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 매월 13일 B [=13, Book's] Day가 빨리도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무슨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P : 오늘은 제가 읽었던 책이 아니라 앞으로 읽어볼 책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그 계기는 얼마 전 예금보험공사 차현진 이사가 쓴 글 "운명을 바꾼 선행"에서 비롯되었어요. 스웨덴 칼 14세 요한(Charles XIV John, r.1818~1844) 국왕이 된 프랑스의 전쟁영웅 장-밥티스트 베르나도트 (Jean-Baptiste Jules Bernadotte,1763-1844)의 이야기입니다. 과연 불굴의 의지로 이룬 인생역전인가, 아니면 연속된 행운의 소산인가 흥미로웠거든요.
G : 스웨덴 하면 세계적인 가구 인테리어 기업 IKEA, 식품포장재 기업 Tetra Pak, 존경받는 재벌기업 발렌베리가 생각납니다.
P : 전에 북유럽 다섯 나라를 여행할 때 스웨덴에도 가보았는데 국민성이 서양의 일본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리고 스웨덴의 국민화가 칼 라르손에 대해 소개한 적도 있지요. 스웨덴은 6.25 때 중립국으로서 휴전감시단에 참여했고, 병원선을 보내 부상장병과 피난민을 돌보아준 고마운 나라지요. 아무튼 모범적으로 잘 사는 나라입니다.
17세에 프랑스군에 졸병으로 입대한 베르나도트는 평민 출신이라서 장교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분제도가 철폐되는 바람에 운 좋게 장교로 진급했다. 그리고 참가하는 전투마다 큰 공을 세웠다. 나폴레옹은 그를 원수로 임명하고 혁명의 아이콘으로 키웠다.
그는 전투의 귀재였다. 프로이센의 뤼베크성은 철통같은 요새로 유명했지만, 베르나도트는 반나절 만에 성문을 뚫고 들어가 그 안에서 저항하던 프로이센군을 제압했다. 그런데 성 안에는 전투 의지가 전혀 없는 스웨덴 병사들도 2000명 있었다. 이미 다른 전투에서 패한 뒤 본국으로 돌아갈 배만 기다리던 그 처량한 포로들을 베르나도트는 가혹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들의 고단함을 측은히 여겨 정중히 예우한 뒤 귀국시켰다. 어떤 보상도 기대하지 않았다.
4년 후 스웨덴 왕실에 문제가 생겼다.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없어서 후계자를 두고 국론이 분열되었다. 그때 베르나도트가 급부상했다. 그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나폴레옹의 최측근이라서 러시아를 견제하기에 유익했다. 위기에 몰린 스웨덴 포로들을 따뜻이 돌본 인간미도 있었다.
베르나도트는 외국 왕실의 왕위 제안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초빙이 거듭되자 스웨덴 왕세자(Crown Prince)를 거쳐 1818년 스웨덴 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노르웨이를 병합하여 거기서도 왕이 되었다. 그 발단은 1806년 11월 6일 뤼베크성에서 존재감 없는 외국인 포로들에게 베푼, 아주 작은 선행이었다. 조선일보, 차현진의 돈과 세상, 2023.11.8.
G : 18세기 말 유럽은 혁명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지만 평민이 졸병으로 군에 입대했다가 불과 이십 년만에 장군이 되고 나폴레옹의 원수(Marshal)가 되었을까요? 게다가 아무 관계 없는 나라의 국왕이 될 수 있었는지 매우 흥미롭군요.
P : 저도 그게 궁금하여 생성형 인공지능 검색 사이트인 MS Bing과 Google Bard에 물어보았어요.
"엄격한 신분사회인 프랑스에서 어떻게 젊은 나이에 일개 사병에서 장교, 그것도 나폴레옹의 원수까지 될 수 있었나?"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 기간 중 그가 참전한 대표적인 전투와 그의 전공, 전쟁터에서 그의 장점이나 특기를 설명해 달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프랑스의 서남부 스페인 국경에 가까운 농촌 포(Pau)에서 시골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베르나도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17세가 되던 1780년 프랑스 군대에 이등병(private)으로 들어갔다. 코르시카 등지에서 복무한 그는 8년 후 상사(sergeant)가 되었는데 혁명이 일어나자 대부분 장교를 차지하고 있던 귀족들이 처벌 받거나 쫓겨나는 바람에 그도 장교로 임관되었다. 왕정을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주변국에서 프랑스를 침공해오자 군 지휘부에 공백이 생긴 혁명정부는 평민 출신이더라도 군인으로서 유능하기만 하면 장교로 승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1791년 11월 중위(lieutenant)가 된 그는 1794년 플뢰루스 전투에서 크게 승리를 거두고 그 전공을 인정받아 1794년 10월 사단을 지휘하는 장군(general of division)이 되었다.
라인 방면 후방에 주둔해 있던 베르나도트는 1797년 타이닝엔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 군이 라인강을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지원하였으며 1797년에는 나폴레옹을 도와 이탈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군을 격퇴하고 1798년 2월에는 駐비엔나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었다.
베르나도트 장군은 특히 보병전술(infantry tactics)과 효율적인 용병술(efficient maneuvering of troops)에 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1800년에 벌어진 호헨린덴 전투(Battle of Hohenlinden)를 예로 들면, 그는 포병의 맹렬한 포사격 하에 보병부태를 투입하여 오스트리아 군의 측면을 공격하는 척했다. 오스트리아 군이 그 방어에 나서면서 중앙부의 수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서 프랑스 주력부대로 하여금 기습공격(surprise attack)을 감행하게 했다. 그 결과는 프랑스 군의 대승이었으며 오스트리아 군이 패주하는 바람에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주축이 된 제2차 대불 동맹(Second Coalition, 1799~1802)은 크게 흔들렸다.
그는 군 행정가로서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군기를 엄격히 세우면서도 휘하 장병들과 동고동락을 자처하여 군 내부에서 신망이 아주 두터웠다.
G : 베르나도트는 자기 능력만으로 군인으로서 출세가도를 달렸군요. 비슷한 연배인 코르시카 출신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1821)와의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P : 나폴레옹은 육군사관학교 출신 초급장교로서 프랑스 대혁명을 맞았습니다. 1793년 왕당파 反혁명군과의 툴롱 포위전에서 포병을 동원해 큰 승리를 거두고 장군으로 진급했어요. 1795년 파리에서 벌어진 왕당파의 반란을 대포를 쏘아가며 강경진압하는 데 성공하여 혁명정부를 지탱하는 군부 실력자로 등장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이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Coup of Eighteenth Brumaire)를 벌여 기존 총재정부를 무너뜨리고 제1 통령이 되었을 때 쟈코뱅 파에 속한 베르나도트는 그와 거리를 두었다고 해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눈 밖에 난 그는 군대를 떠나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때 한 여자가 그의 군인경력이 끝나지 않도록 구해줍니다.
G : 그 여자는 누굽니까?
P : 바로 나폴레옹이 조세핀과의 사랑에 빠지기 전에 그의 약혼녀였던 데지레 클라리(Désirée Clary, 1777~1860)였습니다. 베르나도트가 1798년 데지레와 결혼하였으니 신부가 신랑의 구명(救命)을 위해 발 벗고 나섰던 겁니다.
데지레 클라리는 마르세이유에서 부유한 비단 상인 프랑수와 클라리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첫 부인이 요절하자 재혼한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둘째 딸이었다. 아일랜드계 이민자로서 신분상승의 욕구가 컸던 아버지는 재력을 바탕으로 마르세이유에서 유력 인사들과 교분을 나누었고 딸들도 귀족들이 하는 것처럼 수녀원 학교에 보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수녀원 학교가 문을 닫자 데지레는 집으로 돌아왔다. 비록 아버지의 사업 또한 혁명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아버지도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 이러한 집안 문제로 큰 언니 줄리 클라리는 관청에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러던 중 혁명정부가 마르세이유에 파견한 정부위원인 코르시카 출신 조세프 보나파르트를 자주 만나게 되면서 두 사람은 1794년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언니와 각별한 사이였던 데지레는 마침 툴롱 포위전 승리 후 마르세이유에 와 있던 나폴레옹을 소개 받고 약혼을 하였다. 언니 집에서 기거하던 데지레는 형부와 친형제 간이었던 나폴레옹과도 아주 친밀한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이 혁명정부로부터 중책을 부여받고 파리로 떠나면서 둘 사이는 소원해졌다. 급기야 나폴레옹이 파리 사교계의 여왕 죠세핀과 열애에 빠지면서 그는 1795년 데지레와 파혼을 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언니와 형부는 나폴레옹에 견줄만한 장군이라며 베르나도트를 소개하여 14살 나이 차에 일견 어울리지 않아 보이던 두 사람은 1798년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임에도 베르나도트는 전선을 따라 임지를 옮겨다녀야 했고, 데지레는 조세프가 주 로마 대사로 부임할 때 언니와 형부를 따라가느라 서로 떨어져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브뤼메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으로서도 베르나도트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가 마음의 빚을 진 전 약혼녀와 형님, 형수가 구명 요청을 하는 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군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이나 프랑스 군대에 대한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렇기에 나폴레옹은 1804년 5월 황제로 즉위할 때 베르나도트를 다른 17명의 장군과 함께 원수로 임명하였다.
G : 아니~ 처음엔 무협소설인 줄 알았는데 나중엔 로맨스 코메디가 되었네요!
P : 그렇지요? 1954년 베스트셀러 《데지레》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는 진 시몬스, 말론 브란도가 각각 데지레와 나폴레옹 역을 맡아 두 사람의 로맨틱한 관계에 중점을 두고 열연을 펼쳤다고 하지요. 정치나 권력엔 무심한 듯 보이는 미모의 여인이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은 두 남자가 한 사람은 프랑스 황제, 또 한 사람은 프랑스 군의 원수이자 스웨덴 국왕이라~ 그리스 로마 신화도 아니고 세상에 이런 일이 또 있었을까요? 나폴레옹의 친형이 나폴리와 스페인 왕이 되면서 데지레의 친언니도 두 나라의 왕비를 지내기도 했어요. 그러나 그 후에 반전(反轉)에 반전을 거듭하게 됩니다.
G : 무슨 사연이 있었나요?
P : 첫 번째 반전은 이렇습니다. 베르나도트는 1806년 로마와 나폴리의 중간 지점인 퐁테코르보 대공(Prince of Pontecorvo)에 임명되었어요. 그의 공훈이라기보다는 데지레에 대한 나폴레옹의 사죄의 의미가 컸다고 봅니다. 베르나도트도 이 점을 의식한 나머지 나폴레옹을 멀리 하기 시작했지요. 그럼에도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 왕국의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장군을 항복시키는 큰공을 세웠습니다. 이때 프랑스 군대의 약탈을 일체 금지시키고, 프로이센 군과 합류해 있던 스웨덴 군 장병을 단순 포로로 취급하지 않고 정중히 대우하여 전원 무사히 귀국시키는 등 첫머리에서 말한 일화를 남겼어요. 그의 의도적인 행동이라기보다 평민 출신으로서 부하 장병들을 배려하던 그의 젠틀한 스타일이 반영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베르나도트는 1808년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스웨덴의 공격에 대비해 유틀란트 반도에 주둔했어요. 그 때 나폴레옹이 그에 대한 신임을 거두었는지 철수를 명합니다. 그 때까지의 몇 가지 명령 불복종 의심을 사게 되어 그는 나폴레옹에 의해 모든 임무에서 배제되었습니다.
G : 그럼 두 번째 반전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네요.
P : 너무 극적인 사건의 연속이어서 AI 검색 사이트에 기승전결(Initiation - Development - Climax - Resolution)로 정리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Google Bard가 내놓은 답변을 한글 위키백과를 참고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起
1809년 스웨덴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反나폴레옹 對프랑스 강경파인 구스타프 4세 아돌프가 국내 경제의 파탄과 러시아 제국에 핀란드를 뺏기는 실정을 거듭한 끝에 폐위 당하는 정변이 일어났다. 구스타프의 숙부인 칼 13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그는 후사가 없는 초로의 노인이었고, 다음 왕위 계승자인 칼 아우구스트도 1810년 급사하는 바람에 쿠데타를 일으켰던 스웨덴 장교들을 중심으로 차라리 나폴레옹의 육군 원수 중 한 명을 왕위 계승자로 삼기를 원했다.
스웨덴 국왕은 몇몇 후보자에 대한 나폴레옹의 의중을 타진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했다. 그런데 사신으로 간 뫼르네르 남작(Baron Carl Otto Mörner)은 외교 임무를 마치고 3년 전 뤼베크 포로 시절 깊은 인상을 받았던 베르나도트를 비밀리에 찾아갔다. 그리고 그가 스웨덴 왕위 계승자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자 베르나도트는 개신교(Lutheran)로 개종하는 문제, 언어 문제, 나폴레옹과의 관계를 들어 처음에는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承
당초 나폴레옹은 스웨덴의 왕위계승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스웨덴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스웨덴 문제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경색시킬 가능성도 있었다.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가 아닌 다른 원수 몇 사람을 추천했다. 스웨덴에서는 나폴레옹의 양자인 죠세핀의 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에 대해서는 약간의 관심이 있었지만, 당사자는 현재의 지위에 만족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마지 못해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왕위계승 후보자가 되는 것을 승낙했다.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에게 "스웨덴의 왕세자가 되어 장래 국왕이 되는 이상 나는 스웨덴을 위해 싸울 것이오"라고 대답하고 스웨덴으로 떠났다. 1810년부터 왕세자 및 섭정(Regent)으로서 스웨덴의 정치를 맡게 된 베르나도트는 점차 反프랑스 입장을 취하여 1812년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맞서기도 했다. 이로 인해 북쪽에 프랑스 동맹국을 만들겠다는 나폴레옹의 뜻은 어이없게 좌절되었다. 베르나도트는 "정치에 있어서 우정도 증오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운명의 신이 명령한 대로 조국에 대한 의무만이 존재한다"라고 친서를 나폴레옹에게 보내 결별의 뜻을 비쳤다.
轉
1810년 스웨덴 의회가 동의하여 왕세자가 된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에게 수여 받았던 폰테코르보 공령(公領)을 반납했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이후 유럽에 反나폴레옹 기운이 고조되자, 베르나도트도 스웨덴의 국익을 위해 그 대열에 합류하여 제6차 對프랑스 동맹 연합군이 승리(해방전쟁)하는 데 기여했다.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한 작전을 제안한 것도 그라는 설이 있다. 그 때문에 반나폴레옹의 연합국에서 최고의 훈장을 수여받았다.
프랑스 국민들로서는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을 쓰러뜨리는 데 협력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 대적하여 라인강을 넘어왔다는 것 자체가 충격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배신감을 느꼈다. 나폴레옹이 항복한 후,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그를 프랑스 왕위계승자로 지지하였다. 그 당시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에게 "자신이 프랑스 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라고 여러 번 말했다. 반면 영국은 나폴레옹의 퇴위 후 부르봉 왕가가 복위하는 것을 지지했다. 베르나도트는 한 때 부르봉 왕가의 복위를 지지하는 조건으로 수여하겠다는 수많은 프랑스 직위를 거절했다. 하지만 파리에서 왕년의 동료 장군들을 만난 후 왕위 계승에 대한 꿈을 접었다. 프랑스에서 베르나도트는 "배신자"의 불명예를 짊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왕위에 올랐다.
結
스웨덴으로 돌아온 베르나도트는 1814년 노르웨이를 병합하는 킬 조약(Treaty of Kiel)을 맺고 1818년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의 칼 14세 요한으로 정식 즉위하였다.
칼 14세 요한은 대외적으로 중립을 지켜 평화유지에 노력하면서 영토 확대보다는 산업 진흥에 힘써 스웨덴의 국력을 강화시켰다. 한편 의회개혁 등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국내 자유주의파에 대해선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스웨덴어에 서툴렀으나 일반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펴고 문화창달을 위한 박물관과 미술관, 극장을 다수 건립했다. 그리고 왕세자인 오스카 1세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국민 초등교육을 실시하도록 했다.
왕정 타파에 앞장섰던 사람이 일국의 국왕으로 군림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칼 14세 요한은 빈 체제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실각한 후의 나폴레옹의 모습을 보았기에 1830년 이후엔 온건한 입헌 군주제를 실시하였다. 프랑스와의 관계도 개선하여 100년 후이기는 하지만 파리 개선문에도 그의 이름이 새겨질 수 있었다.
G : 몇 편의 인생 드라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정리를 하자면 베르나도트는 군인으로서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그의 성공비결은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를 존중하는 데 있었던 것 같아요. 나폴레옹과 경쟁하지 않고 협조한 것, 정치에 무관심하고 내조 역시 별로인 철없는 데지레를 끝까지 존중한 것 등은 주목할 만합니다.
P : 그렇습니다. 정치 외교면에서도 親러시아 정책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이를 채택하지 않은 것, 국제적인 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중립을 유지하되 튼튼한 무장(武裝)을 갖추는 것 등은 그가 후대에 물려준 훌륭한 외교 지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치외교사나 군사학의 관점에서는 베르나도트가 아주 흥미로운 연구 대상입니다.
G : 그럼에도 연예 오락이나 드라마의 관점에서는 단연코 그의 부인인 데지레 왕비(스웨덴에서는 "Desideria"라고 호칭)가 훨씬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P : 마르세이유에서 태어나고 자란 데지레는 스웨덴의 추위를 끔직이도 싫어했어요. 고고함과는 거리가 멀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이야기하고 지내는 것을 아주 좋아했어요. 그러니 말도 통하지 않고 남자 일색인 스웨덴 왕실의 분위기는 파리와는 너무 다르고 말벗도 없었기 때문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겠죠. 남편이 스웨덴 왕세자가 된 후에도 온갖 핑계를 대며 파리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들도 속속 곁을 떠나고 나폴레옹과의 추억도 희미해지면서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외아들인 오스카 1세(Oscar I, r.1844-1859; born Joseph François Oscar Bernadotte, 1799-1859)가 1823년 죠세핀 전 황비의 손녀딸(Josephine of Leuchtenberg)과 결혼을 하자 왕세자비와 더불어 스톡홀름에 정을 붙이고 살기 시작했다고 해요. 칼 14세 요한의 사후에는 왕대비(Queen Mother)로서 아들 며느리의 효도를 받고 손주들의 재롱을 보며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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