. 모자 제작자가 많았다. 

의류가 귀한 시대에 의류업의 숙달된 기술자들, 유럽 곳곳에 퍼져 있는 의류 도매상들, 매년 산업 중심지를 돌며 물건을 사오는 상인들은 상업의 왕자들이었다. . . . 뉴욕의 레스터 거리에서 갓 이민 온 루이스가 구상해낸 사업 아이디어는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폴란드 잡화점에서 옷을 판매하던 베테랑이었고 그의 아내는 숙달된 의류 제작자였다. 이들 부부가 작은 아파트에서 사업을 시작할 무렵 수천 명의 다른 유대인 이민자 역시 옷을 만들고 양복을 재단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흐름은 1900년대에 의류산업이 동유럽계 이민자들의 손아귀로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루이스의 표현대로 유태인들은 "그들을 환영해주는 신세계에 깊이 빠져들어 자신들이 할 줄 아는 일을 미친 듯이 했다."

사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의류 매매는 뉴욕시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크고 활발한 산업이었다. 뉴욕에서는 그 어느 곳보다 많은 사람이 옷을 만들었다. 재봉틀 하나만 있으면 되니 진입장벽도 낮았다. 세계 어느 도시에서보다 많은 옷이 생산되고 있었다.

타임스스퀘어(Times Square)에서 고작 12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10~15층짜리의 거대한 공장 건물로부터 시작해 소호와 트라이베카의 주물공장까지 이어지는 맨해튼 브로드웨이의 아래쪽 절반은 코트나 모자, 란제리 제작자의 작업실이 있는 큰 공장이었다. 1890년 무렵에 의류 제작, 재봉 기술, 폴란드 잡화점에서의 의류판매 경험을 가지고 뉴욕시에 도착한다는 것은 대단히 특별한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그것은 빌게이츠 같은 컴퓨터 영재들이 1만 시간의 프로그래밍 훈련을 쌓고 1986년에 실리콘밸리에 입성하는 것에 비견할 만한 일이다.
유태인 이민자들은 완벽한 시간에 완벽한 기술을 가지고 신세계로 왔다. 그들은 정말 열심히 일했다. 헌신적이었고 절약했으며 현명하게 투자를 했다. 당시 의류산업은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었고, 한마디로 그들의 기술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경제 환경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수천 명의 유태인에게 황금 같은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자녀와 손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의류업계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은 그들의 자손에게 교훈을 주었고 그것은 그들이 세상을 앞서나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 . . . . 

같은 시기에 뉴욕에 도착한 아일랜드와 이탈리아계 이민자에게는 이러한 장점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도시 경제에 적합한 기술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건설 인부, 가정부, 일당벌이 등의 노동을 하러 나갔다. 하지만 그 일을 30년간 할지라도 시장조사나 대량생산, 대중문화 의 맥락을 짚어내는 법, 세상을 움직이는 양키들과 협상하는 법을 배올 수는 없다.
1900년부터 1920년대 말까지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과일, 채소 재배자의 밭에서 일한 멕시코인의 운명을 생각해보면 이 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멕시코에서 농노처럼 일하던 그들은 캘리포니아에 와서도 그저 농노처럼 일했다.
  170-173, 177-178쪽

 

* 맨해튼 가먼트 지구(7th Ave+37th Str)의 재봉틀 돌리는 남자 조각상

G : 동유럽에서 미국에 건너온 유태계 이민자들이 의류업 같은 도시산업에 적합한 기술을 갖고 있었기에 그만큼 빨리 돈을 벌 수 있었다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자손은 어떻게 유태인 차별이 심한 전문직 사회에서 성공의 기회를 잡고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을까요?

P : 이 책에서는 대표적인 인물로 하버드 로스쿨을 나온 조셉 플롬(Joseph Flom, 1923-2011) 변호사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경희대 법전원의 황남석 교수가 번역한 《로펌 스캐든》(2011)에서 집중 소개한 바 있지요. 당시 주류 대형로펌들이 거들떠보지 않던 기업인수 등 회사소송에서 벌어지곤 했던 위임장 쟁탈전(Proxy war)에서 백전백승을 거두었던 전설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G : 아, 네~ M&A 할 때 타깃 캄퍼니 주식을 시가보다 비싸게 사주겠다는 공개매수 제의(TOB: take-over bid, tender offer)와 함께 주주총회를 앞두고 소액주주들의 위임장(proxy)을 반대편보다 더 많이 확보하려는 경쟁을 말하는 거죠? 우리나라에서도 대한항공 주총을 앞두고 한진칼, SM경영권 인수를 둘러싸고 하이브와 카카오의 표 대결이 화제가 되었었지요. 

P : 네, 조셉 플롬 변호사의 사례는 "개천에서 용 났다"는 단순한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기존 대형 로펌에서 맡으려 하지 않았던 적대적 M&A 분야에서 본의 아니게 20년간 내공을 쌓아온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산업과 법조계에 갑자기 지각변동이 일어나면서 그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던 것입니다. 말콤 글래드웰은 위의 《로펌 스캐든》과는 다른 'Outlier'의 관점에서 조셉 플롬을 조명하고 있어요. (여기서 [ ] 안의 내용은 원작과는 다르게 이 글의 문맥에 맞춰 일부 요약 변형한 것임을 밝힌다.)

 

[조셉 플롬은 동유럽 유태계 이민자인 부모에게서 1923년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여성용 드레스 공장에서 일하면서 박봉으로 많은 식구를 부양해야 했다.] 그는 뉴욕의 명문 타운센트 해리스 고등학교를 나오고도 2년제 시티 칼리지 야간학부를 고학을 하며 다녔다. 군 복무를 마치고 하버드 로스쿨에 지원했는데 용케 합격했다. 그가 말하기를 입학원서에 "여섯 살때부터 법조계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키웠고, 이를 위해 얼마나 끝내주는 인물이 될 것인지" 글로 써서 보냈다.

하버드 대학 친구들도 플롬은 수업시간에 노트 필기를 하지 않았으며 변호사처럼 생각하는 데 뛰어난 자질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했다.
플롬은 하버드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만 들어갈 수 있는 Harvard Law Review의 학생 편집위원이었음에도 로펌의 채용기간인 2학년 크리스마스 방학 시즌에 뉴욕 시내의 어느 로펌으로부터도 합격 통지를 받지 못했다. 플롬은 작달막한 데다 못생기고 무례했으며 뚱뚱했기에 대형 로펌의 면접관들마다 껄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채용기간이 끝났을 때 동기들 중에서 직장을 잡지 못한 두 명 중 하나였는데 교수 한 분이 그를 월스트리트 레먼 브러더스 빌딩 꼭대기에 있는 로펌 스캐든 압스에 추천해주었다.

 

그곳은 월스트리트의 대형 로펌에서 파트너로 승진하는 데 실패한 마셜 스캐든, 레슬리 압스, 그리고 팬암 항공사에서 일했던 존 슬레이트가 차린 이류 로펌이었다. 그들은 유력 클라이언트가 없는 로펌을 운영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에 설명하였고, 나중엔 플롬에게 약속한 연봉을 채워주기 위해 카드론 대출을 받기까지 했다. 플롬은 그곳에서 어떤 법을 전문이라고 할 것 없이 의뢰가 들어오면 무조건 그 사건을 맡아서 처리하는 식으로 일했다.
그 결과 로펌 스캐든은 눈덩이 구르듯 성장하기 시작했다. 고용 변호사가 100명이 되더니 곧이어 300명으로 늘었다. 변호사가 300명이 되었을 때 파트너 중 한 명이 스캐든 압스가 지나치게 비대해져 더 이상 성장하기가 어렵고, 수많은 고용 변호사를 승진시키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번도 야심을 잃어본 적이 없던 플롬은 "우리는 곧 1,000명이 될 겁니다"고 대답했다.
오늘날 스캐든 압스는 2,000여 명의 변호사와 전 세계에 거미줄처럼 퍼진 23개의 사무실을 자랑하며, 한 해에 1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다. 한마디로 세계적인 로펌으로 성장한 것이다.
  140-143쪽

 

G : 사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미국 사회에서 유태인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것은 사실이지요. 그렇지만 일단 소수의 성공한 전문가 그룹이 교두보를 확보하니 그들 특유의 '밀어주고 끌어주는 연대의식'과 결속력으로 법조계는 물론 언론과 연예계 여러 분야에서 무시 못할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 아닙니까?

P : 네, 맞습니다. 미국법을 공부할 때 판례를 통해 접하게 되는 루이스 브랜다이스, 벤자민 카도조 모두 유태계 법조인이지만 일단 그들이 연방대법원에 입성하면서 지금까지도 연방대법원에는 유태계 대법관 자리가 고정적으로 확보되었지요. 우리 재미교포들도 유념해야 할 대목입니다. 처음에 푸대접 받았던 조셉 플롬이 어떤 식으로 미국 법조계에서 입지를 굳혔는지는 우리도 반면교사를 삼을 수 있는 귀중한 교훈적인 사례입니다.

 

* 영화 <필라델피아>에서 AIDS 걸린 주인공을 몰아내려는 로펌의 파트너들

거지에서 부자로 거듭나는 성공담을 입에 올리는 이유는 외로운 영웅이 덮쳐오는 고난과 맞서 싸운다는 얘기가 우리를 매료시키기 때문이다. 조셉 플롬의 실제 인생 이야기는 신화화된 것보다 훨씬 흥미진진하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단점으로 여겨지는 것들 가령 가난한 의류업자의 아들이라는 것, 유태인이 심하게 차별을 당하던 무렵에 유태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대공황기에 성장했다는 것이 예기치 않게 장점으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조셉 플롬은 아웃라이어다. 하지만 그에게 적용된 [성공 방정식은 1950년대 이후의 미국 산업계 법조계의 동향을 반영하기에 다소 특이하다]고 말할 수 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뉴욕의 오래된 로펌들은 마치 개인 클럽처럼 운영되었다. 이들의 심장부는 언제나 맨해튼의 중심가 혹은 월스트리트 안팎에 바위처럼 서 있는 빌딩에 자리 잡았고, 최고의 로펌들은 아이비리그 학교 출신에 같은 교회를 다녔으며 롱아일랜드 해변의 마을에서 여름을 함께 보냈다. 이들은 주로 보수적인 회색 수트를 입었는데 컨트리클럽(골프)이나 칵테일파티를 즐길 때는 '화이트벅스(white bucks 白구두)'를 신었기 때문에 이들로 구성된 로펌을 '백구두(white shoe)'로 부르기도 했다. 특히 이들은 누구를 고용하는가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다.
"북유럽 혈통의 백인, 밝은 성격과 깔끔한 외모, 일류학교 졸업, 올바른 사회적 배경과 세상사에 대한 경험이 요구됨. 그리고 강철 같은 체력이 뒷받침될 것"으로 요약되었다. 직장을 구하려면 집안 배경이 탄탄하거나 충분한 능력, 충분한 인격적 요소, 아니면 이 모든 것을 갖춰야 한다. 만약 누군가가 이 요소 중 하나만 갖고 있다면 그는 직장을 구할 수 있다; 두 개를 갖고 있다면 그는 직장을 선택할 수 있다; 세 가지를 갖고 있다면 어디든 들어갈 수 있다는 식이었다.

 

그러므로 좋은 집안 배경과 종교, 사회적 계급, 그리고 일류 로스쿨 졸업장이 없으면 번화가의 유명 로펌이 아닌 작고 영세한 법률사무소에 들어가거나 아예 직접 사무실을 내 "들어오는 사건은 뭐든 한다"고 내걸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다. 대개 번화가의 로펌에서 맡지 않는 일이 그쪽으로 흘러들어 갔다. 이것은 끔찍하게 불평등한 구조였지만 현실이 그랬다. 그러나 아웃라이어에게는 그늘에 매장되는 것처럼 보이던 링이 오히려 황금 같은 기회로 이어지곤 했다.

월스트리트의 고색창연한 로펌들은 기업 변호사(corporate lawyer)에 가까웠고 그들은 자신이 가장 크고 선도적인 기업을 대변한다는 독특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대변한다'는 것은 기업이 주식과 채권을 발행할 때 그것이 연방정부의 규제에 걸리지 않게 법률과 조세관련 사무를 처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법정 변론을 하지 않았다. 소수의 로펌만 소송변호사(trial lawyer)나 사건 정리 관련 부서를 거느리고 있었다.
白구두 로펌에서는 . . . . "변호사는 민감한 일을 회의실에서 처리하지 법정에서 처리하지 않는다"는 말을 당연시하기도 했다. 특히 하버드 출신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조세 증권 관련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는 의식이 지배적이었다. 그것은 별개의 영역이었다. 소송은 저잣거리에서나 하는 것이지 잘나가는 사람들의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에는 기업들이 서로를 고소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백구두 로펌은 기업간의 적대적 합병과 관련된 업무에 관여하려 들지 않았다. 기업 사냥꾼(corporate raider)이나 사모펀드 회사(private equity fund)가 기업을 연이어 삼키는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1970년대까지도 서로 간의 주식매매계약 없이 한 기업이 다른 기업을 인수하는 것은 명예롭지 못한 일로 여겨졌다. 대부분의 월스트리트 전통 있는 로펌 들은 그런 종류의 거래에 손대지 않았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브롱크스와 브루클린 출신의 유태인 변호사 사무실에 들어오는 사건은 백구두 로펌에서 사양하는 것들이었다. 법정 소송이 그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모든 적대적 인수합병(hostile takeover)의 핵심을 구성하는 '위임장 쟁탈전'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한 투자자가 어떤 회사에 관심을 보인다고 해보자. 일단 그는 경영진이 경영자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했다고 주장하며 주주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가 회사의 경영진 문책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위임장을 써달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위임장 쟁탈전에서 투자자들이 고용할 수 있는 변호사는 조셉 플롬 같은 사람뿐이었다.

 

법률사 연구자 링컨 카플란은 자신의 저서 《로펌 스캐든》에서 인수합병의 초창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위임장 쟁탈전의 승리자는 소위 '스네이크피트(snake pit, 뱀의 굴이란 뜻이지만, 공식적으로는 회의실)'라고 불리는 곳에서 정해졌다. M&A 쌍방의 변호사는 '총회꾼'을 고용했는데 그들의 임무는 주주의 위임장을 받아온 사람들이 질문을 할 때 그것을 깔아뭉개거나 바람잡이 역할을 하는 일이었다. 그 행사는 대개 비공식적이었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으며 규칙을 무시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반대자들은 때로 티셔츠 차림으로 수박을 먹거나 스카치위스키를 나눠 마시는 지경이었기 때문에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이러한 탓에 단 한 번의 투표로 결과가 나오는 것은 그야말로 극히 드물었다.
변호사들은 때로 그들의 손아귀에 있는 총회꾼들의 지원을 받아 약속시간을 변경함으로써 선거 결과를 조작하기도 했다. 총회꾼이 변호사 양측으로부터 시가를 얻어 피웠기 때문에 변호사들은 상대방 측 위임장을 사겠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고(내가 가져가겠소!) 그 반대도 가능했다. 그 일이 입맛에 맞는 변호사는 스네이크피트에 들어가면 거의 날아다녔다. 흥미롭게도 위임장 쟁탈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변호사들 중 누구도 조셉 플롬과 싸워 이길 수 없었다.

플롬은 뚱뚱했고 개구리를 연상할 만큼 결코 잘 생긴 외모가 아니었으며 사회적인 품위와도 거리가 멀었다(그는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아무데서나 방귀를 뀌었고 대화 상대방의 얼굴에 시가 인기를 뿜어댔다). 하지만 일에서만큼은 남달랐다. 동료들은 물론 일부 상대편 변호사까지도 그에게 승리를 향한 불굴의 의지가 있었고 그 일에 완벽한 전문가임을 인정했다.
백구두 로펌들은 그들의 기업 고객을 향해 기업 사냥꾼이 달려들 때마다 플롬을 불렀다. 그런 사건에 직접 개입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그들은 스캐든 압스에 외주를 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초기에 플롬은 위임장 쟁탈전에서 특화된 면모를 보였다. 백구두 로펌에서는 거의 손대지 않았고, 그 일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위임장 쟁탈전과 관련된 업무가 들어오면 대책을 논의하는 회의실에서 기껏 한다는 말이 "플롬을 불러오라"는 것이었다. 백구두 로펌에서 그 일을 할 수 없었던 게 아니라 아예 하지 않았던 것이다.

 

* 월스트리트의 가장 강력한 로펌 스캐든의 파트너들. 맨 왼쪽이 조셉 플롬. 사진출처: Forbes

그런데 1970년대가 밝아오면서 백구두 로펌들이 맡았던 소송은 모두 옆으로 밀려났다. 연방정부의 규제완화(Deregulation)로 돈을 빌리는 것이 쉬워지고 시장이 국제화되면서 상황이 확 바뀌었던 것이다. 이때를 틈타 투기자들은 더욱 공격적으로 변해갔고 더불어 기업의 인수합병 건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조셉 플롬은 당시의 상황을 들려주었다.
"1980년대에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Business Roundtable: 미국 내 20대 주요 기업 경영자 모임)에 가서 적대적 인수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봤다면, 3분의 2는 "No"라고 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거의 반사적으로 "Yes"라고 대답하겠지만."

기업들은 경쟁자가 걸어오는 소송을 방어하기 위해, 아니 적대적 인수자들에게 완벽히 앙갚음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어야만 했다. 더불어 희생양을 찾아 헤매는 투자자들은 법률 전략에 대한 도움을 원했고 주주들에게는 공식적인 대표단이 필요해졌다. 이처럼 시장이 확대되면서 이 분야와 관련해 돌아가는 돈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말까지, 기업 M&A와 관련해 월스트리트에서 운용되는 금액은 매년 2,000퍼센트씩 늘어났으며 총액은 2,500억 달러에 달했다.
백구두 로펌들이 결코 하고 싶어 하지 않던 적대적 인수합병 분야가 확 떠오르면서 법조계에 갑자기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법조계에서 가장 중요해진 두 분야의 최고 전문가는 과연 누구였을까? 10~15년 전, 번화가의 로펌에서 직장을 얻지 못해 자기들끼리 사무실을 낸 2류 로펌들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백구두 로펌들은 게임이 한창 진행될 때까지 적대적 인수합병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들도 이 일을 해야 하는 거 아냐 하면서 끼어들기로 결정할 때까지 플롬의 독무대였다. 그 분야에서는 한편 명성을 얻으면 일감은 알아서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면 플롬의 사례가 PC산업의 기린아 빌게이츠의 이야기와 얼마나 유사한 한번 생각해보자.

그들은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겠다는 희망 따위도 없이 앞날이 뚜렷하지 않은 분야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분야에서 그야말로 붐이 일어났고, 그들은 이미 1만 시간의 훈련을 치른 다음이었다. 그들은 완벽하게 준비가 되어 있었다. 플롬 역시 같은 경험을 한 것이다.
그가 20년간 스캐든 압스에서 기술을 연마하는 동안 세상이 바뀌었고 그는 완벽히 준비된 상태였다. 그는 결코 역경과 맞서 싸워 이겨낸 것이 아니다. 대신 역경 속에서 출발했고 결국 그것이 기회가 되어 주었다.
조셉 플롬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똑똑한 변호사여서가 아니었다. 그 분야에서 수년간 일해 오던 중 갑자기 세상이 변했고 그가 연마해온 기술(craft) 가치가 대단히 높아진 탓이었다.
  145-155쪽

 

G : 우리 식으로 말하면 때를 잘 만났다고 해야 할까요?

P : 조셉 플롬 변호사가 무슨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선택지 없이 하게 된 일이었지요. 그럼에도 20년 동안 열심히 일했더니 업계에서 최고가 되어 있더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말하는 성공 방정식에서 재능과 끈기 말고 때를 기다리며 10년이고 20년이고 지속적으로 노력하여 보람을 찾았다(Slow and steady winds the race)고 할 수 있으며, 그는 진정 행운아였던 셈이죠.

 

G : 선생님은 이미 12년째 한국 법에 관한 온라인 영문 백과사전 KoreanLII를 운영하고 계시잖아요? 수록한 항목도 2,000개가 훌쩍 넘었으니 한 항목당 들인 시간을 감안하면 이미 1만 시간은 넘기신 셈 아닙니까?

P : 저는 Wikipedia처럼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의 힘을 빌리면 쉽게 만들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는 잘못을 저질렀어요. 동역자를 1명도 구할 수 없음을 알았다면 아예 시작조차 안 했겠지요. 이처럼 판단 미스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지만 2022년 말부터는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Bad news라면 챗GTP의 등장으로 인해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 같은, KoreanLII 존재의 가치와 필요성에 절망감을 느낀 적도 있어요. 지금은 어떤 '희망의 빛'이랄까 확신이 생겼습니다. 생성형 인공지능(GTP, generative AI)이 많아질수록 그들의 기계학습(machine learning)을 위해 절대 필요로 하는 영문으로 된 체계적인 한국법 데이터로 각광을 받게 될 거라는 믿음 말이죠. 요즘 방문자 수가 늘어난 것을 보면 분명히 Good news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에 동요됨 없이 계속 업데이트하는 등 다듬고는 있으나 KoreanLII나 그 안의 콘텐츠가 어떻게 변모되어 갈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