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에서 아침이 밝았다.
어제 저녁 호텔 Floor A에서 저녁식사를 할 때, 비록 나는 빠졌지만, 바깥 해변 풍경이 아주 멋있었다고 한다. 아침 풍경 역시 매우 환상적이었다.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밖에 나가 나폴리 항의 지중해 아침 바다와 해변 풍경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오전 9시 미리 예약해 놓은 폼페이 유적지를 둘러보러 우리 일행은 모두 유적지 안으로 입장했다.
나는 이미 '자전거나라' 투어를 통해 한 번 와본 적이 있거니와 유적지의 거친 도로와 군데군데 경사로는 내 발목 상태에 해로울 수 있으므로 그룹 투어에서 빠지기로 했다.
일반 관람객은 개별적으로 폼페이 투어 예약을 하고 시간에 맞춰 오면 되었다. 주로 영어 가이드가 20명 내외의 한 팀이 구성되는 것을 기다렸다가 참가자들에게 수신기를 지급하고 이태리인 현지 가이드와 동반 입장하는 시스템이었다. 투어 소요시간은 2시간 정도라고 말했다.
나는 우리 일행이 관람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입구의 카페에 앉아 베수비오 화산 폭발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당시 로마인들은 베수비오 산이 활화산임을 알고 있었지만 나폴리 항구에 가까운 폼페이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주로 귀족과 부유층이 많이 살았다.
AD79년은 로마제국이 안정기에 접어든 때였다. 악명 높은 네로 황제의 사후 군인 황제들이 연이어 등장했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유대-로마 전쟁(AD66-70)을 승리로 이끈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은 안팎으로 신망이 두터웠다. 그는 유대 전쟁터에 가 있다가 69년 황제에 옹립된 이래 왕권을 공고히 하고 있었다. 황제가 된 그는 제국의 국력을 과시하고 로마 시민에 대한 감사도 표할 겸 로마 한 복판에 大원형경기장 건설에 착수하였다.
암살 또는 자살로 끝난 전임자들과는 달리 황제가 79년 6월 자연사한 후 큰 아들인 개선장군 티투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그가 정복지 유대 땅에서 데려온 약혼녀 버니게 공주(Bernice, 사도행전 25:13)와의 결혼을 둘러싸고 로마의 국론이 분열 위기에 처했다. 로마 시민들은 카에사르가 이집트에서 데려온 클레오파트라 때문에 온 나라가 난리를 치룬지 얼마 안 되어 제2의 클레오파트라를 맞을 순 없다며 반대 여론이 비등하였다.
79년 몇 차례 지진으로 조짐을 보이던 베수비오 화산이 8월 24일(10.17라는 설도 있음) 낮에 하늘 높이 화산재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당시 로마 정계 역시 버니게 건으로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티투스 황제는 AD70년 유대 전쟁의 마지막 예루살렘 공성전에서 로마군이 큰 피해를 입자 예루살렘 성 함락 직후 헤롯이 증축한 성전을 잿더미로 만드는 등 무자비한 살륙과 약탈전을 벌인 바 있었다. 금빛 찬란하던 성전은 금을 벗겨내려는 로마 군인들로 인해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로 "돌 하나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마가복음 13:2).
베수비오 화산의 첫 폭발 이후 많은 사람이 배를 타고 도시를 탈출하였다. 그런데 바람이 나폴리가 아닌 폼페이 쪽으로 불었다. 그날 밤과 이튿날 새벽 엄청난 열기와 함께 유독가스가 바람을 타고 폼페이 시를 다시 한 번 덮쳤다. 그로 인해 남아 있던 2000여 주민들 대부분 질식사하였고 잇따라 분출된 화산재에 몇 겹으로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발굴작업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 후 1500년 동안 폼페이는 지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티투스 황제는 재위 2년 만에 81년 의문의 열병으로 돌연사 하고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형과는 성격이 판이했던 황제는 콜로세움 신축 기념으로 연일 검투사 경기 축제를 벌이고 로마 시민들에게 무제한 '빵과 서커스'라는 향연을 베풀었다. 황제가 친히 검투 경기를 벌이는 등 기행과 악행을 일삼다가 96년 왕비와 궁정관리 등의 음모로 근위대장에게 암살 당하고 말았다.
자연재해 앞의 인간의 무력함을 절감하며 폼페이를 떠났다.
좁은 해안도로를 따라 아말피까지 가는여정이므로 중형 버스로 옮겨타야 했다.
일차 목적지인 '포지타노' 하면 미국의 미남 트럼피터 크리스 보티가 연주한 애조를 띤 "포지타노의 계단"(The Steps of Positano) 멜로디부터 떠오른다. 또 다이안 레인이 주연을 맡은 〈투스카니의 태양〉(Under the Tuscan Sun, 2003)에서도 포지타노가 잠깐 등장한다. 이혼을 하고 상심해 있던 미국 여성이 그녀를 위로해주던 친절하고 잘 생긴 이태리 남자를 찾아 물어물어 포지타노까지 찾아 오지만 그가 이미 결혼한 걸 알고 돌아서는 장면에 잘 어울리는 곡이다.
이윽고 우리 일행이 탄 버스는 아말피 주차장에 도착했다.
성당이 있는 광장에서 자유시간을 보내다가 예약해 둔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분수대를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 하단의 여성 젖가슴에서 분수가 나오고 있었는데 우리 부부로 하여금 이탈리아 여행을 결심하게 만들었던 EBS 프로에 소개되었던 트레비소의 분수와 모습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 부근의 상업이 번창했던 도시 트레비소 편을 다룰 때 16세기 중반의 지독한 가뭄을 극복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풍요와 번영의 상징으로 만든 분수(Fontana delle Tette)라고 해설자가 소개한 바 있다. 하기야 분수를 비롯한 모든 조각상의 원형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형상이니 누가 누구 것을 베꼈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우리 일행을 위해 예약해 둔 식당은 인테리어가 흰 벽면에 푸른 도자기로 물고기의 형상을 장식하여 깔끔하고 시원해 보였다. 메뉴는 처음으로 쌀로 만든 리조또와 홍합이 나왔다.
오늘로써 이탈리아 남부 여행은 마무리 짓고 내륙 코스를 택해 로마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 일행은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아말피 광장을 한 번 더 둘러보고 주차장이 있는 해변으로 나와 바닷가에서 일광욕과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을 부럽게 바라보았다.
일행이 모두 모여서 버스에 탑승한 다음 우리 버스는 해안도로가 아닌 산을 넘어 내륙으로 진입한 후 일로 로마를 향해 달렸다.
점심도 잘 먹었겠다 주변을 살펴보니 온통 여름 바캉스 분위기였다. 흥겨운 음악이 빠질 수 없다.
여기서 가까운 라벨로라는 마을에서는 매년 7월에서 10월까지 큰 음악 축제가 열린다는 타일 모자이크 광고가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우리는 갈 길이 멀었다. 시간이 걸리는 좁은 해안도로 대신 저 높은 산을 넘어 내륙으로 진입하여 로마로 가야 한다.
마침 이태리 음식에 질릴 때쯤 오늘 저녁에는 한식이 나온다고 하여 은근히 기대에 부풀게 만들었다.
로마에 도착한 후 맨 처음 한 일은 한식당에 들러 맵고 얼큰한 한국 음식을 마음껏 먹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오래 살다 온 서남아 출신의 주인 겸 주방장이 우리를 위해 푸짐하게 한 상을 차려내었다.
Annex : Pompei House of the Bettii
“낮 한 시쯤 어머니가 구름을 가리켰다. 막 생성된 그 구름은 크기도 모양도 이상했다. 어떤 산에서 피어오르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나중에야 베수비오로 드러났다. 나무처럼 몸통이 뻗어가다 가지로 갈라지는 듯한 구름은 우산소나무와 빼닮은 모습이었다. 잠시 뒤 어두컴컴해졌다가 연기나 구름으로 흩어진 뒤 진짜 햇살이 돌아왔다. 하지만 태양이 빛나는 모습은 마치 일식 같았다.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뒤바뀌고 또한 눈처럼 쏟아진 재 속에 깊숙이 묻혔기 때문이다. 小플리니우스가 역사가 타키투스에게 보낸 편지의 베수비오 화산 폭발 목격담 (AD79)
폼페이 유적(1894~1896 발굴) 중에서 20년간의 복원 작업을 마치고 2023년 1월 일반에 공개된 베티의 집을 보면 당대 로마인의 스타일과 취향, 패션을 반영하는 생활의 축소판임을 알 수 있다. 이 집은 노예 신분을 벗어난 아울루스 베티우스 콘비바와 아울루스 베티우스 레스티투투스 소유였던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들은 당대의 주요 수출품이던 와인과 농산물 유통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한 것으로 보인다. 집은 형형색색 프레스코로 치장돼 있고, 기도실은 계단으로 장식돼 있다. 부엌과 주변 공간, 그리고 노예 및 가사 도우미들의 거주 공간도 있다. 집 가운데 있는 정원에는 기존 조각상의 모조품이 세워졌고, 유실수와 채소를 기르는 농장이 붙어 있었다. 복원된 벽화 중에는 곰치(뱀장어를 닮은 바닷물고기)가 담긴 바구니 등 전에 볼 수 없던 그림의 세부적인 장면도 볼 수 있다.
폼페이 고고학 공원의 새로운 특징은 지붕에 로마 시대의 타일처럼 생긴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여 자체 전력을 조달하는 등 친환경적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출처: 프란체스코 알베르티 (이탈리아 저널리스트·前 마이니치신문 기자), [유럽 통신] "테이크아웃 원조는 2000년 전 로마인들", 조선일보, 2023.03.01.
⇒ 이탈리아 8. 로마, 에필로그
⇒ 이탈리아 6. 소렌토, 카프리, 나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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