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일박을 위해 들렀던 이스탄불(Istanbul)에 다시 발을 디뎠다.
국내선이므로 우리 일행은 짐을 찾자마자 버스에 싣고 곧바로 역사지구로 향했다. 여기저기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성벽과 주택 건물이 혼재되어 있었다.
일단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에 들렀는데 바로 창밖의 블루 모스크의 미나렛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잔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아잔의 확성기 소리에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식사를 마친 다음 밖으로 나왔다. 오벨리스크(obelisk)가 서 있는 전차 경주장이었다.
이스탄불은 4분되었던 로마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콘스탄티노플(Byzantium)을 건설한 때로부터 동로마 제국(Byzantine Empire)이 천년간 수도로 삼았고 그 이후에는 오스만 튀르크(Ottoman Turks)가 지배하였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과 아시아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튀르크의 메흐메드2세(Mehmed II) 술탄이 금각만(Golden Horn)의 철통같은 방어망을 우회하여 배를 산으로 옮겨 콘스탄티노플 성을 공격하였다는 1453년의 전투 이야기가 지금도 전설처럼 들린다.
이스탄불의 주인공은 아야소피아(Ayasofya,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의 Hagia Sophia)라 할 수 있다. 정교회 대성당으로 건설되었으나 몇 차례의 소실을 겪은 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소피아 정교회 재건을 명하여 5년 11개월만인 537년 말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구조상으로 돔을 떠받치는 기둥이 없는 불가사의한 건물로 일컬어진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대가 이 도시를 점령한 뒤에는 가톨릭 교회로 변신했다. 그러다가 1453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다음에는 운명이 바뀌었다. 정복자 술탄은 "이제는 알라신만 존재한다"고 외치며 성당에 피신해 있던 비잔티움 사제와 시민들을 모두 귀가시키고 이곳을 모스크로 사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 결과 성당 안의 십자가가 철거되고 성화는 회칠로 가려졌으며 4개의 미나렛이 증축되었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그리스를 비롯한 서방 각국이 소피아의 종교적 복원을 요구하자 터키 정부는 아야소피아(하기아 소피아)를 인류 공동의 유산인 박물관으로 지정하고 그 안에서의 종교적 행위를 일체 금지하였다.
그러나 反세속주의를 표방하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집권 후 2020년 다시 모스크 사원으로 되돌아갔다. 2024년 초부터 이슬람교도가 아닌 관광객은 건물 뒤쪽으로 입장해 2층만 둘러볼 수 있다. 1층은 오롯이 이슬람교도만의 공간이 되었다. 아야소피아는 여전히 모자이크화와 입체적인 공간이 아름답지만, 건축물을 자유로이 거닐며 곳곳을 살펴보지 못해 아쉬웠다. (류동현 전시기획자, 이스탄불 예술여행, 조선일보 2024.4.5.)
하기아 소피아 (이스탄불의 스카이라인을 공유하는 바로 옆의 블루 모스크와 구별하는 요령은 미나렛이 2개 적은 4개이고 돔이 조금 높이 솟아 있다는 것임)의 내부에 들어가 보면 곳곳에 무슬림의 회칠이 제거되고 본래의 천정화가 드러나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은 계단이 없고 경사로로 되어 있다. 십자가 장식이 뜯겨진 흔적이 이곳저곳 남아 있으나 아랍어로 되어 있는 쿠란 구절이나 인명의 장식판은 그 자체가 문화유산이라 하여 더 이상 손대는 것을 피하고 있다 한다.
하기아 소피아가 사원이 아니라 박물관이기에 터키 정부가 종교적 관대함을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이곳에서 거두어 들이는 (종교 사원이라면 받기 어려웠을) 입장료 수입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한 공간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통이 상반된 것을 확인하게 된 것도 흥미로웠다.
기독교에서는 신과 성인의 사실적인 이미지를 선호하는 반면, 이슬람에서는 신이 창조한 우주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주로 서예와 기하학적 패턴에 초점을 맞춘다. 오로지 신만이 생명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신이든 인간이든 심지어 짐승조차도 생명의 이미지를 창조할 처지가 못된다는 것이다. 댄 브라운, [인페르노 II], p.266.
이 때문에 하기아 소피아에서는 성가족, 성인의 그림과 아랍어 서체가 나란히 장식되어 있다. 하지만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최후의 심판 날 그리스도 앞에서 죄인의 벌을 가볍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의 모습을 형상화한 데이시스 모자이크(Deesis Mosaic 1261년) 앞에 서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원화의 2/3이나 훼손되어 있어 그 만큼 '데이시스'(간청)가 감소되지 않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더했다.
날개를 접은 커룹(cherubim) 천사의 얼굴이 보이는 사원의 돔 정중앙 밑에는 표식이 있어 남녀나 친구가 이곳에 카메라를 놓고 찍으면 사랑과 우애가 두터워진다는 속설이 있다.
하기아 소피아를 나갈 때 성화를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나가는 문(Exit) 위에 거울이 달려 있었다. 거울은 굴절없이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성화를 비쳐주고 있다.
하기아 소피아를 관람한 다음에는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멧 사원, 내부가 파란 타일로 장식되어 붙여진 별명)를 보는 것이 순서이지만 마침 기도시간과 겹쳐 방문은 내일로 미루었다. 대신 밖에 기도하러 들어가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세수간을 거쳐 밖으로 나갔다.
그 다음 코스는 이 지역의 상수도원인 지하 저수장 예레바탄 사룬치(Yerebatan Sarnici, Basilica Cistern)였다. 댄브라운의 소설 <인페르노>에도 '물에 잠긴 궁전'으로 언급되어 있지만 소피아를 비롯한 이 일대의 지하에는 기둥이 336개나 되는 엄청난 규모의 저수장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현대식 상수도 시스템이 갖춰진 후에는 빗물을 모아두는 저수조에 지나지 않으며 관광 코스로 이용되고 있었다.
우리는 메두사의 두상이 거꾸로 또 옆으로 놓여 있는 기둥까지 보고 돌아 나왔다. <인페르노>에서 유전자변형을 일으키는 벡터 바이러스가 살포된 '그라운드 제로'로 묘사된 그 지점이다. 흉칙한 괴물로 변한 메두사의 눈길이 닿는 부분에 재앙의 근원이 설치되었노라는 댄 브라운의 상상력이 놀라웠다.
일행 중에 다리가 아프니 쉬어가자는 사람도 있었지만 우리는 조금 더 걸어 실크로드의 종착지인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로 갔다. 4000여개의 상점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어서 구경하기에 좋았다.
여기서 파는 물건 중에는 상당수가 말 그대로 하늘과 바다의 실크로드를 거쳐 들여온 중국산이라고 했다.
그랜드 바자르에서 나와 탁심(Taxim) 신시가지로 갔다.
역사지구에서는 지하 굴착 작업을 할 수 없지만 탁심 지구에서는 심굴 지하도에 도로와 전철을 개설하는 프로젝트가 꼐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민들이 이에 반대하여 공사는 보류되고 있다 한다.
터키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한식 저녁식사를 마친 후 피에르 로티(Pierre Loti) 찻집에 올라갔다.
피에르 로티 찻집은 공동묘지를 거쳐 올라갈 수도 있지만 퍼니큘라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 손쉬웠다.
19세기 말 이스탄불에 해군무관으로 와 있던 프랑스 외교관 줄리앙 비오(Julien Viaud)가 터키의 유부녀와 사랑을 나누다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나중에 그녀를 찾아 왔을 때에는 이미 가족들에 의해 명예살인을 당한 뒤였다. 그는 옛사랑을 되새기며 공동묘지 위의 찻집을 자주 찾곤 하였다.
그가 이같은 슬픈 이야기를 피에르 로티(Pierre Loti)라는 필명으로 소설로 펴내자 사람들이 금각만의 경치 뿐만 아니라 그의 슬픈 러브스토리를 상기하며 이곳을 찾는 바람에 한국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유명해진 것이다.
반면 한국 전쟁고아와 터키 군인과의 부녀간 러브스토리도 들을 수 있었다. 케말 파샤의 유훈에 따라 UN군으로 파병된 터키군은 주로 병참보급을 담당했지만 미군을 여러 차례 위기에서 구했다고 한다. 당시 터키군인 술레이만 딜빌리히 하사는 거리에서 혼자 울고 있는 5세 여아를 부대로 데려가 '아일라'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정성껏 보살폈다. 그가 귀국할 때 짐 속에 넣어 터키로 데려가려고 했으나 아일라는 결국 터키 군부대가 수원에 세운 앙카라 학원에 맡겨졌다. 그녀는 김은자라는 새 이름으로 세파를 견디며 살아야 했다. 2010년 이런 사연이 어느 방송프로에 소개되면서 방송사의 주선으로 김은자 씨는 이스탄불에 살고 있는 85세의 아바지를 만날 수 있었다. 감동적인 스토리는 터키 영화 '아일라'로 만들어져 터키에서만 5백만의 관객을 끌어모았다고 한다.
우리 일행도 찻집에 앉아 터키의 명물인 달콤하고 뜨거운 치아를 마셨다.
금각만(Golden Horn)의 끝부분 너머로 고층건물이 즐비한 신시가지가 보이고 전망대에는 젊은 남녀들이 몰려와 저녁놀을 구경하고 있었다.
물 위에 배 띄우고 음식을 먹거나 놀이를 즐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퍼니큘러 스테이션 벽화가 이점을 잘 묘사해주고 있었다.
To be continued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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