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 매월 13일 Book's Day에 책을 소개하신 것도 벌써 몇 십 권이 되지요? 그 대담 기사를 오디오로 만드신다는 계획은 잘 추진되고 있나요?
P : 네, 오늘이 벌써 35번째입니다. 저도 가끔 전에 했던 대담을 다시 읽어보는데 10분짜리 오디오 파일로 만들면 좋겠다 싶어서 이것저것 실험해보고 있어요. 아직 공개할 단계는 못됩니다. 하지만 AI 기술의 진보가 빨라 조만간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G : 오늘 들고 오신 책은 일반 도서가 아니네요?
P : 네, 산업은행 재직 시 상사이셨던 일산거사 지암(一山居士 芝巖) 김한갑(金漢甲) 선생님이 저에게 보내주신 책들입니다. 개인적으로 출판하신 한정판 비매품 도서이지요.
G : 어떤 내용인데 개인사도 한두 권이면 족한 것을 여러 권 출간하셨을까요?
P : 제가 읽어본 책 내용을 개략적으로 설명드리면 우선 기사회생전(起死回生傳)은 '내가 걸어온 길'이란 부제처럼 1932년생으로서 조국광복과 6.25전쟁, 경제의 재건과 개발금융, 전환기의 금융, 기업구조조정을 헤쳐나온 은행원으로서의 개인사를 담고 있어요.
또 지암비록(芝巖祕錄)은 '황혼의 빛과 그림자'라는 부제를 붙이셨는데 평소의 인생관, 세계관을 아흔의 나이에 진솔하게 서술하신 책입니다. 앞서의 책에 쓰지 못한 해외 여행기, 건강문제, 골프 이야기도 추가하셨어요. 금년에는 골프에 관한 에세이를 출간하신 데 이어 영문판도 잇따라 펴내셨지요.
끝으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비밀은 당신의 병력과 증상별 치료법을 상세히 기록해 놓으신 책입니다.
심장병을 생명과 직결되는 중증질환(重症疾患)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학계(學界)와 의료계(醫療界)에서 일찍이 이에 대한 연구와 보고서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대부분은 수술과 치료를 직접 담당하는 입장에서 또는 학술적 측면에서 발표되는 것이 대부분이고, 환자의 입장에서 수술과 치료를 받는 사람의 인간적 측면(人間的側面)을 대변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에 마침 나 자신이 10여년전 심근경색(心筋梗塞)을 앓아 심장혈관에 대한 대수술을 받고 그 사후치료에 심혈을 쏟아놓고 보니. 환자의 입장에서 이를 대변하여 잠재적인 심장병환자와 의학계에 앞으로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입장에서 이를 요약 기술하게 되었다.
심장병환자는 대부분 수술 후에 극도의 심신쇠약과 정신적 혼란을 겪기 때문에, 이를 사후적으로라도 회상하여 기술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고 본다. 환자 측면에서의 글이 많지 않다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에 나는 기억이 남아 있고 기력이 다소나마 있을 때, 이를 일기식으로 요약 정리하여 오다가 이번 기회에 이를 종합 정리하였다. 환자의 하나의 목소리로 받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생로병사의 비밀], 머리말 6-7쪽
G : 어떤 내용일지 짐작이 가는데 대단한 열정과 기록 정신을 가지신 분이네요. 90 연세에 출간하셨다는 것도 놀랍고요.
P : 차차 주요 내용을 소개하겠지만 어느 학자도 쓰기 어려운 내용을 프라이빗한 것까지 체계를 세워 정리해 놓으셨습니다. 일례로 [생로병사의 비밀]에서 밝힌 질병의 상세 내역과 처방전, 치료방법은 의료 데이터베이스로서도 손색이 없어요.
평소에 메모를 해놓고 일기 쓰는 습관을 갖고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G : 전에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나서 해주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여 사람들이 피난하기에 바쁜데 그 상황을 기록으로 남겨 역사에 묻힐 뻔한 사건을 후세 사람들이 정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 사람이 있었다고요.
P : 그런 점에서 최고봉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라 할 수 있어요. 임진왜란 당시 전황이 급박하게 바뀌고 몸도 많이 피곤하셨을 텐데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하며 먹을 갈아 붓으로 일기를 쓰셨을지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그러나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을 기록해두었다가 나중에 책으로 펴낸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을 보면 그러한 동기나 심정이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 그는 수용소 입소 당시 품안에 간직했던 로고 테러피(Logotherapy)에 관한 논문 뭉치를 독일군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휴지조각이라도 발견하면 거기에 논문의 개요와 수용소 경험담을 빼곡히 적어 보관했다고 하죠.
G : 그럼 일산거사님은 직장에서는 어떤 분이셨어요?
P : 1980년대 초 제가 산업은행 조사부에서 행원으로 근무할 때 조사부장을 하셨습니다. 매우 근엄하고 자신감에 차 있는 분이셨어요. 직장에서는 까마득한 상사라 평소에는 만나거나 이야기할 기회도 별로 없었지요. 당시 조사부는 경제 및 산업조사는 물론 산업활동 통계조사와 법제조사, 문헌정보까지 관장하였기에 직원 수가 거의 100명에 달하는 매머드 부서였거든요. 그때 마침 새로 부임한 총재(산업은행은 일제 때 만든 식산은행의 후신으로 해방 후에는 조선은행과 중앙은행 지위를 높고 경합을 벌였던 만큼 은행장 호칭이 총재 Governor였음)가 각 부서장에게 은행 발전방안을 제시하라고 했는데 제가 신입행원 때 국제금융부에서 갈고 닦은 실력으로 산업은행의 현황과 문제점을 적시해 보고한 것이 조사부안으로 채택되었습니다. 그때 저를 눈여겨 보셨던 것 같아요. 그 후에도 같은 부서 라인에서 일한 적은 없었으나 당신이 은행을 떠나 기아 그룹 임원으로 가시고 제가 학교로 옮긴 후 몇 번 저를 부르셔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습니다.
G : 아~ 이해가 됩니다. 산업은행 조사부에서 오래 근무했고 조사부장까지 역임하셨다면 거의 학자인 셈 아닌가요? 그래서 평생 써오신 업무일지, 비망록을 책으로 남기실 생각을 하신 거로군요.
P : 네, 생각해 보니 저하고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네요. 우선 고향이 전북 순창과 남원(제 아버지기준)이고 네덜란드 정부의 펠로우십으로 네덜란드에서 대학원 과정(diploma)을 수료한 것, 그리고 학구적인 성향이 비슷했습니다. 또 선생님이 고향에서 자웅을 겨루었던 동창이 국제법학자인 국제해양법재판소 박춘호 재판관이어서 그 분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그래서 박춘호 교수 전기를 당연히 Wikipedia에 올리려 했으나 위키 관리자가 고인과 사적인 친분이 있어 보인다며 거절을 하여 결국 제가 운영하는 KoreanLII에 올렸습니다. 박 재판관은 본래 영어를 잘하셔서 6.25 때는 통역장교, 그 후에는 문교부 영어교과서 편수관을 역임하셨습니다. 영국 에딘버러 대학교에 어문학 공부를 하러 갔다가 국제해양법에 관심이 생겨 박사학위를 받으신 후에는 국내보다 구미 유수 대학에서 대륙붕 연구를 하셨습니다. 세계에 자랑할 만한 입지전적인 국제법학자시지요.
G : 그래서 일산거사님도 고향 친구분처럼 관심분야를 학구적으로 조사 연구하고 기록을 남기신 것이라 여겨집니다.
P : 학구적이라기보다 평탄할 수 없었던 역사의 격랑(激浪)을 헤치고 어떻게 해서 아흔이 되도록 살아남았나 하는 '기사회생의 삶'에 대한 증언을 후배들에게 해주신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제 와서 그저 이름 없는 저 들판의 무덤같이 말없이 사라지자니 쓸쓸하기도 하고, 오명(汚名)을 떨쳐 세상을 떠들썩하게 놀라게 하는 것도 좋지 않다. 그저 담담하게 과거를 되씹어보며 새로이 지난 날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한 번 걸러내어 마지막으로 기록에 남기는 것도 의의 있을 것 같아서, 이를 나의 '최후(最後)의 증언(證言)으로 남기고 싶은 욕망이 되살아났다. 그것은 어떤 계획적인 기록이라기보다도 그저 생각나는 대로 기억에 남아있는 대로 마지막 기억을 정리하여 남기고 싶은 것을 쓰기 때문에, 일종의 나의 '단상(斷想)'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생각하면 긴 세월이었다. 단순히 나이를 수자로 세어서 길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그 긴 세월이 기기교묘(奇奇巧妙)하게 얼룩지어 엎어지고 뒤집히고 굴러오면서, 어느 누구보다도 어느 시대보다도 기복이 심하고 생의 질과 성격이 달라서, 시간이 지나면 그 진위(眞僞)가 의심되고 그 사실이 은폐되어 이를 증명할 방법이 없기도 할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역사적 사실보다도 그러한 세상 속에서 일개 개인의 기복성쇠(起伏盛衰)가 어떻게 헤쳐 나왔는가 하는 데에 더 생각을 두고 싶었다. 객관적 사실의 진위와 시비를 따지기 시작하면 거기에는 자연히 주관과 객관과의 대립이 격화되고 시시비비 판단이 작용하여 감정의 격화를 수반하게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기사회생전] 9쪽
P :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라 하시면서 소학교(초등학교) 졸업 당시의 '생쥐' 사건을 소개하셨어요.
그 일은 6학년 때 학급반장을 맡아 일본 예비역 장교이던 담임선생이 훈련 때문에 자리를 비운 사이의 자습시간에 학급 감독을 맡고 있었는데 말썽꾸리기 친구가 교실에 들어온 생쥐를 잡아 일본인 여학생 필통에 넣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대요. 나중에 교실에 들어온 그 여학생이 가방을 열었다가 기겁을 하고 놀라서 집에다 말하고 학부형은 일본인 교장한테 항의를 하여 문제를 일으킨 학생은 퇴학 처분을 받았답니다.
그때 선생님은 전주사범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교장이 생쥐 사건 때문인지 추천서를 써주지 않아 순창농림중학교에 갈 수밖에 없었어요. 곧 이어 해방이 되었고 전주사범에 들어간 친구는 교내 좌우익 사상대립이 심하여 몇몇 친구는 순창농림학교로 전학을 와야 했대요. 그러나 공부를 잘한 선생님은 6년제 중학을 4년 반만에 졸업을 하여 두 달 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학도병으로 끌려가지 않아도 되셨답니다. 사범학교 다니던 좌익 학생들과 생쥐 사건의 장본인 여학생은 지리산에 들어가 활약을 하다가 국군의 토벌작전에 희생되었다니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라 할 수 있지요.
G : 선생님은 아주 머리가 좋아서 무슨 시험이든 척척 붙으셨군요.
P : 하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서울대 법대에 지원하지 못하고 중학교에서 쌍벽을 이루던 박춘호 친구가 서울대 정치학과에 진학하는 것을 멀리서 축하해주셨대요. 대신 독학으로 고등고시를 공부할 작정을 하였으나 전시(戰時) 학생증이 필요하여 광주의대 부설 중등교원양성소에 다니셨어요. 부산에 있는 단국대에도 장학생으로 뽑혔으나 학교재단에서 운영하는 사업체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던 중 마침 순창 중고등학교에서 교사 채용을 한다는 말을 듣고 1955년 2월부터 모교에서 영어와 독일어, 서양사를 담당하셨습니다.
중고등학생을 가르치면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보내던 선생님은 1956년 말 또 한 차례 인생의 전기를 맞으셨어요. 기말시험만 보면서 학적을 유지하고 있던 단국대의 졸업시험을 보러 상경했다가 몇 군데 취직시험도 보셨다지요. 그때 동아일보, 외무부, 산업은행에 응시하여 세 곳 모두 합격했는데 급여수준이 높은 정책금융기관인 산은을 택하여 조사부로 배치 받으셨어요. 1957년 20명의 입사동기는 대부분 서울대 법대, 상대, 공대 출신들이었고 단국대는 당신 혼자, 그리고 조선대 출신이 한 명 있었다는군요.
G : 두 분이 고시공부를 하다가 산업은행에 들어가 평생직장으로 삼게 된 공통점이 있네요.
P : 그런 셈이군요. 그러나 선생님은 우여곡절이 더 많으셨어요. 당시 산은 조사부에는 실력파가 많아 대학강사나 정부 직책을 맡는 등 겸업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 병역미필자는 모조리 쫓겨났고 이중직장 근무자들도 양자택일을 해야 했어요. 실직 상태에서 다행히 경제기획원애서 근무하는 산은 선배들이 추천해준 덕분에 선생님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제1차 산업부문을 맡아 임시직으로 일하게 되셨어요. 선생님은 공업화 과정에서 인구의 절대 비중을 차지하는 농림수산업 부문을 어떻게 조화롭게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지에 중점을 두고 계획서를 작성히였는데 일사천리로 혁명정부의 최고회의에서 가결되었다고 해요. 그 후 산업은행에서 복직 신청을 하라는 연락이 와서 1년 만에 조사부에 복귀하셨습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 수립에 참여한 경력도 있기에 정부의 재정자금의 흐름과 이의 효율적 사용에 관한 실태를 상세히 다룬 논문을 산압은행 조사월보에 실으셨대요. 이 논문을 읽은 경제기획원에서 연락이 와서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간부직원들을 대상으로 설명을 하셨다네요. 그러자 재무부에서 파견요청을 해와 마지못해 '우리나라의 재정구조와 정책개관'이라는 보고서 단행본을 출간하고 나왔는데, 재무부에서 장관 표창장과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ISS(국제사회과학원, 현 에라스무스 대학교)의 1년 6개월 과정의 개도국 공직자 대상 국가발전과정(National Development Course) 유학 특전을 부여했어요.
G : 지암 선생님은 뛰어난 머리에 기억력이 좋고 문장실력도 탁월하니 은행원이라도 돈을 다루는 일보다 정책수립과 조사연구 업무에 능하셨군요.
P : 네, 산은 조사부에서 잔뼈가 굵으신 분으로 각종 정책건의를 통해 경제기획원, 재무부와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행내 조사부의 위상을 크게 높이신 분이었어요. 조사부장을 하실 때에는 모든 조사역은 1년에 두 편 이상 논문을 쓰도록 하여 이른바 놀고 먹는 사람을 없애고 논문 못쓰는 사람은 조사부에 올 엄두를 못내게 하셨지요. 1970년대와 80년대 초 조사부장 재임 시의 업적을 몇 가지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금요조찬회의 지속적 운영: 매주 금요일 아침 은행에서 가까운 롯데호텔에서 산은 총재와 자문교수(남덕우, 이승윤 교수 등), 국회 중진의원, 기업체 대표들이 조찬을 함께 하는 동안 조사부 과장이 국내외 경제 및 산업 동향에 대해 브리핑. 신군부 집권 시까지 16년간 매주 개최하였음
* 산은의 투자업무를 분리하고 한국종합화학과 합쳐 종합투자공사를 설립하는 정부안 저지: 1975년 대통령의 상공부 연두순시에서 최각규 장관이 보고한 사항을 자금조달의 애로, 산업투ㆍ융자 업무의 일원화 필요성 등을 이유로 백지화시킴
* 산은법상 국회에 제출하는 경제산업정책 평가보고서에 경제성장과 물가안정 같은 정책과제를 구체적으로 기술함
* 각종 금융ㆍ통계ㆍ공기업 관련 국제회의에 조사부 간부가 고정적으로 참가
* 조사부가 주역이 되어 「한국산업은행 20년사」 발간
[일반 예금은 받지 않고 대형 산업 프로젝트에 자금을 대주던] 당시 산업은행을 '신(神)의 직장' 이라고 불렀다. 한번 들어가면 퇴직할 때까지 신분을 보장받으면서 다른 직장보다도 보다 많은 봉급을 받고 나아가서는 여러 가지 혜택을 받는 기관으로 비판 겸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다닐 때는 신의 직장이라기보다는 '항공모함(航空母艦)'과 같은 거대한 금융기구로서 외부에서 범접할 수 없는 특별한 기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직원들의 사기는 대단하였으며, 직접 대출자금을 취급하는 현업부서 직원은 막대한 권력을 휘둘러 기업체에서는 이들을 감히 무시할 수 없었다. 요사이 퇴직자(退職者) 모임에 가면 가끔 "옛날에 창구에 와서 애걸복걸하던 친구가 지금은 某그룹의 CEO나 회장이 되었다"고 수군거리기도 하는데, 얼마나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기사회생전] 89쪽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항공모함과 같은 이 매머드 은행은 끄떡없이 존속되어왔다. 그 동안 말도 많고 어려움도 있었지만 이 거대한 조직은 정부와 운명을 같이 하면서 장장 60여년간 존속해온 것이다. 그 동안 국제경제환경도 많이 바뀌었고 이제 21세기가 되고 또한 정권이 바뀌면서 국내경제환경 또한 많이 변하였다. 따라서 상하좌우 의사소통이 원활치 못하여 격변하는 정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할 수도 있고, 새로운 환경에 바로 적응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고 발전하는 시대에는 항시 이에 대응하고 적응하여 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며 계속 발전하고 변화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때때로 여기저기서 우려 섞인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그래도 한때 아니 거의 평생을 그곳에 몸담았기 때문에 들리는 소리가 아닐까. [기사회생전] 101쪽
오늘날과 같이 정치 경제 사회가 급변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태어날 때 타고난 성격보다도 이 세상에 태어 난 후에 몸에 붙은 성격과 성질에 따라서 더 많이 변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오늘날에 있어서는 타고난 환경에 너무 집착 말고 더욱 노력하고 공부함으로써 자기의 운명을 바꿔나갈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산업은행에 들어간 이후 나는 여러 사람들과 사귀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래도 조사부에서만 근무를 하였기 때문에 비교적 자주 만나는 사람을 자주 접하게 되어 그 사람들의 성격과 취미를 잘 알게 되어, 곡절은 있었지만 큰 실수는 없었다. 그러나 때로는 잘 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잘 못되어 실수하기도 했다. 또한 좋은 인연을 맺어 좋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고, 때로는 인연이 안 닿아 악연이 되어 끝까지 이를 풀지 못하고 세월이 흘러 가버린 일도 있다.
그렇다. 인생은 순탄한 것이 아니다. 그 원인이 운명이든 또는 성격이든 간에 인생에는 우여곡절(迂餘曲折)이 있는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을 될수록 순탄하게 살아가려고 사람들은 노력하고 있고, 또 고된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하여 우리들은 각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자기 인생을 잘 개척하여 나가고, 어떤 사람은 갈 길을 헤매다 좌절한다. 그것은 각자의 운명이고 각자의 노력의 대가이다. 누구에게도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기사회생전] 194쪽
G : 일산거사님은 25세에 산은에 들어가 55세 정년퇴임하실 때까지 주로 조사부에서 근무하실 때의 이야기를 이 책에 쓰셨습니다. 그에 비하면 근무연한은 짧아도 교수님도 그 못지 않게 우여곡절을 겪으셨는데 어떤 생각과 느낌이 드셨어요?
P : 저는 고시에 떨어진 후 산은에 들어가 주로 국제금융부와 조사부에 근무를 했고, 해외유학 두 번, 뉴욕 주재원 근무 3년 등 22년을 은행에서 보냈지요. 저도 김한갑 부장님 휘하에서 조사부 근무를 했기 때문에 제가 직접 겪은 일도 있지만 그 이전에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저야말로 은행에서 배운 실무 경험을 토대로 대학교수 생활도 20년 가까이 했지만 이 분처럼 열성적으로 산은을 위해 일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행원ㆍ대리를 17년 가까이 하면서 승진을 시켜주지 않는 인색한 고용주라고 원망을 한 적이 많았으니까요.
지암(芝巖) 선생님은 산업은행을 사랑한 만큼 하시고 싶은 말씀도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다음과 같이 두어 단락으로 압축해서 요약할 수 있어요.
꿈이 있기에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 따라서 꿈이 없는 사람은 처량하고 가망이 없다. 앞으로 보다 더 잘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꿈을 이룰 수 있지만,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 무슨 보답이 있으랴.
앞으로 창창한 미래를 갖고 있는 젊은이에게는 따라서 꿈이 많다. 여러 가지 가능성(可能性)이 열려 있으니 그 속에서 골라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준비할 시간이 나이든 사람보다 더 많으니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더 길게 준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경쟁(競爭)을 하지 않으면 안 되며, 남보다 더 노력하고 준비하지 않으 면 낙오되어 꿈이 좌절될 수도 있다. [지암비록] 88쪽
사람들이 등산을 할 때는 일단 정상(頂上) 정복을 목표로 계속 올라간다. 그 올라가는 시간은 길고 험난하다. 몇 시간 이 걸릴 수도 있고 며칠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정복의 순간은 잠깐이고 순간이다. 조만간 내려와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순간의 쾌감을 맛보기 위해 등산을 한다. 몇 시간 또는 며칠간 등산을 하면서 묵묵히 땀을 흘려가며 묵직한 발을 옮긴다. 때로는 외로울 때도 있고 때로는 피로를 느낄 때도 있지만 묵묵히 한 발 한 발 올라간다. 평탄한 길도 있고 울퉁불퉁 험난한 바위 길도 있다. 어쩌다가 발을 헛디디는 경우도 있고 넘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계속 올라가면 마침내 정상(頂上)에 도달한다. 그 때의 쾌감, 그것은 올라가 본 사람만이 안다.
그러나 등산의 기쁨이 정상에 올라감으로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헬리콥터를 타고,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올라갔다고 해서 같은 기쁨을 맛볼 수 있을까? 아니다. 오직 산기슭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감으로서만 진정한 등산(登山)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지암비록] 89-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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