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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댈러스 SMU 캠퍼스에서 배운 것

Onepark 2021. 7. 11. 18:10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됨에 따라 각급학교의 2학기 수업 특히 대학교 강의도 정상화되기 어려울 전망이다.

사실 대학 시절의 거의 모든 일이 캠퍼스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요즘 대학생들이 얻지 못한 그 '무엇'을 어떻게 벌충할 수 있을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대학 강단에서 젊은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해왔기에 내 경험담을 들려주고 나름대로 노력해 볼 것을 당부하고 싶다.

나의 풀타임 학창시절은 1993~94년 1년간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 있는 남감리교 대학교(Southern Methodist University; SMU)[1] 캠퍼스에 있는 로스쿨과 기숙사(Martin Hall)가 주된 무대였다. 그 당시 SMU 로스쿨 수학기는 따로 상세히 소개한 바 있거니와 여기서는 젊은이들에 대한 동기부여(motivation)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

성경 창세기 제30장을 보면 유명한 '임금 협상' 이야기가 나온다.

야곱이 집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에 머물면서 자기를 거두어준 외삼촌의 목축 일을 도왔다. 딸린 식구도 늘어났고 고향에도 돌아가고 싶었기에 라반에게 밀린 임금을 달라고 말했다. 라반이 데릴사위이자 유능한 일꾼인 야곱을 놓치지 않으려고 일어지하에 거절했다. 그러자 야곱은 그의 오랜 목축 경험을 살려 라반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내놓았다. 그것은 흰양과 흰염소 무리만 키우면서 검정놈이나 점박이, 아롱백이, 줄무늬가 있는 게 나오면 그것은 자기것으로 하겠다는 제안이었다. 흰양 사이에서는 검정양이 나올리 없다고 생각하고 라반은 야곱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그 결과는 어찌되었을까?

 

Murillo, Jacob Laying Peeled Rods before the Flocks of Laban c. 1665. Source: mobile Meadows Museum

 

SMU 구내 메도우즈[2] 미술관 입구에는 스페인 화가 무리요(Bartolomé Esteban Murillo, 1617­–1682)의 양떼를 돌보는 야곱의 그림이 걸려 있다.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갔는데 1994년 2월의 어느 날은 느낌이 사뭇 달랐다. "라반의 양떼 앞에 얼룩무늬 가지를 늘어놓는 야곱"(1665)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나는 해외유학 중이어서 인사고과가 정지되는 바람에 직장 정기인사의 승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3] 입사동기들보다 크게 뒤져서 의기소침해 있던 나는 댈러스에서 그리 멀지 않은 데니슨이 고향인 아이젠하워의 생가(맨아래 사진)를 찾아가기도 했던 터였다. 4성장군 아이크도 소령 계급을 17년간이나 달고 있었다는 사실에 작지 않은 위로(그 때 입사 17년차인 나의 직급도 4급)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 야곱은 건강한 흰양 사이에서도 점박이, 검정양이 나오는 것을 경험상으로 알고 있었다. 위의 그림 오른편에 라반의 하인들이 검정양과 점박이 염소 떼를 몰고 멀리 갈 때 그는 흰양과 흰염소들이 물을 마시는 냇가에 버드나무와 신풍나무 껍질을 벗겨 얼룩무늬를 만들어 세워놓고 하나님에게 마음속으로 간구하였던 것이다.

다른 때는 별 생각없이 지나쳤지만, 먼 훗날 멘델이 발견(1865)한 유전 법칙을 오랜 경험과 관찰 끝에 체득한 야곱처럼 전문성을 살리는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

대학 졸업 후 18년 만에 그것도 외국어로 법 공부를 한다는 게 사실 쉽진 않았다. 우선 엄청난 분량의 예습과제(reading assignment)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속독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직장에서 국제금융 조사업무를 맡아했기에 영문 자료 읽는 것은 무리가 없었으나 법률용어가 많은 판례와 논문을 읽는 것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침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존 그리샴의 페이퍼백 소설 《The Firm》, 《Pelican Brief》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법률용어와 리걸 이슈, 스피드 리딩을 연마할 수 있었다. 나 혼자만 보기에는 아까워 어느 월간지에 영화평을 연재하는 가외의 수입까지 얻게 되었다.

 

미국법 시간에 배운 제조물책임(product liability) 소송은 아주 생소한 개념이었지만 마침 중고차를 사서 타고 다녔던 현대 엑셀의 안전벨트와 관련된 소송이었기에 아주 흥미롭게 공부했다. 또 계약법 시간에 나온 'Liquidated damages'의 뜻을 몰라 쩔쩔 매다가 일본의 판사 유학생이 들고 온 영미법 사전에서 '손해배상액의 예정', '지체상금'이라는 해설을 읽고 무릎을 치기도 했다. 누구도 미국 로스쿨의 특색인 소크라테스 문답법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내가 케이스 브리프할 때 발표했던 셰브론 사건은 나중에 학자가 되어 연구논문을 쓸 때마다 여러 차례 써먹었던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그런데 제일 흥미를 느낀 과목은 국제거래법(International Business Transactions: IBT)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다루었던 많은 법률 이슈를 자세히 공부할 수 있었을 뿐더러 피터 윈십 교수의 재치있는 강의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 불가항력(force majeure)과 국제재판관할에 관한 사건을 다룰 때 윈십 교수는 영국 법정의 재판장 석에 앉은 데닝경(Lord Denning)의 목소리를 모사하여 판결문을 낭독하기도 했다.

그래서 귀국하면 폴솜 교수의 IBT 교과서를 번역 출간해볼까 생각하다가 한국 실정에 맞는 국제거래법 책을 IBT 교과서의 스타일에 맞게 써볼 작정을 하고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1995년 말에 출간된 《국제거래법》(경영법무사) 책이고 그 이듬해에는 국제거래의 주요 서식과 사례집을 펴냈던 것이다.

 

* SMU의 상징 댈러스홀 앞 캠퍼스 전경. 로스쿨은 오른편 가려진 코너에 있고 저 멀리 댈러스 도심 마천루가 보인다. 출처: SMU 홈페이지

 

누구를 만나고 사귈 것인가

SMU 캠퍼스에 머물렀던 기간은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참으로 많은 사람과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 

우선 책과 짐보따리를 들고 포트 워스-댈러스 국제공항에 내렸을 때 학교 기숙사까지 데려다 준 대학 1년 선배인 정봉진 교수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당시 삼성그룹 법무실에서 일하다가 JD과정에 파견 연수 중이었다. 로스쿨 LL.M.과정의 동기로는 서울대 법대를 갓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 온 강세원 변호사와 아시아나항공 재직 중 가족과 함께 공부하러 온 문형근 변호사가 있었다. 강 변호사는 대학 18년 후배로서 캐나다 교포인 초등학교 동창과 결혼한 신혼으로 대선배인 나를 깍듯이 대해주었다. 귀국 후에는 국회의원 입법보좌관도 하고 한국과 미국의 로펌에서 일했으며 다시 댈러스로 돌아가 신학을 공부한 후 풀타임 교역자가 되었다. 아시아나항공 법무실에서 일하다 로스쿨에 유학 온 문 변호사는 도서관과 기숙사를 오가며 Bar시험 공부를 해 귀국한 다음에는 항공기 전문 미국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내가 거처하는 마틴홀 옆 기혼자 동에는 가족과 함께 유학온 이중재 변호사와 이융남 박사가 살고 있었다. 나는 뉴욕 주재원 시절에는 여러 사정으로 골프를 즐기지 못했기에 골프채를 들고 겨울이 없는 텍사스로 유학을 갔는데 로스쿨에서는 다들 공부하기에 바빠 골프를 같이 칠 사람이 없었다. 내가 골프채까지 들고 왔다는 소문을 들은 두 분이 나를 곧장 가까운 퍼블릭 코스로 데려가 주었다. 우리는 이 변호사의 부인과 함께 넷이서 골프 라운딩을 즐기곤 했다.

나중에 이중재 변호사는 영어를 잘하는 검사로 변신하여 제네바 총영사관에 파견나간 적도 있으며 검사를 퇴직한 후에는 인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도 했다. 그리고 포트 워스-댈러스 지구에 공룡 화석이 많아 SMU에 와서 박사 및 포스닥 과정을 밟고 있던 이융남 박사를 잊을 수 없다. 귀국 후 이 박사는 연세대 교수를 하다가 몽골 사막에서 진귀한 공룡 화석을 다수 발굴하는 등 세계적인 공룡 과학자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

 

* SMU 로스쿨 졸업생의 2014년 송년 모임. 정해창 전 장관(앞줄중앙), 내리교회 김흥규(뒷줄 오른편에서 네번째) 목사님도 참석하였다.

 

SMU에는 감리교 신학대학원이 있어서 감리교 목사님들의 순례 코스로 꼽힌다. 감리교 아펜젤러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처음 세운 인천 내리교회의 김흥규 목사님도 SMU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내가 유학갔을 때 예술대학에는 석사과정에 바리톤 염경묵 씨가 재학 중이었다. 하루는 내가 영화 《필라델피아》에 나오는 마리아 칼라스의 아리아 "라 마마 모르타"가 감동적이었다고 말하자 기숙사 자기 방으로 데려가 레이저 디스크로 오페라 《앙드레 쉬니어》 전편을 감상하게 해주었다. 로스쿨 JD과정에는 정봉진 교수 외에도 국내 로펌에서 활약하는 김 진 변호사, 외교관에 투신한 김명준 변호사 등이 공부하고 있었고, 신학대학원의 조정래 목사, 정보통신박사 과정의 이상경 박사와도 많은 대화를 나눴다. 

 

SMU 로스쿨은 일찍부터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하버드나 예일 로스쿨만큼 많이 알려져 있었다. 일본에서는 대법관을 여러 명 배출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고 서돈각 전 동국대 총장이 SMU 로스쿨에서 공부를 하신 뒤 특히 1970~80년대 판ㆍ검사들의 해외유학 코스 1순위였다. 법무부장관,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한 정해창 전 장관을 비롯해 서 성 전 대법관, 이진성 현 헌법재판소장, 한상대 전 검찰총장, 장윤석 전 국회의원 등이 SMU 로스쿨 출신이다.

검사를 하던 나의 대학동기들도 고 임내현 국회의원. 이사철 변호사가 SMU 로스쿨에서 LL.M.과정을 마쳤다.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대학동기 오종남 박사도 있다. 그는 경제기획원 관료로서 학위를 받은 후 IMF 상임이사와 통계청장을 역임하였으며 지금은 김앤장 고문, 방송통신대 동문이자 석좌교수로서 매스콤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또 대학 후배인 김양곤 전 외환은행 부장은 나를 따라 SMU 로스쿨에 유학을 하고 경희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인연을 맺었다.

 

캠퍼스에서 배울 수 있는 것

나는 뉴욕 주재원을 3년 하고 귀국한 지 2년 만에 다시 미국 유학을 떠났다. 바야흐로 세계화(Globalization)의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나는 '세계화 바람'을 미국 댈러스의 SMU 캠퍼스에서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당시 멕시코와 국경을 접한 텍사스 주는 북미 자유무역협정(NAFTA) 중심에 서 있었는데 SMU의 경제학 교수 라비 바트라 박사는 로스 페로와 같은 NAFTA 반대론의 입장이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기 위해 그가 발표하는 세미나에 일부러 시간을 내 참석하기도 했다.

 

모 월간지의 논픽션 공모전에 나가기 위해 이른바 "미국 로스쿨에서 체험한 세계화의 바람"을 쓸 작정이었으므로 경험의 범위를 캠퍼스 안팎으로 넓혀 나갔다. 학생회관 극장에서 매주 상영하는 National Preview 영화는 1달러만 내고 무한하게 상상력을 펼칠 수 있었으며, 학기 중 예술대학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오케스트라 공연은 클래식 레퍼토리를 넓혀주었다. 봄방학(Spring Break) 때는 항공편으로 멕시코시티에 가서 아즈텍 박물관과 테오티와칸 유적지를 보고 왔다. 또 영화 《Pelican Brief》에서 본 마르디 그라(Mardi Gras, 사순절 금식기간이 시작되기 전의 사육제 축제)를 체험하러 내 자동차로 한국 유학생들과 함께 뉴올리언스까지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짧았던 SMU 유학시절에는 강의실에서 배운 것도 결코 적진 않았지만, 캠퍼스에서 전공이 서로 다른 유학생들과 어울려 지낸 것, 댈러스 밖으로 여행을 다닌 것이 내 삶을 살지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우리 젊은이들도 강의실과 캠퍼스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책이나 가상세계를 통해 벌충하고자 노력하고 나름대로 기준을 세워 기록해둔다면 두고두고 삶의 귀중한 자산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Note

1] 미국 텍사스주의 중앙부에 위치한 댈러스는 이웃의 군사·교통 거점도시인 포트 워스(Fort Worth)와 달리 금융상업도시로 발달하였다. 특히 석유산업이 발전하면서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이에 남감리교 재단에서는 1911년 지역 유지들과 뜻을 모아  요한 웨슬리의 감리교(Methodist) 정신에 입각한 대학교와 신학대학원을 세웠다. 텍사스에는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 주립대(University of Texas - Austin)와 텍사스 A&M대(링컨 대통령이 농업과 기계공업 육성을 위해 거점지역에 설립한 실업대학교), '남부의 하버드'라는 라이스 대학교도 있지만 SMU는 서남부 지역의 부자들이 자제를 유학보내는 학비가 비싼 사립대학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부호들의 기부금액도 많고 캠퍼스 곳곳에 그들의 이름을 딴 건물들이 즐비하다. 미국의 43대 대통령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예일대와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을 나왔지만 로라 부시 여사의 모교인 SMU에 대통령 기념도서관을 건립하도록 했다.

 

2] 메도우즈 미술관은 텍사스의 석유갑부인 알거 메도우즈(Algur H. Meadows, 1899~1978)가 사별한 부인을 기념하여 1962년 그의 소장품을 학교에 기증하고 건축비까지 내놓아 건립되었다. SMU 캠퍼스의 이 미술관은 스페인 밖에서 가장 값진 스페인 화가의 작품을 소장,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유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메도우즈가 스페인에서 석유개발사업을 벌이는 동안 그의 재력과 안목에 부응하는 콜렉션을 결심하고 미술품을 사모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1948년 메도우즈 재단을 설립하여 각종 자선, 복지사업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메도우즈 콜렉션은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업이었다.

 

* 데니슨에 있는 생가 앞에 세워진 군복 차림의 아이젠하워 동상

 

3] 한국산업은행은 한동안 '신이 부러워하는 직장'으로 알려져 있었고 나도 한 가지 빼놓고는 그 혜택을 다 누린 셈이었다. 경영진이 학술연수를 권장하여 은행에는 미국 유수 대학교의 경제학 석사, MBA 출신이 수두룩했다. 욕심을 내 자비로 박사과정까지 마친 사람은 대학교수나 선임연구원으로 전직하였는데, KDI원장을 역임한 이진순 전 숭실대 교수가 대표적이다. 또한 세계의 금융중심도시마다 사무소를 두고 있어 해외사무소 근무는 모든 직원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다만 한 가지 연공서열제(seniority)로 인사적체가 매우 심각한 게 문제였다.

나의 경우 1970년대의 은행원 이직 사태로 한 해에 4차례나 신입행원을 뽑을 때 은행에 들어간 데다 그 전 입행자들이 승진할 때까지 대기해야 했으므로(이를 "Dam 효과"라 불렀음) 고참행원과 고참대리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결정적인 시기에 미국 로스쿨 석사과정 제1호로 학술연수를 떠났으니 승진의 불이익은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사람 일은 알 수 없다고 분위기가 일변하였다. IMF 위기가 닥치면서 연공서열제가 폐지되고 다면평가에 의한 발탁인사제가 도입되었다. 그때 나는 법무팀장으로서 국내외 현업부점의 애로사항을 앞장서 해결(IMF="I aM Fighting!")하고 정부의 부실채권 정리를 위한 자산유동화(Asset-backed Securitization: ABS) 법제를 마련하는 데 공을 세웠다 하여 2급 승진은 동기 중에서 두 번째로 빨랐다. 3급 승진 때는 동기중 꼴찌였기에 2000년 교수로 전직할 때 아쉬움이 별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