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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Day] 보르헤스의 단편소설집《픽션들》

Onepark 2024. 1. 13. 22:50

G : 요즘 친구분들 하고 독서 클럽을 결성하셨다고 들었어요. 

P : 네, 코로나 거리두기가 풀리면서 몇몇 고교 동창들하고 매달 모임(DG23 Forum)을 갖고 있습니다.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것만이 아니고 각자의 관심사를 주제로 발표하고 참석자들이 서로 토론을 하는 식이예요. 참석자의 과반이 대학교수를 하였기에 아무래도 지적인 주제를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수학 교수를 한 친구는 "가장 작은 무한(Minimum Infinity)"이라는 주제를 발표했어요. 그때 10의 100승이 '구골'(googol),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큰 수 '무량대수'(無量大數)는 10의 68승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어요. 무한집합 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게로르그 칸토어(Georg Cantor 1845-1918)는 이 분야 연구에 일생을 바친 수학자였다고 해요.

 

 

G : 말만 들어도 머리가 어질어질하네요. 오늘 들고 나오신 책은 뭔가요?

P : 작년 12월 포럼의 한 회원이 발표하여 열띤 토론이 벌어졌던 책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보르헤스의 단편소실집 《픽션들(Ficciones)》인데 이미 절판된 책이라서 그 친구가 따로 구해서 참석자들에게 미리 읽어보라고 나눠주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1부 8편, 2부 9편 중에서 관심이 가는 단편 한두 편을 골라서 읽고 독후감을 발표하는 식으로 진행했습니다.

 

G : 마치 대학원 세미나 같았겠네요. 그럼 발표자의 키노트 발표가 있어야지요.

P : 네, 그렇습니다.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나 가족을 따라 유럽을 오가면서 살았다고 해요. 할머니가 영국계여서 영어와 외국어에도 능통했고 독서를 아주 많이 했습니다. 젊어서는 잡지와 신문의 편집자와 칼럼 기고가로 활동했어요. 30대 중반에는 가세가 기울고 극심한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했으나 권총 오발로 목숨을 건졌다 해요. 도서관 사서로 일할 때 사고로 큰 부상을 입어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했는데 그때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단편소설로 발표한 게 이 《픽션들》 이라는 책입니다. 그는 페론이 집권했을 때 국가사회주의 정책 페로니즘에 반대하는 시국선언문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 여파로 도서관에서 쫓겨나고 문학 강연 등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다가 페론 정권이 물러나자 국립도서관장 직에 오릅니다. 그러나 거의 실명한 상태에서 그 많은 장서의 한 줄도 읽을 수 없었다고 해요.[1]

 

G : 그의 삶 자체가 드러매틱하였군요. 그런데 어떻게 중남미 바깥 세상에는 알려졌을까요?

P : 어려서 신동 소리를 들을 만큼 다독을 통한 해박한 지식을 갖췄고 외국어에도 능통하여 해외 문단, 지식사회에의 진입장벽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하는 이야기가 독자들로 하여금 현실, 문학과 예술, 지적 탐구, 인간의 경험에 대한 근본적인 의미를 생각하게 만들어 해외 문단의 반응도 즉각적이었다고 해요.[2] 《픽션들》만 해도 그럴듯한 스토리가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공감 내지 감동을 자아내지만 금방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이야기임을 스스로 알게 되기에 그 자체가 흥미로운 화제거리인거죠.

 

G : 지금은 그런 류의 소설, 특히 사이언스 픽션이 많아 전혀 새롭지 않은데 80-90년 전에는 사정이 달랐겠죠.

P : 일례로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라는 단편을 보면 누구나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썼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그럼에도 보르헤스는 삐에르 메나르라는 사람이 비슷한 소설을 썼다고 주장하고 근사해 보이는 그의 저작물을 열거하고 있으니 독자들은 혹시 문단의 비화가 아닌가, 세르반테스 아닌 사람도 그런 저작을 남겼을지 모르겠다, 현대의 유명 작가 메나르는 어떤 식으로 원작을 변형시켰을까 호기심을 갖게 된다는 겁니다. 문학적 해석은 얼마든지 주관적으로, 독창적으로 바꿀 수 있지 않겠어요?

 

[메나르]는 또 다른 돈키호테를 집필하려는 게 아니었다 - 그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가 집필하려고 했던 것은 '돈키호테 그 자체였다. 물론 그가 절대로 원작을 문자 그대로 옮겨 쓰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경탄할 만한 야심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일치하는 단어와 단어, 그리고 행과 행 그런 몇 페이지를 쓰는 것이었다.
「나의 의도는 단지 놀랍게 만들려는 것뿐이지.」

1934년 9월 30일 그가 바욘에서 내게 편지를 썼다.
『내가 퍼뜨린 소설이 객관적 세계, 신, 우연, 우주의 형상과 같이 목적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논거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그런 사유체계보다 더 선각자적이라거나 보편적이라는 것 은 아니네. 단 하나 차이점이 있다면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중간 작업 과정을 아주 멋있는 책들 속에 담아 출판하는 반면 나는 그것들을 생략해 버리기로 마음먹은 데에 있지.」
76쪽

 

P : 《픽션들》 제1부의 마지막 편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 있는 정원 (The Garden of Forking Paths) ”에서는 느닷없이 중국의 기서(奇書) 홍루몽이 언급됩니다. 아르헨티나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중국의 문물과  중국인 유춘이 등장하는 까닭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상황을 말해줍니다. 만일 유춘이 독일 스파이였고 비밀리에 독일의 상관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면 유춘은 스티븐 알버트 박사를 살해한 후 진술서에 수많은 사람을 기재하고 미로를 헤매는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는 겁니다. 실제로 이 작품은 그 후 공상과학과 포스트모던 문학의 영역에 반향을 일으켰다고 해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첫머리에도 미 육군이 외계인과 접촉한 사례를 조사한 보고서[3]가 마치 실제하는 일처럼 인용되어 있지 않나요?

 

알버트가 일어섰다. 우뚝 선 채 그가 높은 책상의 서람을 열었다. 그동안 그는 내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나는 이미 리볼버를 꺼내들고 있었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총을 발사했다. 알버트는 단 한마디의 신음도 내뱉지 않은 채 풀썩 쓰러졌다. 나는 그의 죽음이 번갯불처럼 순간적이었다고 맹세한다.

나머지 얘기들은 비현실적이고, 하잘것없는 것들이다. 매든 대위가 뛰어들어왔다. 그가 나를 체포했다. 나는 교수형 선고 를 받았다. 증오스럽게도 내가 승리했다. 나는 공격을 가해야 할 도시의 감춰진 이름을 베를린에 교신하는 데 성공했다. 어 제 그곳에 폭격이 가해졌다. 나는 그 기사를 탁월한 중국학 학자 스티븐 알버트가 유춘이라는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살해 당했다는 암호를 실었던 바로 그 신문에서 읽었다. 나의 대장은 이 암호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전쟁의 와중에서) 내가 알버트라는 이름의 도시를 알려야 하는데 그와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는 그것을 알릴 방법이 없다. 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끝없는 참회와 피로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으리라). 166쪽

 

G : 그렇다면 가짜 뉴스와 소설의 허구는 어떻게 구별하지요? 보르헤스의 픽션들은 아주 사기성이 농후헤 보이는데요~!

P : 그것은 일단 목적이 무엇이고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구분할 수 있어요. 하지만 내용상으로는 별반 차이가 없다고 봐요. 독자들의 허를 찌르고 새로운 문학기법을 시도한다는 게 아니라면 가짜 뉴스나 진배 없다는 것입니다.

제2부 첫머리에 나오는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살펴보지요. 이 단편에서는 사고로 뇌를 다친 후 사진 같은 기억력을 갖게 된 초능력자 푸네스가 주인공입니다. 이로 인해 그는 불필요한 기억을 많이 하게 되어 그는 더 이상 평범한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작가는 일어날 법한 픽션을 통해 기억과 망각 사이에 어떤 균형이 필요하며, 인지의 한계 속에 우리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함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장차 무한대의 기억용량을 가진 컴퓨터 시대가 도래할 것을 내다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G : 당시 평단과 독자들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비슷한 계열의 미국 SF작가 필립 K. 딕과는 달리 영화화된 작품은 별로 없지요?

P : 처음 보르헤스의 단편소설집에 대한 반응은 비판적이었어요. 그러나 보르헤스의 독특한 스타일과 혁신적인 스토리텔링 기법은 많은 관심을 모았고 문단에서도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보르헤스의 서사에 크게 매료되었고 그의 기법을 모방하는 사람도 늘어났다고 해요.

특히 《픽션들》은 시간과 현실, 정체성, 문학 자체의 철학적 깊이 면에서 주목을 받고 그의 소설 속에 나오는 지적 분방함과 깊이 있는 철학적 담론은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메타픽션, 철학적인 탐구, 독특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는 그의 픽션은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에서 벗어나 지성적인 깊이와 문학적인 창조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점차 독자층을 넓혔고 세계적으로도 유명해졌습니다.

 

G : 이런 책 한 권이 핵폭탄급 위력을 가진 셈이었군요.

P : 그래서 보르헤스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작가로서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의 《픽션들》은 사실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인정되었어요. 처음에는 지적 호사가의 언어 유희, 황당무계한 공상소설로 여겨지다가 이러한 장르의 소설이 속속 등장함에 따라 문학사에서도 하나의 지류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해요. 앞서 말씀드린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평행우주가 등장하는 《1Q84》 등이 이런 계열에 속한다고 볼 수 있죠.  물론 그의 소설이 어렵다거나 재미없다고 하는 독자들이 아직도 많은 게 사실입니다.

 

Note

1] 보르헤스는 1967년 68세 때 한 결혼에 실패한 후 독신으로 지내다가 1986년 그의 곁을 30년 넘게 지키면서 충실한 비서 역할을 해온 일본계 마리아 코다마와 재혼하였다. 당시 보르헤스는 87세로 49세인 코다마와의 나이 차는 38세였고, 암 투병 중이던 보르헤스는 그로부터 두 달 후 스위스 제네바에서 타계했다. 보르헤스의 유일한 상속자였던 코다마는 남편 사망 후 재혼하지 않은 채 보르헤스 국제 재단을 설립하고 그의 작품을 관리하는 데 여생을 보냈다.

코다마는 대학생 때 보르헤스의 강연을 들은 후 그의 평생 문학 동반자가 되었으며, 2023년 3월 87세를 일기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별세했다. 보르헤스는 집안의 유전질환인 약한 시력 때문에 그가 구술하는 것을 비서가 타이핑을 하고 편집, 외부 연락 등을 도맡아 해야 했다. 연합뉴스, "대문호 보르헤스 타계 두 달 전 결혼했던 일본계 부인 별세", 2023.3.28.

 

2] 보르헤스는 젊어서 비교적 왕성하게 집필활동을 벌였으나 해외 문단의 주목을 받은 것은 환갑이 지난 62세 때였다. 1961년 보르헤스는 사무엘 베케트와 공동으로 제1회 국제 출판인협회 작가상을 수상함으로써 뒤늦게나마 중남미 밖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후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수상과 강연 제의가 이어지자 보르헤스는 모친과 함께 지칠 줄 모르고 여행을 다녔다.

 

3] 미국방부의 극비 문서
이 문서는 미국의 국방부가 '극비 자료'로 분류해서 보관해 왔으나, 정보공개법에 따라 1986년에 일반 공개가 허용된 것이다. 현재는 워싱턴특별시 미국 국립공문서보관소(NARA)에서 열람할 수 있다.
이 문서에 기록된 일련의 조사는 육군 정보부 제임스 P. 워런 소령의 지시에 따라, 1946년 3월부터 4월에 걸쳐 실시되었다. 로버트 오코넬 소위와 해럴드 가타야마 상사가 야마나시(山梨) 현 ㅇㅇ시의 현장에서 직접 조사를 진행했다. 모든 면담에서 질문자는 로버트 오코넬 소위다. 일본어 통역은 가타야마 상사가 맡았고, 서류 작성 은 윌리엄 콘 일등병이 담당했다.
면접은 12일간에 걸쳐 실시되었으며, 장소는 야마나시 현 00 읍사무소의 응접실이다. ㅇㅇ군 ㅇㅇ시립 ○○초등학교 여교사, 현지에서 개업중인 의사 한 명, 현지 경찰서 소속의 경찰관 두 명, 그리고 여섯 명의 초등학생이 오코넬 소위의 질문에 개별적으로 응했다.
《해변의 카프카》上 31, 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