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 파리 올림픽이 기대 이상으로 금메달을 많이 따고 폐막이 되었습니다. 여러 모로 88 서울 올림픽과 비교가 되었어요.
P : 이번 올림픽에서는 1990년대 중반 이후에 태어난 1020 Z세대가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서울 올림픽 때 한국이 세계적인 행사를 잘 치뤄낼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지만 대회운영은 물론 세계 각국의 선수들을 환대한 시민정신에 있어서도 역대 올림픽 중 가장 뛰어났다는 찬사를 받았었지요. "Hand in Hand (손에 손 잡고)" 올림픽 송은 지금도 우리 가슴을 뛰게 합니다.
G : 서울 올림픽 개막식과 폐막식도 훌륭했어요. 개막식장에서 조용한 가운데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며 가는 장면이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인상적이었어요. 국궁으로 불화살을 쏘아 성화에 불을 붙이는 방식은 그 다음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양보했지만~.
P : 그래서 오늘은 서울 올림픽 개막식과 폐막식을 진두 지휘했던 이어령 교수의 기념비적인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과 〈지성에서 영성으로〉 두 권을 들고 나왔습니다.
G : 저도 두 권 다 읽었어요.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열림원, 2021.10)은 선생님이 돌아가시기(2022. 2. 26 향년 89세) 직전에 이화여대 제자이기도 한 인터뷰 작가 김지수 씨와 나눈 대담집이었고, 〈지성에서 영성으로〉(열림원, 2010. 3)는 선생님이 장녀의 죽음을 놓고 교토대학 방문학자 시절부터 고뇌하였던 신앙 문제를 다룬 책이었지요.
P : 네, 그렇습니다. 그럼 그 특유의 페던틱한 해설조 내러티브(敍述)는 빼고 몇 군데 이어령 선생님의 생각과 의식구조가 드러나는 대목을 중심으로 소개하기로 하죠.
한밤에 눈 뜨고
죽음과 팔뚝씨름을 한다.
근육이 풀린 야윈 팔로
어둠의 손을 쥐고 힘을 준다.
식은땀이 밤이슬처럼
온몸에서 반짝인다.
팔목을 꺾고 넘어뜨리고
그 순간 또 하나의 어둠이
팔뚝을 걷어 올리고 덤빈다.
그 많은 밤의 팔뚝을 넘어뜨려야
겨우 아침 햇살이 이마에 꽂힌다.
심호흡을 하고 야윈 팔뚝에
알통을 만들기 위해
오늘 밤도 눈을 부릅뜨고
내가 넘어뜨려야 할
어둠의 팔뚝을 지켜본다.
마지막 수업, 22, 23쪽
G : 이어령 선생은 평생 '죽음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죠. 느닷없이 죽음과 팔뚝씨름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요.
P : 일종의 직설법 또는 은유법이라 할 수 있죠. 지병으로 고생하시는 동안 밤에도 그를 괴롭히는 병마와 싸우는 것일 수도 있고, 일반적으로 노년에 처하여 건강 뿐만 아니라 자녀와 가족, 재정문제를 놓고 씨름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1]
인상적인 구절은 그 많은 밤의 팔뚝을 넘어뜨려야 아침을 맞을 수 있다거나, 야윈 팔뚝에 알통을 만들어 놓아야 노후 걱정을 덜 수 있다는 진솔한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나이 일흔이 넘은 사람이라면 '바로 내 이야기'라고 공감하는 이가 많을 것입니다.
그가 유리컵을 가져다 내 앞에 두고 결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중 략)
"이 유리컵을 사람의 몸이라고 가정해보게나. 컵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지? 그러니 원칙적으로는 비어 있어야겠지. 빈 컵이 아니면 제 구실을 못 할 테니, 비어 있는 것, 그게 void라네. 그런데 비어 있으면 그 뚫린 바깥 면이 어디까지 이어지겠나? 끝도 없어. 우주까지 닿아, 그게 영혼이라네. 그릇이라는 물질은 비어 있고, 빈 채로 우주에 넣은 것이 영혼이야. 그런데 빈 컵에 물을 따랐어."
보이차를 따르는 소리가 청량하게 들렸다.
"여기 유리컵에 보이차가 들어갔지? 이 액체가 들어가서 비운 면을 채웠잖아. 이게 마인드라네. 우리 마음은 항상 욕망에 따라 바뀌지? 그래서 보이차도 되고 와인도 돼. 똑같은 육체인데도 한 번도 같지 않아. 우리 마음이 늘 그러잖아.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지."
"네. 날씨처럼 변하는 게 감정이지요."
"그런데 이것 보게. 그 마인드를 무엇이 지탱해주고 있나? 컵이지. 컵 없으면 쏟아지고 흩어질 뿐이지. 나는 죽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내 몸은 액체로 채워져 있어. 마인드로 채워져 있는 거야. 그러니 화도 나고 환희도 느낀다네. 저 사람 왜 화났어? 뜨거운 물이 담겼거든. 저 사람 왜 저렇게 쌀쌀맞아? 차가운 물이야. 죽으면 어 떻게 되나? 컵이 깨지면 차갑고 뜨겁던 물은 다 사라지지. 컵도 원래의 흙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러나 마인드로 채워지기 이전에 있던 컵 안의 void는 사라지지 않아. 공허를 채웠던 영혼은 빅뱅과 통했던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거라네. 알겠나?"
컵 하나로 바디와 마인드와 스피릿, 현존과 영원을 설명하는 이어령 선생님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토록 심오한 이야기를 이렇게 간단하게 풀어버리다니! 스승은 풀피리 불 듯 말을 이었다.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유리컵 안의 빈 공간을 인정하지 않는 거라고. [2] 마지막 수업, 24, 25쪽
G : 저 역시 이 선생님의 글을 처음 접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어느 일간지의 논설위원을 맡아 신문 1면 하단에 시론(時論)을 쓰시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런 말을 하려고 서론에 그렇게 유식한 말씀을 하셨구나! 감탄하곤 했었죠.
P : 저도 기억납니다. 그 시론을 묶어서 〈어느 일몰의 시각엔가〉(1968)라는 다소 멜랑콜리한 제목의 에세이집으로 펴내시기도 했었죠.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너무 아는 척하는 것이 눈꼴 사납다고 그분을 싫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어요. 이어령 씨의 유명한 평론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엉터리다. 어떻게 냉혈동물인 개구리를 해부할 때 김이 모락모락 날 수 있나?"에서 선배 작가를 무식하다고 질타하는 그의 시니컬한 모습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G : 평소 시니컬한 그분의 인격을 놓고서도 한자 이름 寧을 '령'으로 읽지 말고 '안녕'할 때의 '녕'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처럼 논란이 많았었죠.
P : 그런데 그분의 〈문장백과대사전〉(1993), 또 일본문화비평서 〈축소지향의 일본인〉(2008)을 탐독했던 제 입장에서나, 일찍이 디지털 시대의 도래를 예견하고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신 점에 비추어 그분의 지성은 독보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어령 교수는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비유하신 말씀에도 메스를 대었어요. 낙타와 바늘은 결코 비유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당시 예수님은 아람어로 '밧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을 어느 제자가 발음이 비슷한 '낙타'로 받아적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했지요.
G : 그렇군요. 밧줄과 바늘귀가 훨씬 리얼한데 성경 말씀은 일점 일획도 오류가 없다는 신조 때문에 누구나 낙타와 바늘귀로 믿고 있지요.
P : 우리나라 지성을 대표하였던 이어령 교수가 기독교 교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로서도 속수무책이었던 외손주의 일과 지병 때문에 고생이 많았던 따님(이민아 목사, 1959-2012)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런데 〈지성에서 영성으로〉 첫머리에 보면 이어령 교수다운 계기가 있었어요. 바로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일본어로 출간되면서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에 방문학자로 초청받아 교토에 체류하실 때의 일입니다.[3]
나는 그때까지 평론, 칼럼, 에세이와 같은 산문을 써왔지요. 엄밀한 의미로 그것은 창조가 아닙니다. 창조에 대해서 토를 다는 일이지 그 자체가 창조일 수는 없지요. (중 략) 교토에 있는 국제일본문화 연구센터에 혼자 가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곳은 국립기관으로 전 세계의 일본 연구가와 인문학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첫날 나는 그 연구소에 괜히 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 눈에 제일 먼저 띈 것이 불행하게도 바로 대형 복사기 앞에 늘어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책을 카피하기 위해서 줄을 서있었습니다. (중 략)
그래요. 그들은 창조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 같았어요. 단지 무엇인가를 복사할 뿐이었지요. 연구소 사람들은 복사기로 카피를 하고 자판기로 커피를 뽑아 마시는 똑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도 실은 머리에 복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미나에서 끝없이 인용하고 주석을 다는 것도, 논문을 듣고 말하고 기록하는 것도 복사행위가 아니겠습니까. 지성에서 영성으로, 30쪽
교토에서의 생활은 내 눈을 다시 논어에서 성경으 로 돌리게 하였습니다. 논어를 모르는 사람도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이면 불역열호(不亦說乎)'의 논어 첫 장 첫 귀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랬지요.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배우는 것의 기쁨이며 즐거움이었지만 성서의 첫 장은 창조하는 것의 기쁨이며 그 즐거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때에도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창조주의 권능으로 별을 만들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내 외로운 가슴 속에 존재하지 않는 별 하나를, 마음 속에 반딧불만한 별 하나만이라도 지닐 수 있게 된다면 당신을 위해 내 안의 모든 말들을 다 바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무쇠처럼 굳어진 저 시장바닥의 사람들 가슴을 풍금처럼 울릴 수 있게 하는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쓰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천지창조 엿샛날 같은 느낌으로 최초의 아담 같은 마음으로 시 한 줄을 쓸 수만 있다면 다시는 글을 쓰지 않아도 좋다고 말입니다. 위의 책, 30, 31쪽
G : 평생 특출한 아이디어로 남다른 글을 써오신 분으로서 하나님께 그런 기도를 하실 법도 하네요.
P : 그런데 비평가요 기호학자인 그분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셰레를 받으셨지만 보통사람 같은 신앙생활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사례를 보면 단순 무식한 믿음을 갖지는 못하셨구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 DABDA 5단계설로 유명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는 최초로 죽음학을 했고 죽음에 대한 강의를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정작 자기가 암에 걸리고는 감당을 못 했어. 그것을 본 한 기자가 물었지.
'당신은 임종하는 사람을 지켜보며 그렇게 많은 희망을 줬는데 왜 정작 당신의 죽음 앞에서 화를 내고 있느냐?'
로스가 이렇게 답했다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타인의 죽음이었어, 동물원 철창 속에 있는 호랑이였지. 지금은 아니야.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나한테 덤 벼들어, 바깥에 있던 죽음이 내 살갗을 뚫고 오지. 전혀 다른 거야.'
전두엽으로 생각하는 죽음과 척추 신경으로 감각하는 죽음은 이토록 거리가 멀다네."
시한부 삶을 선고받을 때 인간은 부정(denial), 분노(anger), 타협(bargaining), 우울(depression), 수용(acceptance)의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가르쳤던 정신과 의사 퀴블러 로스, 그토록 오래 죽음에 훈련된 사람도 보통의 인간들처럼 부정과 분노로 출발 해서 똑같은 절차를 거쳐갔다니. 철창 속의 호랑이와 철창 밖의 호랑이라는 말에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죽음 앞에 인간은 얼마나 몸서리치게 작은가.
"죽음 앞에서는 연습도 오만이라고 이근후 정신의학자도 그러더군요. 살아서 하는 임종 연습조차 어릿광대 같은 놀음이라고요"
"데레사 수녀도 다르지 않았다네. 로스처럼 죽음을 저주하지는 았지만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었다고 탄식했지. 성처녀 였으나 고통스럽게 죽었어. 암환자였던 신부 이야기도 있어, 암환자인 신부가 고해소에 앉아 다른 신부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네.
'나 암이야.'
'안됐군. 그런데 나도 암이라네. 그런데 자네는 내게 무슨 고해를 하려고 왔나?'
'....... 여태껏 나는 신의 부르심(calling)이 없었어.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았다네.'
'.......자네, 정말 몰랐나? 지금 자네가 나한테 고해성사를 하고 있잖나. 그게 콜링이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지.'
자. 이 대화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나?"
"고통 속의 의심, 진정 토로...... 그 자체가 신의 부르심이라는 말씀인가요?"
"맞아. 그게 신의 응답이지. 로스도 그 신부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고통 없는 죽음이 콜링인 줄 알았나? 아니야. 고통의 극(極)에서 만나는 거라네, 그래서 내가 누누이 이야기했지. 니체가 신을 제일 잘 알았다고 말일세. 신이 없다고 한 놈이 신을 보는 거라네.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작 신을 못 봐. 니체 이야기를 더 해볼까? 니체가 어떻게 죽은 줄 아나?"
"미쳐서 죽었지요. 광인으로 떠나지 않았습니까?"
"사건이 있었어. 토리노 광장에서 우체국으로 편지 부치러 가다가 늙은 말이 채찍질을 당하는 걸 본 거야. 무거운 짐을 지고 끌고 가려는데 길이 미끄러우니 계속 미끄리지지. 마부에게 채찍절을 당하는늙은 말을 보고 니체가 달려가서 말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네. 자기가 대신 맞으면서 '때리지 마, 때리지 마'하고 울다가 미쳤지.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라고 마지막 말을 웅얼거리고는 십년 긴 식물인간처럼 살다 죽은 거야. 그게 그 유명한 '토리노의 말'이지. 그게 바로 니체에게 다가온 신의 콜링이라네."
"무슨 말씀인지요?"
"토리노 광장에서 얻어맞는 말이 예수야. 채찍질 당하고 허우적대 는 늙은 말. 그게 십자가를 메고 가는 지저스 크라이스트(Jesus Christ)지. 그러니까 가서 말의 목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던 걸세. 자기가 늙은 말하고 무슨 관계가 있겠나? 가까우면 마부하고 가까워야지. 그런데 니체는 그때 인간의 대열에 끼는 게 창피해서 인간을 거절했다네. 인간에서 벗어나려고 한 게 초인(超人)이거든." 마지막 수업, 32-34쪽
G : 90을 바라보는 나이에 비록 암 투병 중이시긴 하지만 죽음에 대해 담담하게 말할 수 있다는 건 굉장히 운이 좋으신 분 아닌가요? 대학교수에 언론인, 문필가,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온갖 명예를 다 누렸고 초대 문화관광부장관도 지내셨으니까요.
P : 평생 호운(好運)을 누리신 건 맞지요. 당신은 운이 좋다 나쁘다 평가해본 적은 없다고 하시지만. 그래도 사람의 운명이란 존재한다고 하시더라고요. 한밤의 까마귀가 안 보이더라도 어딘가에는 있는 것처럼 말이죠. 사람의 탄생, 만남, 이별, 죽음······ 이런 것들이 운명으로 작용한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고대 그리스 이야기를 꺼내셨어요.
그리스 사람들은 운명론자들이었어. 동시에 그들은 합리주의의 극치를 추구했던 사람들이었네. 지금 인간들이 발견한 물리학, 철학, 수학, 천문학, 미학 다 그리스 사람들이 해 놓은 걸 기반으로 하고 있지. 그런데 지혜의 끝까지 가본 그 사람들 이 운명을 믿었다는 거야. 그 증거가 신탁(神託, Oracle)이야. 신이 맡겨놓은 운명. 지혜 있는 자들은 그 운명을 사랑했네. 운명애, 아모르 파티(Amor Fati)라고 들어봤지? 소크라테스, 플라톤 같은 현자들은 다 신탁을 믿었네. 신탁을 믿고 나아갔기에 지혜자가 됐지."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의 출발이지. 소크라테스가 대표적 이야.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한 철학자였어. 그가 지혜를 따라 간 전 운명을 믿었기 때문이라네. 신탁이 아테네에서 가장 똑똑한 자가 소크라테스라고 하니, 궁금해서 길을 나섰지. 그가 살펴보니 아테네 사람들이 다 똑똑한 척을 하는 거야. 자기는 모르는 게 너무 많은데, 사람들은 물어보면 다 안다고 하거든. 그때 신탁의 의미를 깨달았지.
'아! 내가 모른다는 걸 안다는 게 이 사람들보다 똑똑하다는 이야기구나.'
소크라테스는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인간이 알 수 있는 최고 의 지혜라고 봤네. 자신이 무지하다는 걸 아는 자가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 한 사람이었던 거야.
'너 자신을 알라.'
이것도 신탁에 나오는 말이야. 신의 예언을 대언하는 무녀들의 말이었지.
그리스에서 말하는 운명론이란, 있는 힘껏 노력하고 지혜를 끌어 모아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는 거야. 오이디푸스를 떠올려 보게.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를 풀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었어. 그러나 '아버지를 살해할 운명'이라는 신탁에서 벗어날 수 없었어. 결국 자기도 모르게 친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신탁의 운명을 완성하고 말아. 아버지를 죽이고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아들의 운명...... 영리한 프로이트가 그 지독한 비극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따왔잖아.
이걸 이해해야 하네.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도,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도 어찌할 수 없는 저편의 세계, Something great가 있다는 거야. 지혜자만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네. Something great를 인정하고 겸허해지는 것은 머나먼 수련의 길이야."
"[자유의지란] 결정된 운이 7이라 했을 때 내 몫인 3이 바로 자유의지야. 모든 것이 갖춰진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 그게 설사 어리석음일지라도 그게 인간이 행사한 자유의지라네. 아버지 집에서 지냈으면 편하게 살았을 텐데, 굳이 집을 떠나 고생하고 돌아온 탕자(Prodigal Son)처럼…… 어차피 집으로 돌아올 운명일지라도, 떠나기 전의 탕자와 돌아온 후의 탕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네. 그렇게 제 몸을 던져 깨달아야, 잘났거나 못났거나 진짜 자기가 되는 거지. 알겠나?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수만 가지 희비극을 다 겪어야 만족하는 존재라네." 마지막 수업, 82-85쪽
G : '죽음' 이야기를 떼어 놓고 이 책을 보면 인터뷰 상대가 말기 암으로 고통 받으시는 분 같지 않아요. 수준 높은 교양강좌 같다고나 할까요.
P : 우리 삶은 B(출생)와 D(죽음) 사이의 C(선택)의 연속이라고 하잖아요? 유태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이 말하기를 하루하루가 극심한 고난의 연속인 수용소 안에서 나치의 앞잡이가 되어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하는사람과 남을 위해 기끼이 희생하는 숭고한 행동을 하는 사람 두 갈래로 나뉘는 걸 보았다고 했어요. 중병에 걸린 사람도 끝까지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과 남은 시간을 좀더 가치있게 쓰려는 사람으로 나뉘지 않나요.
"[암 선고를 받은 후에는] 이전의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내가 되었지. 어떻게 이렇게 태연하고 관대해질 수 있을까 싶어. 뒤늦게 생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네.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걸. 마이 라이프는 기프트(gift, 선물) 있다는 말은 목사님 같은 소리가 아니야. 내 집도 내 자녀도 내 책도, 내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 내가 벌어서 내 돈으로 산 것이 아니었어.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
올림픽 굴렁쇠도 디지로그도 그전엔 다 혼자 한 줄 알았는 데 병들어 누워보니 다 선물로 받은 것들이라고 했다.
"고난에 처했을 때 해지거나 숭고해지거나 두 부류 로 불린다면, 그것을 가르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영의 일이라네. 보통 때 사람은 육체와 지성, Body와 Mind로 살아가는데 극한에 처했을 때나 죽음에 임박했을 때 Spirit 정적인 면이 되살아나는 거야. 내가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쓸 수 있었던 것도 딸과 손자를 다 먼저 보내는 극한 고난을 겪었기 때문일세.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나는 내 딸처럼 저 너머의 세계에 길게 머무는 영성은 없었어. 나는 아직도 지성과 이성에 매달리고 있지. Body는 넘어섰어도 Mind에 갇혀 있는 형국이야.
인간은 기껏해야 눈, 귀, 코, 입, 피부와 뇌를 도구로 가지고 살지 않나. 위급할 때는 가끔 육체가 초인적인 힘도 발휘해, 불나면 여자 들도 쌀독을 벌떡벌떡 들고 나갔던 것처럼.
그러나 자신을 초월한 영성은 궁극적으로 몸의 바깥에서 온다네. 사고의 바깥에 있지. 다른 세계야. 기도를 통과해서든, 고통을 통과 해서든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힘이라는 거야. 그래서 누가 짐승이 되고 누가 초인이 될지는 몰라. 예측할 수 없네. 오직 겪어야 알지. 백두산 물이 두만강이 되고 압록강이 되듯 0.1초 차이로 벌어지는 일이거든."
고난은 물론 신의 구제도 파도가 덮치고 빛이 쏟아지듯 갑자기 벌어지는 일이라고 했다. 마지막 수업, 231-232쪽
G :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대담 내용이 큰 울림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백조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Swan Song처럼 말이죠.
P : 인터뷰하는 작가 역시 선생님의 한 말씀이라도 놓칠새라 녹음기를 들고 가서 대담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같은 시대를 살았던 한 지성인이 그가 평생동안 애써 천착했던 것을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Book's Day라 그 일단만 소개해 드린 거고요. 우리 조상들은 한 여름의 피서방법으로 찬물에 발을 담그고 책을 읽었다고 해요. 이런 책이 딱이죠. 그런데 요새는 선풍기나 에어컨을 틀어놓고 휴대폰을 보는 것으로 바뀌었대요.
고희를 넘긴 제 입장에서는 인터뷰는 아닐지라도 그와 비슷하게 인공지능 비서에게 내가 평생 공부하고 정리했던 것을 불러주어 후학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간추리는 작업을 해볼까 모색 중입니다. 이어령 교수는 이미 발표한 저서 말고도 이런 대담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지혜로운 말씀을 들려주고 세상을 떠나셨으니 인생을 참으로 효율적으로 사신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Note
1] 生의 위기에 처해서 버거운 상대와 씨름을 하는 것 중에서 가장 극적인 사례는 성경 창세기에 나온다.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권을 빼앗은 야곱은 고향을 떠나 큰 가족을 이루고 많은 재산을 모은 후 20년 만에 고향에 돌아갈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자기를 원수처럼 여기는 형 에서와 어떻게 해후할 것인가 얍복강가에서 밤새 고민한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 그에게 씨름을 걸어온다.
나 역시 송우혜 작가의 소설 〈옛 야곱의 싸움〉(1980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을 읽고나서 비로소 잃었던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 장면을 니스에 있는 샤갈 미술관에서 대작 종교화로 감상할 때에도 전율 같은 것이 느껴졌다.
2] 이어령 교수의 말씀처럼 유리 잔 같은 아름다운 외모는 푸른 나뭇잎처럼 한때 반짝하고 끝나지만 비어 있는(void) 줄 알았던 그 내면세계는 정신수양과 영성개발을 통해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이 말은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가 그의 200행이 넘는 장시 "Ode: Intimations of Immortality"(영혼 불멸의 송/頌)에서 노래한 'Splendour of the grass' 구절과 흡사하다.
나탈리 우드 주연의 <초원의 빛>(1961)에서 여주인공이 학교에서 이 시를 낭독하다가 교실을 뛰쳐나가는 장면에 등장한다.
What though the radiance which once so bright,
Be now for ever taken from my sight,
Though nothing can bring back the hour
Of splendour in the grass, of glory in the flower ;
We will grieve not, rather find
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In the primal sympathy
Which having been must ever be;
In the soothing thoughts that spring
Out of human suffering;
In the faith that looks through death,
In years that bring the philosophic mind...
Thanks to the human heart by which we live,
Thanks to its tenderness, its joys, and fears,
To me the meanest flower that blows can give
Thoughts that do often lie too deep for tears.
한때는 그리도 찬란한 빛이었건만
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초원의 빛, 꽃의 영광의 시간이여;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강한 힘으로 남은 것을 찾으리;
그래왔던 것이 영원하리라는
원초적인 동정심으로;
인간의 고통에서 유래하는
위로하는 생각 속에서;
죽음을 꿰뚫어보는 믿음에서,
철학하는 마음을 가져오는 세월 속에서. . .
우리가 지니고 사는 인간의 감성 덕분에,
그것의 부드러움, 기쁨과 두려움 덕분에,
나에게는 가장 미천한 꽃이 안겨줄 수 있다네,
두려움으로 너무 깊이 자리잡은 생각을.
3] 이어령 교수는 교토 체류 기간 중 약 2km 길이의 '철학의 길'(위의 사진)을 자주 거닐었다. 이 길은 일본의 철학자 니시타 기타로(西田幾多郎 1870-1945)가 이 길을 걸으면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종합하는 연구를 하였고 〈선(禪)의 연구〉라는 저서를 남겼다. 인공수로를 따라서 봄에는 벚꽃, 가을에는 단풍이 매우 아름다운 산책로이다.
철학의 길에는 니시타가 썼다는 "사람은 사람, 나는 나, 어찌됐든 내가 가는 길을 나는 간다"라는 단시(短詩)를 새겨놓은 시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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