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 폭염과 무더위에 안녕하셨어요? 8월은 휴가철이라 쉬어도 되는데 오늘은 무슨 책을 들고 오셨나요? 피서지에서 읽기 좋은 책을 소개해 주실 건가요?
P : 오늘은 불어로 되어 있는 조그만 소책자 《Lafayette et l'Hermione》[1]입니다. 지난 4월 프랑스 일주 여행을 할 때 어느 고속도로 휴게소 토산품 코너에서 우연찮게 발견한 책인데 평소에 관심이 있는 인물이기에 바로 집어들었지요.
오늘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자기가 모르는 외국어로 된 책일지라도 관심있는 주제라면 휴대폰 앱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읽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드로이드 폰에 기본 어플로 설치되어 있는 구글 렌즈의 번역 기능을 이용하여 읽고 싶은 페이지를 사진으로 찍어서 '번역'을 탭하면 어느 나라 말이든지 한글로 즉석 번역이 되어 나옵니다.[2] 둘째는 라파예트의 인물됨이 참으로 흥미롭고, 미국과 프랑스 두 나라에서 모두 영웅(The Hero of the Two Worlds)으로 숭앙을 받는다는 점이지요. 그는 미국이 영국과 싸운 독립전쟁에 제3국인으로서 직접 참전하였고 프랑스 루이 16세 왕정이 미국을 지원하도록 동분서주하였으며, 프랑스의 2차례 혁명에도 직접 관여하였던 군인이자 정치가였습니다.
G : 아, 알겠습니다. 미국 독립전쟁을 다룬 영화를 보면 조지 워싱턴 사령관 옆에 서 있는 하늘색 군복을 입은 프랑스 젊은 장군이 나오는데 바로 그 사람 아닙니까?
P : 네, 맞습니다. 라파예트는 많은 유산을 물려받은 약관(弱冠)의 후작이었어요. 1775년 신대륙의 영국 식민지연합이 영국에 항거해서 독립전쟁(American Revolutionary War)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프랑스 국왕의 윤허를 받지 않은 채 자비로 배를 구입해 1777년 미 대륙으로 몰래 건너갑니다. 여기에는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는 젊은이다운 사상과 프리메이슨(Freemason)[3]으로서의 동지애가 그로 하여금 대서양을 건너게 하였다고 생각해요. 이 대목을 잘 요약 정리한 신문기사가 있어서 아래 인용하겠습니다.
라파예트 후작(Marquis de La Fayette, 본명은 Marie-Joseph Paul Yves Roch Gilbert du Motier de LaFayette, 1757-1834)는 몰래 배를 타고 스페인을 거쳐 아메리카로 갔다. 1777년 6월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상륙한 라파예트는 필라델피아로 가서 대륙회의 대표들에게 독립전쟁에 참전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군대 경력도 전혀 없는 프랑스 귀족을 바라보는 식민지 사람들 시선이 고왔을 리 없다. 대륙회의 반응은 냉담했지만 라파예트는 열정적으로 그들을 설득했다. 자유를 위해 싸우러 왔기 때문에 무보수로 헌신하겠다고, 대륙군의 병졸로라도 참전하고 싶다고, 대륙회의는 마음을 바꿔 라파예트를 대륙군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에게 보냈다.
1777년 7월 라파예트는 워싱턴을 만났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다(위의 그림과 아래의 동상). 워싱턴은 라파예트의 품격 있는 행동과 명예를 존중하는 태도를 좋아했다. 그는 풋내기 라파예트를 소장에 임명하고 참모로 기용했다. 파격적 대우였다. 여기에는 라파예트를 이용해 프랑스 내에서 미국 독립전쟁에 대한 우호적 여론을 조성하고. 나아가 프랑스의 참전을 끌어내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중 략>
프랑스는 오랜 전략적 고민 끝에 1778년 2월 미국과 동맹을 맺고 참전했다. 막대한 전쟁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현실적 주장을 숙적 영국에 복수해야 한다는 감정적 이유가 압도한 탓이다. 그러나 선발대로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프랑스 원군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았다. 1779년 말 라파예트는 프랑스로 달려갔다. 당대 최강을 자랑하는 영국군을 이기는 데 필요한 더 많은 병사, 더 많은 함대, 더 많은 돈을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라파예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명 인사가 돼 있었다. 왕의 명을 거역하고 떠났던 밀항자는 베르사유 궁정에서 대대적 환영을 받았다. 특히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직접 그를 만나 미국과 독립전쟁에 관한 얘기 듣기를 즐겼다. 라파예트 파견은 워싱턴에게 '신의 한 수'로 드러났다. 그가 프랑스 대신들을 설득하고 여론을 움직여 최정예 부대 6000명과 더 많은 함대의 원조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1780년 라파예트 후작이 타고 아메리카로 원정을 떠난 프랑스 프리게이트 함의 이름이 '헤르미온느(l'Hermione)' 호였다. 프랑스 원정군의 지휘는 로샹보 백작(Comte de Rochambeau, 1725~1807)이 맡았다. 라파예트와 로샹보는 워싱턴을 도와 영국군과 싸웠다. 특히 두 사람은 미국 독립전쟁 최후 전투인 요크타운 공성전에서 1781년 10월 워싱턴의 군대가 승리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송동훈 (문명 탐험가), "라파예트, 미국은 당신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을걸세", 조선일보, 2020. 6. 10.
G : 그 당시 라파예트가 아니었으면, 또 헤르미온느호가 정예군사와 보급물자를 싣고 출항하지 않았다면 미국의 독립전쟁이 더 오래 끌었거나 실패로 끝났을 가능성도 있었겠네요.
P : 네, 맞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수많은 도시와 거리, 공원에 그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워싱턴DC에서 관광객들과 시위대로 늘 소란스러운 백악관 앞과는 달리 그 뒷편에 있는 라파예트 공원은 미국의 건국이 얼마나 지난(至難)했나 생각해볼 수 있는 조용한 장소입니다.
라파예트는 역사적으로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역설적이게도 미국에서는 그가 인간적으로 숭배의 대상인 반면 프랑스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나폴레옹은 그를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재능이 없는 얼간이로 보았다. 프랑스 혁명 직후 국민의회 의원을 지낸 라파예트가 왕정에 반대하는 불온한 인물로 오스트리아에 장기간 구금되어 있었기에 새로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은 그의 석방을 위해 힘썼다. 혁명 당시 성직자로서 정치와 외교 무대에 활약했던 탈레랑(Talleyrand, 1754-1838)은 라파예트가 다른 사람이 강요하거나 조언하지 않는 한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그와 행적이 많이 겹치는 정치가이자 낭만주의 작가인 샤토브리앙(Chateaubriand, 1768-1848)은 그를 눈먼 자가 천재인 양 행세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라파예트는 역사적으로 과대평가되고 심지어는 남의 공적을 빼앗기도 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라파예트는 대서양 양안의 두 나라를 하나로 묶어 국가간의 우정을 구현한 프랑스 귀족이었음에는 틀림없다. 미국에서는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44개 도시와 17개 카운티, 셀 수 없이 많은 거리가 있다. 그의 이름은 병원, 학교, 대학, 호텔, 고속도로, 비행장, 공공장소, 공원, 호수, 산에도 붙어 있다. 라파예트가 1825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거국적인 환영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부대가 연합군으로 참전하기 위해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라파예트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 후 파리를 방문하는 미국 정부의 요인은 픽푸스 묘지에 있는 라파예트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었다. 그리고 미국 독립기념일인 7월 4일에는 미국 대사가 조지 워싱턴의 묘에서 퍼 온 흙이 덮혀 있고 성조기가 게양되어 있는 라파예트의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소책자 3쪽.[4]
G : 네, 미국 사람들이 라파예트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군요.
P : 여기서 우리는 라파예트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의 독립을 위해 분투 노력했던 것처럼 한국이 곤경에 처했을 때 한국인을 좋게 보고 도우려 했던 외국인이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 우리는 그들 중 누구를 기억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G : 임진왜란 때 明나라 원군을 이끌고 와 왜군으로부터 평양성을 탈환한 이여송(李如松, 1549~1598)도 이에 해당될까요? 구한말(舊韓末) 한국에 와서 교육사업, 의료사업을 펼쳤던 구미 선교사들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6.25 참전 및 전몰(戰歿) 용사들도 포함해서요.
P :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의 조기 참전을 지시했고, UN군과 한국군을 지휘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 장군도 빼놓을 수 없죠. 삼성그룹의 이병철 선대회장은 6.25 당시 피난을 못가고 장충동 집 지하실에 숨어 지냈는데 서울 수복을 석 달 여만에 실현한 맥아더 장군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한 바 있지요. 오죽하면 용인 이병철 회장의 묘역에는 이승만 박사와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서 있겠습니까! 그밖에 한국인을 진정으로 사랑한 벽안의 외국인으로는 영국 왕립지리학회의 회원이자 여행작가였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 여사가 있어요.
G : 구 한말에 한국을 여행한 서구인들이 중국이나 일본과는 사뭇 다른 조선을 '조용한 아침의 나라'(The Land of the Morning Calm) 또는 '은둔의 왕국'(Hermit Kingdom)이라는 제목을 붙여 여행기를 출간했다는 말은 들었어요. 비숍은 어떤 분이었죠?
P : 비숍 여사는 젊어서는 건강상의 문제로 집밖으로 다니질 못하던 분이었대요. 그런데 어느 의사가 전지요양(轉地療養)이라는 새로운 치료법을 제안하자 비숍 여사는 세계 각처를 여행하고 귀국한 후에 영국 여성이 관찰한 세계 곳곳의 모습을 출간하여 크게 주목을 받았다고 해요. 그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영국 왕립지리학협회 처음으로 여성회원이 되었다지요. 그 이야기를 KBS 1FM의 <가정음악> 시간에 들은 대로 여기 옮겨볼까 합니다.
이사벨라는 1831년 10월 15일 영국 요크셔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집안은 캔터베리 대주교를 배출한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영국 성공회(Anglican Church)는 물론 전 세계 성공회를 대표하는 최고위 성직자이다. 이사벨라의 아버지 역시 성공회의 사제였다. 그러나 어린 이사벨라는 몸이 몹시 허약했다. 특히 등의 통증이 심해 잠시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녀의 부모는 이사벨라를 위해 가정교사는 물론 의사를 자주 집으로 불러야 했다. 하지만 어떤 의사도 그 극심한 통증과 허약함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하여 이사벨라는 침대에서 누워 지내야만 했다. 그러한 감옥 같은 시간은 자그마치 그녀가 스무 살이 되도록 계속 이어졌다. 정말 길고 험한 시간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집을 찾아온 새로운 의사가 그녀에게 특이한 처방을 내렸다. 가능한 멀리 떨어진 바다를 보고오라는 처방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일명 '공기 치료법'으로 불리던 치료법이었다. 사실 이사벨라에게는 치료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최후의 권고나 다름없었다. 아무래도 호전될 가망이 없으니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한 번은 무모한 요양 여행이라도 다녀보라는 최종선고였던 것이다. 김경미, "길을 만든 사람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편", KBS 1FM 2023. 6. 27자 방송분 발췌.
G : 그렇게 병약했던 사람이 비행기와 자동차는 커녕 철도망조차 미비되었던 시절에 오직 마차와 말, 배 편으로 세계 각처를 여행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네요.
P : 정말 그렇지요! 비숍 여사는 어려서부터 책과 가정교사를 통해 최신 문물지식을 접하고 할말은 다 하는(outspoken) 성격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미국 일주, 오스트렐리아, 하와이를 여행하였고 여행기를 묶어 《아메리카의 영국 여인》(An Englishwoman in America, 1856) 같은 책을 펴내 인기 있는 여행기 작가가 되었습니다. 1878년에는 일본에 관한 책을 접하고 일본, 한국, 중국, 베트남, 싱가포르 등지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사벨라는 1881년 그녀가 50살이 되던 해에 30대의 외과 의사인 비숍과 결혼했다. 1880년에 티푸스로 죽은 여동생의 주치의였던 연하남이 열렬히 청혼을 하여 한 결혼이었는데 그녀에 대한 남편의 애정과 이해는 넘치도록 풍부했다. 그녀가 가사 일을 하지 않도록 배려했고, 그녀의 건강이 회복되면 언제든지 외출이든 여행이든 떠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그렇게 자상했던 남편이 그만 결혼생활 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사벨라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면 죽음의 쓰라린 고통이 끝날 것이라 생각하고 영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신의 건강이나 저술활동보다 아시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생각으로 출발하였다. 그렇게 해서 이사벨라가 중국과 만주, 시베리아를 거쳐 마침내 조선 땅에 도착한 것은 1894년 그녀의 나이 63세 때였다. 당시 조선은 열강의 침략 야욕에다 동학 운동과 갑오경장 등으로 나라 안팎이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빠져있을 때였다. 그러니 이사벨라의 한국에 대한 첫 인상은 극심한 가난과 불결한 위생 상태, 악취와 소란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4년을 머물면서 조선을 새롭게 그리고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4년 만에 영국으로 돌아가 펴낸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 1898)의 첫 부분을 이렇게 시작했다.
"조선 사람의 품성과 근면성은 장래에 그 민족에게 훌륭한 가능성이 기대된다는 점에서 나를 크게 일깨웠다."
지극한 애정어린 시선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후로도 그녀는 4번 더 조선을 찾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방문기를 책으로 펴내지 못하고 1904년 일흔네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경미, KBS 1FM 2023. 6. 30자 방송분 발췌.
G : 한국사에서 가장 비참했던 시기에 한국민을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았다는 게 고무적이고 감사하기조차 하네요.
P : 더욱 놀라운 것은 비숍 여사는 조선 사람과 풍물을 사진과 천연색 그림으로 남겨놓았어요. 그런 바탕 위에서 인도의 시성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가 일본의 식민지 상태였던 한국을 '동방의 등불'(Lamp of the East,1929)이라고 성원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이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Rabindranath Tagore
비숍 여사는 1894~1897년 4차례나 조선을 방문해 조선팔도를 말을 타고 직접 돌아보면서 관찰한 소감을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이란 책으로 출간했다.[5]
"조선인들은 잘생기고 힘이 세며 대단히 명민하고 똑똑한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게으르고 더럽고 가난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걸까?"
그러나 이 의문은 두만강 너머 러시아 연해주 땅에 정착한 부요하고 근면한 조선인 마을을 보고 풀렸다.
"전에 보았던 조선 남자들이 주체성과 독립성, 영국인에 가까운 터프한 남자들로 변해 있었다. 그들의 변화는 정직한 정부 밑에서 자신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만큼 그 당시 조선은 백성을 수탈하는 기생충 같은 탐관오리가 득실거리고 상인이 천대받는 사회임을 똑바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비숍은 책 말미(‘조선에 부치는 마지막 말’)에서 "조선은 특권계급의 착취, 관공서의 가혹한 세금, 총체적인 정의(正義)의 부재, 음모로 물든 고위공직자의 약탈행위, 가장 타락한 국가와의 가까운 동맹관계에서 벗어나라"고 주장했다.[5]
조선을 떠나며.....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의 운명을 놓고 대결한 상태에서 떠나게 된 것이 유감스럽다. 내가 처음에 한국에 대해서 느꼈던 혐오감은 이젠 거의 애정이랄 수 있는 관심으로 바뀌었다. 이전의 어떤 여행에서도 나는 한국에서보다 더 섭섭하게 헤어진 사랑스럽고 친절한 친구 들을 사귀어 보지 못했다. 나는 가장 사랑스러운 한국의 겨울 아침을 감싸는 푸른 벨벳과 같은 부드러운 공기 속에서 눈 덮인 서울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Note
1] 출판사는 Les Productions du Pertuis이며, Bernard Vincent가 쓴 Lafayette, 2014 책을 참조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2] 구글 렌즈 말고 다른 방법은 해당 페이지를 스캔하여 txt 파일로 변환한 후 DeepL, Google, Papago 같은 인공지능 번역기(AI translator)를 써서 번역하는 것이다. 그러나 외국의 서점이나 식당에서 책이나 메뉴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정확도는 떨어져도 사진을 찍듯이 즉석에서 번역문을 확인할 수 있는 구글 렌즈가 매우 편리하다.
3] 정사(正史)에서는 잘 다루지 않고 있으나, 라파예트가 프랑스 귀족과 사제들이 많이 가담하였던 Freemason의 단원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가 프리메이슨 집회에서 둘렀던 에이프런(사진, 1813년 미국에서 헌정받은 Grand Lodge apron)이 아직도 보관되어 있으며, 벤자민 프랭클린, 조지 워싱턴 등 미국 건국지도자들과 나눈 교분도 프리메이슨의 동지애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
라파예트가 건의하여 초대 대통령 이름을 딴 워싱턴DC를 철저한 도시계획 하에 프리메이슨의 이념을 반영하여 건설하도록 한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당시 라파예트는 미 독립전쟁 참전 당시 그의 휘하에 있던 프랑스의 공병장교 피에르 샤를 랑팡(Pierre Charles L'Enfant)을 워싱턴 대통령에게 천거하였다. 랑팡은 건축가, 토목공학자, 도시계획전문가로서 바로크 스타일의 계획도시에 사각형과 원형을 중심으로 방사성으로 뻗어나간 개방 공간과 탁트인 경관을 보여주는 기본설계를 담당했다. 이러한 구상이 어떻게 프리메이슨 이념을 도시계획에 반영한 것인지 댄 브라운의 《Lost Symbol》(2009)에 잘 묘사되어 있다.
4] 본래 Book's Day에서 소개하려고 했던 프랑스어로 된 소책자는 제목 그대로 라파예트의 업적과 그가 1780년 신대륙에 타고 간 프리게이트 함 헤르미온느호가 무슨 작전에 투입되었는지 설명한 팸플릿이다. 그래서 이와 견줄만한 다른 인물 - 이사벨라 버드 비숍과 그녀의 업적을 FM방송에서 청취하였기에 여기 녹취록 형태로 소개하였다.
5] 함영준, "‘기생충의 나라’ 조선과 2020 한국", 주간조선 2625호, 2020.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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