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남과 다른 특이한 취미가 하나 있다.
그것은 신문 스크랩하기이다.
1970년대 말 처음 직장생활을 할 때 상사가 니케이(日本經濟新聞) 기사에 빨간색연필로 표시를 하면 여비서가 그 기사를 오려 스크랩북에 주제별로 정리해 놓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업무상으로 국제금융시장 동향을 파악할 때 그 신문 스크랩 북은 귀중한 정보원(source)이 되었다.
그래서 나도 처음엔 사무실에 배달되는 경제신문을 가지고 스크랩북을 만들어 보았다. 그러나 이것이 한두 권씩 늘어나면서 공간이 부족해졌다. 언제까지 이것을 지속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리고 신문기사를 오려서 스크랩북에 붙이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나중에는 기사가 들어 있는 지면을 통째로 뜯어서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그러나 제때 자료를 찾는 게 쉽지 않아 개인용 PC를 마련한 후에는 PC에 필요한 정보를 요약 정리해 놓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 중의 하나가 인터넷에 올려져 국제경영학 교재에도 종종 인용되는 SK증권 v. JP 모르간 사건의 전말이다.
PC의 성능이 좋아지고 인터넷에서 신문기사를 직접 검색할 수 있게 되자 신문 스크랩 방식도 크게 달라졌다. 인터넷에서 신문기사를 검색한 후 그 기사를 통째로 또는 간추려 내 나름대로 주제별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것이다. 따로 DB프로그램을 쓴 것은 아니었으나 아래한글 파일에서 '찾기'로 검색하면 바로 필요한 자료를 찾아볼 수 있어 아주 편리했다.
How to digitalize data
교수 시절에는 관심분야가 크게 확장되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내 스스로 어떤 분야가 유망해보여 나중에 연구과제로 삼을 만하다 싶으면 일단 스크랩부터 하고 보았다. 그러자 PC의 데이터베이스에 축적되는 정보량도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때 같이 하게 된 것이 Daily report라 하여 매일매일 업무일지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여기에는 학교 강의의 특이사항도 메모해 두었는데 나중에 연구과제 신청서를 작성하거나 학교에 휴강 보강 계획서를 제출할 때 많은 참고가 되었다.
전 직장에서 했던 것처럼 그날의 날씨와 주요 뉴스도 함께 메모하는 것이 정례화되었다. 이것을 10년 이상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스크랩 대상은 신문이나 잡지 기사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영화의 대사나 플롯일 수 있고 지하철역 승강장에 게시되어 있는 시나 좋은 글일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오래 두고 찾아볼 만한 글이면 일단 오려두든가 사진으로 찍어 보존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지하철역 승강장에서 마음에 드는 '사랑의 편지' 글[1]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이 영어로 옮겨 음미해 보았다.
When life gets busy (바쁘게 살다 보면)
Sangjin Yoo / Pastor of Sekwang Church
It is necessary to work toward a goal.
But if you just focus on goals, you lose your relationships.
That’s the relationships between friends and family.
Love is an important driving force in life.
Relationships are an important part of life, and happiness is found in them.
John Gartman, a psychologist specializing in couples, says that reflecting on past memories can help you recharge your current love.
Looking back on the first time you met, remembering you didn't want to part, or the feeling of anxiously awaiting a call can help you stay connected.
When life gets busy, it's easy to forget.
Do you remember your first love?
Think back to a time when love was the goal of your life.
Fill today with happy memories of that time.
Then you can experience a more special love tomorrow.
How to utilize data
문제는 개인 PC에 파일 형태로 들어 있는 각종 데이터를 개인적으로 활용하느냐, 나아가 다른 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게 할 것인가 정하는 일이다. 전자는 개인 블로그에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는 형태로 올리는 것이고, 후자는 다른 사람도 읽을 수 있게 부가가치를 높여 책자나 전자적으로 출판(value-added publishing)하는 것이다. 요즘은 참고가 될 만한 인터넷 자료인 경우 인공지능 학습자료(deep learning)로도 쓰일 수 있으므로 전자적 형태의 출판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본다.
며칠 전 서재의 한쪽 구석에 쳐박혀 있는 신문 스크랩 더미에서 2017년 신년 벽두에 모 일간지에 실린 작가 송우혜의 이순신 리더십에 대한 기사[2]를 발견했다. 위해 말한 신문 스크랩 활용 세 가지 방법 ① 블로그의 글감으로 활용, ② KoreanLII 같은 온라인 출판, ③ 장래 이용을 위한 디지털화 어느 것에 적합할지 결정하고 처리해야 했다. 이제는 미니멀리즘이 아니더라도 내 나이로 보아 더 이상 방치해둘 순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블로그에 이야깃거리를 올리는 식으로 자연히 해결을 보았다.[3]
여기서 장문의 글을 요약하는 데는 챗GTP 같은 생성형 AI가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음을 덧붙이고자 한다.
아래 오드리 헵번이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장면은 영화 <티파니에서의 아침을>(1961)에 나오는 명 장면으로 당연히 스크랩 대상이었다. 그녀가 부르는 "Moon River"는 OST 비디오 클립과 함께 영ㆍ한 대역 가사를 찾아볼 수 있다.
How to find Joy from article clipping
정년퇴직한 다음 내 PC 여기저기 파일로 저장돼 있는 스크랩 기사를 볼 때마다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이었다.
그래서 예를 들면 Travel & People의 Book's Day 대담 같은 블로그 기사를 만들고 KoreanLII에도 항목을 추가하는 등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이 찾아볼 수 있도록 했다. 그럼에도 이를 통해 햇빛을 본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나머지는 사장될 참이었다.
얼마 전 이러한 나의 심정을 달래주는 시 구절 "나 또한 무언가를 이루리 / 그리고 이루는 가운데 기쁨을 누리리 / 비록 내일은 그것이 / 꿈 속의 빈 말처럼 들릴지라도" 를 발견했다. 취미 생활로 신문 스크랩을 한다면 그 자체로 기쁨을 얻는 것에 만족해야지 거기서 다른 이득을 보려 하는 것은 실망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20세기 초 영국의 계관시인 로버트 브리지스(Robert Seymour Bridges, 1844-1930, Poet Laureate 1913-1930)의 시 전문을 아래 소개한다.
I Love all Beauteous Things by Robert Bridges
아름다운 모든 것을 사랑하리 - 로버트 브리지스
I love all beauteous things,
I seek and adore them;
God hath no better praise,
And man in his hasty days
Is honoured for them.
난 모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네
난 그것들을 찾아서 찬미하네
신은 더 없는 찬양을 받으며
사람은 바쁜 나날 속에
그것을 영예롭게 여기네
I too will something make
And joy in the making;
Altho’ to-morrow it seem
Like the empty words of a dream
Remembered on waking.
나 또한 무언가를 이루리
그리고 이루는 가운데 기쁨을 누리리
비록 내일은 그것이
꿈 속의 빈 말처럼 들릴지라도
잠에서 깨자마자 기억하리
Note
1] 사랑의 편지
바쁘게 살다 보면 - 유상진/세광교회 담임목사
목표를 향한 노력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목표만 바라보다 보면 관계를 잃어버립니다.
친구 혹은 가족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사랑은 중요한 삶의 원동력입니다.
관계는 삶의 중요한 요소이며 그 속에 행복이 있습니다.
부부 전문 심리학자 존 가트만은 과거의 기억을 되돌아보는 것이
현재의 사랑을 충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첫 만남, 헤어지기 싫은 기억, 애타게 연락을 기다리던 감정을
돌아보는 것이 관계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말입니다.
바쁘게 살다 보면 잊어버리는 것이 많습니다.
처음 사랑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사랑이 내 삶의 목표였을 때를 떠올려 보세요.
그 시절 행복했던 기억으로 오늘을 채워 나간다면
내일은 더욱 특별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2] 송우혜 작가, 특히 그의 소설 〈옛 야곱의 싸움〉(1980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은 나의 젊은 시절 사법시험에 떨어져 의기소침해 있을 때 나의 자존감을 일깨워주었다. 고시 낙방생인 주인공이 당시의 시대상황과 맞물려 암울한 처지에 놓여 있다가 얍복 강가에서 밤새 천사와의 씨름에 지지 않은 야곱을 떠올리며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는 스토리로 기억한다.
그때로부터 구약 창세기 속의 야곱은 내 삶의 고비마다 중요한 지침을 내려주곤 하였다. 송우혜 작가는 그녀의 삼촌 송몽규의 고종사촌인 윤동주의 삶과 시를 되살려낸 《윤동주 평전》(2014)을 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그랬던 만큼 조선일보에 그의 역사탐구 - 이순신 장군의 여러 면모를 파헤치는 글이 연재되었을 때 나로서는 그의 연재물이 주목 대상이었고 당연히 스크랩 해 두었던 것이다. 그 첫번째 기사는 "이순신은 과연 출세 늦은 초라한 무장(武將)이었던가?" 하는 기존 통념과는 거리가 있는 다소 도발적인 내용 "선조가 알아본 구국의 재목"이었다.
조선일보, 1917.1.4자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현재 국민 대부분이 알고 있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되기 이전 모습'은 매우 초라하다.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 있는 이순신에 대한 서술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순신은 이 밖에도 여러 숨은 공이 많았다. 하지만 조정에서 아무도 그를 추천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과거에 급제한 지 10여 년이 되어 겨우 정읍 현감이 되어 있었다. 이즈음 왜인의 교만스러운 태도는 날로 극성스러워만 갔다. 임금은 비변사에 명하여 제각기 장수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 하였다. 이때 내가 순신을 천거해서 비로소 수사(水使)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본 사람들은 순신이 갑자기 승진한 것을 의심하는 이도 혹 있었다."
류성룡은 선조 시대에 영의정으로서 임진왜란 극복에 전력으로 헌신했다. 징비록 또한 워낙 유명한 책이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이가 위의 글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심지어 이순신 연구자 중에는 이 기록을 고증 없이 맹목적으로 믿고 악의적 해석까지 첨가해서 "이순신은 권력을 지닌 문신인 류성룡에게 아부하고 빌붙어서 출세한 무장"이라고 기술한 이까지 있다. 실제는 과연 어떠한가? 엄정하게 고증해 보면 놀랍게도 류성룡의 주장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첫째, 류성룡이 기술한 것처럼 이순신은 '과거에 급제한 지 10여 년이 되어 겨우 정읍 현감이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선조 9년(1576)에 과거 급제하고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종9품)으로 임명돼 벼슬길에 들어선 이래 승진과 좌천을 거듭했다. 과거 급제 4년 만인 선조 13년에 발포 만호(종4품)로 뛰어올랐다가 2년 뒤 좌천됐다. 이어 선조 19년에 조산보 만호(종4품)로 승진 임명돼 2년간 재임한 뒤 다시 좌천됐다. 선조 22년 전라도 조방장(직속 상관의 품계에 따라 정3품 또는 종3품에 임명됨)으로 승진해 재임하다가 그해 12월에 정읍 현감(종6품)으로 좌천됐다.
둘째, '조정에서 아무도 그를 추천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서술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임진왜란 발발 3년 전인 선조 22년 1월, 일본의 강력한 침략 조짐에 막중한 위기의식을 느낀 선조가 신하들에게 "무장을 추천하라"고 명하자, 당시 조정의 최고 실세였던 병조판서 정언신과 우의정 이산해가 이순신을 추천했다(선조실록, 선조 22년 1월 21일). 그뿐만 아니다. 같은 해 선조 자신도 이순신을 추천했다. 그는 비변사(국방과 군사 업무를 전담했던 최고 권력기관)에 "이경록 이순신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논하여 아뢰라"고 명했다(선조실록, 선조 22년 7월 28일).
셋째, '이때 내가 순신을 천거해서 비로소 수사가 되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이순신이 정읍 현감으로 있던 선조 24년 2월 12일에, 선조는 비변사에 "이천, 이억기, 양응지, 이순신을 남쪽 요해지에 정송(定送)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고 명했다(선조실록, 선조 24년 2월 12일). 네 사람이 남쪽 바다를 지키는 수사가 되도록 각자 부임할 임지를 정해주라는 명령이었다. 그에 따라 당시 우의정 겸 이조판서로서 비변사 당상관이던 류성룡은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배정했을 뿐이다.
그런데 류성룡은 징비록에 왜 사실이 아닌 글을 썼을까?
임진왜란이 종식된 뒤인 선조 31년, 류성룡은 권력투쟁에서 패해 영의정에서 면직되고 삭탈관작까지 당했다. 뛰어났던 그의 업적에도 원통하고 악랄한 폄훼가 대대적으로 가해졌다. "나라를 망친 소인"이라는 말도 안 되는 비난까지 받았다. 권력을 잃은 그는 낙향했고, 고향에 간 지 5년쯤 되었을 때 징비록을 썼다. 아마도 회고록을 쓰는 과정에서 새삼 일어난 세태에 대한 분노와 반감 때문에, 그는 자신의 과거 업적을 다소 과도하게 부풀리고 싶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징비록의 사실과 다른 기술 때문에 후세에 이순신에 대한 평가가 일정 부분 왜곡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3] 국가의 리더십이 위기에 처한 2017년 벽두에 신학을 공부한 송우혜 작가가 이순신 리더십을 파헤치겠다고 했을 때 일반 독자들은 이순신의 역량이 이미 상당 수준의 평가를 받고 있었다는 작가의 말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류성룡의 징비록 기술에 의문을 제기한 작가의 주장에 대해 풍산류씨 대종회 측이 조목조목 반론을 폈다. '징비록'과 '난중일기'를 보면 '누가 천거했느냐'를 논란한다는 것은 후학으로서 부끄러운 일일 만큼 두 분의 관계는 숭고하고 돈독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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