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에 놓여 있던 상자의 내용물을 정리하다가 오랫 동안 소재를 몰랐던 옛날 기록물을 찾았다.
퇴직하면서 학교 연구실에 있던 오래 된 자료더미를 상자에 넣어 집으로 옮겼는데 그것이 어느 상자에 들어있는지 몰라 풀어헤치지 못한 채로 두었었다.
그것이 무엇이길래 그처럼 애타게 찾고 있었는가!
교수 시절 학생들에게 나의 경험담을 소개하면서 사회에 진출하면 시키는 일만 하지 말고 능동적으로 자기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곤 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법칙 첫 번째도 "Proactive하라"는 것 아닌가!
1977년 말 전 직장(한국산업은행)의 국제금융 파트에서 일할 때 첫 임무는 사무실 밖에서 24시간 돌아가는 로이터와 AP-DJ 텔렉스의 두루말이 종이를 제때 갈아끼우고 주요 국제금리와 환율이 얼마나 변동했는지 알아보는 일이었다.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스마트폰에서도 국제금융시장동향을 실시간으로 알아볼 수 있지만 그때는 트레이딩룸 밖에서는 속보를 알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금리 환율 변동사항만 일정한 양식으로 보고하였는데 재미도 없고 따분했다. 그래서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던 시장 분석기사를 요약 정리하여 나름대로 코멘트를 추가했다.
나중에는 국제금융시장의 주요 동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직장 동료와 고객들에게 뉴스레터 형식으로 전파하였다.
그리하여 신입사원 때부터 "일 잘한다"는 찬사와 호평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1] 그 당시 국제금융 뉴스레터를 어떠한 형식과 내용으로 만들어 돌렸는지 실물(實物)이 있었으면 취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보여주었을 텐데 그러질 못해 아쉬웠다.
그런데 오늘 35~40년 전 내가 직접 손으로 써서 만들었던 자료를 대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바로 어제 일처럼 추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그랬었다~.
처음엔 손으로 쓰는 게 지겨워 타이프라이터를 쓰다가, 그때 마침 8인치 디스켓에 자료를 저장하는 PC 워드프로세서를 앞장서 도입할 것을 주장했다. 직장에 일하러 왔는지, 임원실 보고서 대필이나 하러 왔는지 불만이 고조되던 참이었다. 그때 우리 부서에 PC와 프린터를 제일 먼저 도입하여 전속 필경사였던 나는 마침내 수기(手記) 작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2]
또 한 가지 더 생각이 났다.
이런 종류의 작업은 누가 시킨다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1980년대 초 국제금융시장에 관한 정보는 텔렉스 속보와 경제지 외신 보도, 월스트리트 저널과 닛케이(日本經濟新聞) 기사가 거의 전부였다. 국제금융부에서는 런던 지점에서 구독하는 Euromoney 같은 전문잡지를 받는 즉시 팩스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내가 열심히 읽고 정리하곤 했었다.
이러한 영문 기사를 재빨리 읽고 요약하여 정리하는 일을 몇 년간 하다 보니 요령이 생겼다. 신입사원 시절부터 재미나게 하던 일이 거의 달인(達人) 수준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그 후 미국 로스쿨에 유학할 때나 학자가 되어 외국 논문을 읽을 때 무형의 자산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생각해 보니 나의 신입사원 시절은 하나의 물방울에 불과한 것 같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공부를 많이 하니 적잖게 내공(內功)이 쌓였다. 아직도 하나의 물방울인 것은 여전하지만 그 물방울 속에 대해(大海)도 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테면 Wikipedia 같은 온라인 법률백과사전을 만드는 일이나 우리의 시와 노래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은 혼자서는 엄두도 못낼 작업이었다. 그러나 한 편 두 편 하다 보니 큰 바다는 아니어도 이제 작은 연못 정도는 이루게 된 셈이다.
The Ocean in a Drop by Rumi
You are not a drop in the ocean.
You are the entire ocean in a drop.
당신은 바다의 물방울 하나가 아닙니다
당신이라는 물방울 속에 바다가 들어있는 겁니다.
Note
1] 1977년 말 산은(KDB)에 입사하였을 때 도쿄 시장에서 국내 최초로 엔화 표시 채권(Samurai Bonds)을 발행하느라 제일 바쁜 외자부에 배치를 받았다. 처음엔 다규멘테이션 회의용 자료를 복사하여 참석자들에게 배부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법대를 나왔다는 이유에서 계약서 검토가 맡겨졌다. 그러나 학교에서 국제채 발행계약에 관해서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일본 주간사(지금은 문닫은 야마이치 증권) 실무자와 회의를 할 때 신입사원으로서 입도 벙긋할 순 없었으나 한 가지 요령이 생겼다.
일본 측 참석자에게 KDB와 비슷한 외국은행의 엔화채 발행 사례가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야마이치(山一證券)가 KDB에 앞서 주간사를 맡았던 프랑스 무역신용은행(BFCE)이 있다고 했다. BFCE의 발행관련 서류를 받은 즉시 우리가 협상 중인 KDB의 계약서(안)과 일일이 대조해 보았다. 나는 계약서 검토가 아니라 형광등 불빛에 비쳐보고 다른 점만 찾아내 대조표를 만들어 상사에게 보고했다. 그 결과 KDB가 발행조건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고시에 여러 차례 낙방했던 나로서는 비로소 내게 맞는 직장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녁이면 일식집에 가서 값비싼 생선회를 먹는 것은 보너스(일본인 회의 참석자는 물론 일본에서 살아본 고참 직원들과의 회식 자리에서도 배울 점이 많았다)인 셈이었다. 당초 고시 반수(半修)하러 들어간 직장을 그후 20년 이상 다니면서 유럽과 미국에서 큰돈 드는 학술연수도 받고 뉴욕에서 주재원 근무도 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복되고 다행한 일인가!
2] PC 워드프로세서가 도입되었음에도 손으로 정성껏 써서 직장내 대학 선배들에게 보내드린 것도 있다.
결혼을 할 때쯤 해외 점포에 나가 계신 선배들에게 일일이 알리기도 뭣해 동창회 소식지를 만들어 보내드렸다. B4 용지 앞뒷면에 나름대로 수집한 은행 소식을 정리하여 보내드렸는데 국내 소식에 목마른 사무실의 다른 직원들도 돌려보며 아주 인기였다는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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