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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Onepark 2021. 5. 5. 11:10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Encounters between Korean Art and Literature in the Modern Age, 2021. 2. 4 ~ 5.30)를 보러 갔다. 언론 보도나 전시를 보고 온 사람들의 후기를 읽어보면 1920년대 이후 국내 화가들의 활동을 문학에 접목시킨 아주 참신한 기획이라고 해서 코로나19를 무릅쓰고 찾아간 것이다.

 

봄비가 내리는 화요일 오후 고궁은 고즈넉했으나 석조전 오른편의 미술관 입구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코로나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소정 인원만 시간제로 입장시키고 있었다. 미리 예약한 사람과 밖에서 대기표를 받은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렸다.[1]

 

* 석조전 앞 잔디밭에서는 대형 스크린을 통해 궁중문화를 소개하는 비디오쇼(온라인에서는 연말까지)가 열리고 있었다. 

전시실로 들어가보니 일제 강점기였던 1920~40년대 문인과 화가들이 서로 어울려 시집도 만들고 신문ㆍ잡지의 시와 연재소설의 삽화를 그린 사례가 시대별로 작가별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1920년대라면 3ㆍ1운동이 일어나고 총독부가 이른바 '문화통치' 정책을 펴면서 신문ㆍ잡지가 속속 창간되고 신식 근대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창작활동에 열중할 때였다.

 

유럽에서 꽃피웠던 '아름다운 시대'(Belle Epoque, 1890~1914)가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을 받지 않은 한반도에는 십여 년 늦게 도래한 셈이었다. 벨 에포크 때 유럽인들은 전쟁이 없는 평화시대에 산업의 발전으로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였다. 1889년 파리에서는 에펠탑이 세워지고 만국박람회가 열려 사람들은 다가올 20세기를 낙관하고 문학과 미술, 음악 전반에 걸쳐 문화 융성기를 맞았다. 대표적인 예술가로는 모네, 르누아르 같은 인상주의 화가, 알폰스 무하 등 아르누보 계열의 장식예술가, 에밀 졸라, 마르셀 프루스트 등 소설가를 꼽을 수 있다.

 

당시 조선의 젊은이들은 만주나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지 않는 한 일제가 들여와 가르치는 신식학문을 배워야 했다. 그러니 전통적인 사서삼경은 관심권에서 멀어지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거나 드물게는 유럽과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사례도 있었다. 그러니 선각자들이 선보이는 서양식 시와 소설, 그림은 당시 젊은이들에게는 환상적이었을 것이다.

 

첫 전시홀에서 눈에 들어온 <별건곤>('별난 세상'이란 뜻)이란 잡지(1933년 7월호)의 표지는 당시의 시대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었다. 한식당, 웃음파는 요리집, 영화관과 카페, 비어홀과 호텔이 있는가 하면 결투장, 자살장이 있어 뛰어내리는 사람도 보이고 산마루에는 '천당에 제일 가깝다'는 깃발을 휘날리는 예배당이 서 있는 그림이었다.

 

* 한국의 로트랙 구본웅 화가가 그린 절친 김해경(이상)의 초상화
* 구본웅, "푸른머리의 여인" (1940년대)
* 길진섭(길선주 목사의 아들로 월북작가), "풍경" (1940년대)
* 황술조, "자화상" (1939, 35세로 요절)
* 황술조, "나부" (Nude, 1938) 

우리 미술사에 있어 이중섭이 등장하는 장면은 애닯기 그지 없다.

해방 전에는 도쿄 유학시절에 교제했던 일본 여성과 결혼도 하고 아들도 낳고 원산에서 잘 살았으나 6.25 전쟁 때 피난을 다니면서 극심한 빈곤을 겪었다.

경북 왜관 구상의 집에 얹혀 살 때에는 그 아들이 세 발 자전거 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가족 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시인 구상의 전도로 가톨릭에 귀의했다는 이중섭의 편지와, 일본으로 건너간 그의 부인이 구상에게 남편의 안부를 애타게 묻는 편지도 전시되어 있었다.

 

1955년 1월 미도파 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은 문우 김광균과 화가 김환기가 팜플렛도 만들어주고 홍보에 힘썼으나 전쟁 직후의 혼란기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전시작품 판매대금으로 일본의 가족을 만나러 갈 예정이었던 이중섭은 얼마 후 행려병자로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홍대 미대학장이던 김환기와 기업을 경영하던 김광균이 팔리지 않은 작품을 사들였고, 김광균은 그의 마지막 길 장례비용을 댔다고 전한다.[2]

 

* 최재덕, "한강의 포플라 나무" (1940년대 초, 김광균 개인 소장)

이번 전시에서 눈길을 끈 것은 문인화가들의 휴먼 네트워크 지도였다. 그냥 아는 사이가 아니라 요즘 말로 '브로맨스'라 불릴 수 있는 돈독한 관계였다.

<문장>지의 편집자로 있던 조풍연이 1941년 결혼할 때 정지용이 "아름다운 여인을 얻었으니 자녀 낳고 오래 살라"고 기원하는 축시를 써서 보내고 다른 예술가들도 특기를 살려 축하 화첩을 만들어 준 것이 이채로웠다. 

 

그리고 큰 전시홀을 도서관처럼 꾸며놓고 도하 일간신문의 연재소설과 삽화를 스크랩북으로 만들어 전시해 놓았다.

춘원의 <무정>은 1만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였으며 여러 차례 판을 바꿔가며 인쇄 제본되어 팔렸다고 한다.

소월의 <진달래꽃>, 정지용의 <시선집>, 서정주의 <화사집>,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 시집의 표지와 장정을 친분 있는 화가들이 만들어준 사연도 소개되어 있었다.

그리고 조선일보 기자를 하다가 만주로 가서 백편의 시를 쓰겠다고 기염을 토했던 백석은 6.25 후에도 이북에 남았는데 그의 프로필과 흰당나귀를 바라보는 나타샤의 삽화가 들어 있는 시가 전시되어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전통적으로 문인화에는 한쪽 귀퉁이에게 한문으로 된 절구(節句)나 그림을 그리게 된 연유를 소개하는 글이 실리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근대 회화작품에는 화가의 서명 외에는 글을 써 넣을 수 없었다. 하지만 1920년대 이후 화가들은 시집의 장정이나 시 소설의 삽화를 그리는 일로 콜라보(協業)를 하였다. 이들 예술가들을 본떠 재능있는 학생들은 곧잘 시화전(詩畵展)을 열고 풍부한 감성을 뽐낸 것 같다.

 

"1930년대 한국의 이미지즘 시를 주도한 시인 김광균이 기록한 대로, 이 무렵 경성의 시인과 화가들은 "시를 그림과 같이, 그림을 시와 같이"라는 명제 하에 함께 어울리며,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영감을 주고 받았던 것이다. 1910년대에 태어난 이 젊은 예술가들은 앞선 세대에 비해 더 나은 교육환경과 동료 의식을 공유할 수 있었으며, 깊은 연대감 속에서도 각자의 개성을 발휘한 진정한 ‘예술가’의 자의식을 성장시켜 나갔다. 이들의 관계는 2인의 쌍으로 설명되기보다는 더욱 다면적이고 입체적이다. 마치 1920년대 ‘에콜 드 파리’의 화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들은 같은 시대정신을 지향하면서도 뚜렷한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 나섰다." [전시회 해설자료]

 

* 정현웅, "소몰이" (1963, 중국에서 유족으로부터 구입)
* 조선일보의 <여성> 1938년 3월호에 실린 백석의 시와 그의 절친 정현웅이 그린 삽화
* 신문사 옆자리에서 정현웅이 스케치한 백석의 잘 생긴 얼굴 옆 모습

이번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기획전에서는 김환기의 비중이 두드러져 보였다. 대학에서 화가 제자들을 육성하는 한편 문우들의 시집 장정을 도맡아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가치가 오르고 있는 개성있는 작품을 다수 제작하였다. 요즘 화젯거리인 '이건희 컬렉션'이 추가된다면 이번 기획전이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해졌다. 

또한 우리나라 문학청년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현대문학> 잡지는 매호 표지를 문인화가들의 그림으로 장식했는데 창간호부터 변화하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 이쾌대(월북 작가), "모란꽃" (1949)
* 이쾌대, "소녀상" (1940년대)
* 김환기, "달밤" (1951, 김광균 개인 소장)
* 김환기, "창공을 나르는 새" (1958)
* 김환기, "항아리와 매화 가지" (1958)
* 김환기가 장정을 담당해 훨씬 업그레이드된 도서들 
* 김용준이 휘문고보 재직시절 교장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그린 "기명절지 10폭 병풍"의 일부
* 근원수필을 쓴 명문장가 김용준이 장정을 맡았던 역사에 남을 책들
* 박고석, "쌍계사 길" (1982)

마지막 홀에서는 시와 수필 등 글도 많이 남겼던 장욱진, 박고석, 천경자, 김환기 등 화가 여섯 분의 작품을 전시해 놓았다. 현대문학은 1955년 창간호부터 문재(文材)가 뛰어난 한묵, 박고석, 장욱진, 천경자, 김환기 등 화가들이 표지화를 그린 것으로도 유명했다.

천경자와 김환기의 그림을 뒤로 하고 한 시간 여의 관람을 마친 후 미술관 밖으로 나왔다.

 

* 천경자, "청춘의 문" (1968)
* 천경자, "꽃을 든 여인" (1982)
* 김환기, "1-VII-1 #207" (1971)
* 2층 한쪽 코너에는 관람객들이 소감을 짧게 적어 붙여놓을 수 있는 설문지가 놓여 있다.

구한말 외세의 각축전에 시달리던 고종황제는 민비 시해 사건 후 여기서 가까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기도 했고, 1905년에는 일본과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그 장소는 중화전에서 화재가 나는 바람에 당시 황실 도서관으로 쓰이던 미술관 뒷편의 임시 궁전 중명전이었다.

이곳에서는 1910년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이 완공되었다. 하지만 1907년 고종이 일제의 강압으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경운궁이 선황제의 거처로 사용되면서 그 이름도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3년 뒤 1910년에는 대한제국이 마침내 일본에 국권을 침탈 당하고 말았으니 덕수궁은 대한제국과 영욕을 함께 했던 것이다.

덕수궁을 나설 때에는 비도 그치고 서울광장에서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할 석탑이 불을 밝힐 채비를 하고 있었다.

  

* 1910년 완공된 덕수궁 석조전
* 대한제국 선포 후 정전으로 쓰였던 중화전은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었다.
* 서울광장의 연말 크리스마스 트리 서 있던 자리에 세워진 4월 초파일 연등제 석탑 모형

백년 전 이 땅에서 명멸하였던 예술가들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가 없을 수 없다.

그 당시에는 신식교육의 영향으로 재능 많은 천재적인 예술가들이 많이 배출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군국주의 일본이 세계전쟁을 벌이며 우리 고유문화를 말살하려 했던 1941년까지 <문장> 같은 문예지를 중심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상당수의 문인・화가가 해방 후 월북하거나 6.25 때 납북되는 바람에[3] 문화예술 발전의 동력을 상실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남북 냉전시대에는 그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지되었으나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비로소 해금되었다.

 

암울한 시기

천재들이 앞당긴

예술 근대화

In the dismal era,
genii gained the momentum of modern art.

신식교육과

동인지(同人誌) 활동으로

의기가 투합(意氣投合)

New education and circle activities
encouraged collaboration.

북에 간 예술가

모진 비바람에

처량한 낙화

Superb artists [going to, or staying] in the North
were like falling petals
due to fierce storms.

백년 지난 지금은?

지연 학연 떠나

각자도생(各自圖生)

What’s up one hundred years after that?
Regionalism and school relations fade away.
Individual artists would find their own paths.

 

Note

1] 덕수궁 미술관은 월요일 휴관(입장료 무료, 덕수궁 입장료는 별도)이다. 사회적 거기두기로 인해 입장인원이 제한되므로 덕수궁 현대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예약하고 가는 것이 좋다. 수・토요일은 저녁 9시까지 관람 가능하다.

 

2] 그 자신이 이미지즘 시인이기도 했던 김광균은 기업을 경영하면서 암울했던 시절 이중섭 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화가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이번 전시회에서 처음 선보인 월북작가 최재덕의 "한강의 포플라 나무", 김환기의 "달밤" 같은 작품은 현대미술관의 근대미술팀장 김인혜 큐레이터가 이번 기획전을 준비하면서 발굴한 것이라고 한다. 김인혜, "‘와사등’ 시인 김광균이 가장 아꼈던 화가…",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조선일보, 2021. 4. 3.

 

3] 이번 기획전에서 소개한 문인과 화가 상당수가 월북・납북・재북 예술가들로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점이 아쉽게 여겨졌다. "그때의 지식인들은 다 이랬나?" 싶을 정도로 정지용, 이태준, 백석, 김기림, 홍명희, 최재덕, 정현웅, 김용준, 이쾌대, 길진섭 등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더 안타까운 일은 북한 체제에서 그들의 예술혼이 더 이상 꽃피우지 못하고 이내 스러져버린 것이다. 이상향(Safe harbor)을 꿈꾸며 고향에 남았던 백석 역시 목숨은 건졌어도 시골로 쫒겨가 험한 노동에 시달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