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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Epic(서사)과 Lyric(서정)의 차이

Onepark 2021. 6. 29. 22:40

어느덧 6월의 끝자락이다.

시작은 차이콥스키의 4계 중에서 6월 뱃노래"과 슈베르트의 "물 위에서 노래함"을 들으며 6월을 맞았다. 그런데 요즘은 장맛비 대신 연일 반복되는 아열대성 소나기(squall) 때문에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Tempest)"가 떠오른다.

 

* 6월의 뱃놀이. 출처: 하림의 이동사모

이 블로그에 올린 "온라인 법률백과사전을 관리하고 시(詩)도 번역 소개하는 동역자를 구한다"는 몇 편의 글 덕분에 지인들로부터 격려와 비판 섞인 위로의 말을 듣게 되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원작 시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은 보통의 실력과 용기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일인데 그 퀄리티를 떠나 수백 편을 번역했다니 그것만으로도 의의가 있다.

2. 그러나 법률 개념과 시를 연관짓는 것은 억지 내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법조인이 시인이나 작가 심지어는 음악가가 될 수도 있지만, 법률이나 시는 그 자체만으로 존립해 온 것 아닌가?

3. 사이트에 광고도 붙이지 않고 돈이 생기는 일이 아닌데 동역자도 없는 작업이 얼마나 지속 가능(sustainable)하다고 보는가?

 

일일이 답변하기도 그렇고, 나 자신부터 언제까지 이 작업을 할 수 있을지 몰라 "예, 예, 감사합니다"하고 말았다.

하지만 작금에 일어난 몇 가지 일들로 마음의 위안을 얻게 되었다.

 

하나는 3년 전에 미래의창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한 《꿀벌과 철학자》라는 책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니체까지, 왜 철학자들은 꿀벌의 세계에 탐닉했는가"라는 부제가 말하는 것처럼 여러 철학자들이 꿀벌의 습성과 행태를 관찰하면서 인간세계에 적용하고 보편적인 진리를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이 책을 쓴 공저자 프랑수아 타부아요와 피에르앙리 타부아요는 형제간인데 형은 전문 양봉업자, 동생은 소르본 대학의 철학교수로서 20여년에 걸쳐 같이 꿀벌에 관한 책을 쓰기로 하고 마침내 결실을 맺어 책으로 펴낸 것이라 했다. 일견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꿀벌과 철학 사이에서도 수많은 이론과 이야깃거리가 등장하고 있다. 하물며 본래 신이 내려준 法(함무라비 법전, 유대교의 십계명 같은 규범)이 운문(韻文) 형식이었으니 시와 법률은 그 뿌리가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는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인간이 이것저것 덧붙인 것이니까~

 

* 모세가 돌판에 새긴 하나님의  십계명. 출처: 영화 《십계》  

두 번째는 필자가 백수십 편을 번역하여 법개념(legal concept)과 연관지은 시의 구절들이 그 관련성을 직접ㆍ간접으로 말해주고 있다. 예를 들면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나라를 잃은 슬픔이, 또 태극기를 맘껏 그려보거나 흔들지도 못하고 암호처럼 말해야 하는 답답함이 느껴지지 않은가! 푸른 산, 단풍나무, 작은 길 같이 태극과 4괘를 상징하는 말을 쓰는 시인의 비애가 연상되어 절로 애국심(Patriotism)이 용솟음친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신달자의 "저 거리의 암자"는 더 드라마틱하다. 포장마차에서 술안주로 낙지를 먹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인지 실감할 것이다. "힘빠진 소도 산낙지 먹으면 벌떡 일어난다"는데, 그 귀한 낙지를 집다가 떨어뜨렸을 때의 순간적인 낭패감에 낙지가 온몸으로 쓰는 문자를 읽을 겨를이 없는 것이다. 소시민의 답답한 마음을 명상(Meditation) 불가의 순간으로 바꿔보면 재밌지 아니한가!

 

   젓가락으로 집던 산낙지가 꿈틀 상 위에 떨어져

   온몸으로 문자를 쓰지만 아무도 읽어내지 못합니다

   답답한 것이 산 낙지 뿐입니까

 

* 히치콕 감독에게 많은 영감을 준 아드리아해 자다르 해변

세 번째는 요즘 화제를 만들어 뿌리고 있는 모 유명 인사 덕분이었다.

때가 아니면 조용히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하는데 한쪽의 환호와 박수소리에 취해 더 오르려 했다가 본인은 물론 처자식까지 바닥 모르게 추락하고 말았다.

법 개념을 설명하면서 아름다운 시를 많이 읽어보니 그의 진퇴(進退)는 Epic(서사시/敍事詩)과 Lyric(서정시/抒情詩)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희노애락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보통사람이라면 여느 Lyric처럼 울고 웃고 한바탕 떠들고 끝낼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호머의 오디세이나 니벨룽겐 반지의 지그프리트 같이 운명을 거스르고 영웅적인 행동을 해야 하는 위인(偉人)이라고 자처한다면 그에 따른 환난과 고초는 감수해야 한다. Epic은 아무나 그 주인공(hero)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침 그 인사에 대한 신문만평이 가족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미국에서 1억달러 징벌적 손해배상(Punitive damages)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내 경우 미국에서 산 적도 있고 미국 로스쿨에서 공부한 적도 있어서 어떻게 소송이 진행될 것인지 짐작[1]이 가는 터라 Lyric으로 끝낼 수 있는 일을 굳이 확대해서 Epic으로 만들어야 하는 그의 처지[2]가 안타까웠다.

천하에 박식하기로 소문난 그분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콘스탄틴 카바피의 "이타카"(Ithaca, 지중해, 정확히는 이오니아해에 있는 오디세이의 고향 섬)라는 시가 있다. 전에 그리스에 다녀온 뒤 YouTube에서 반젤리스의 BGM에 숀 코네리가 직접 낭송하는 것을 듣고 이 시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KoreanLII에 일부러 Destination이란 항목을 만들었었다. 

 

* 지중해 대형 크루즈선이 정박해 있는 드브로브니크 항구

   이타카는 너에게 경이로운 여행을 선사했고

   이타카가 아니었으면 너는 떠나지도 않았을테니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게 하나도 없구나

   설령 그곳이 가난하다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이지 않을 것이다

   길 위에서 너는 많은 경험을 쌓고 현명해졌으니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이타카에서는 페넬로페가 수많은 유혹과 회유를 뿌리치고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트로이 전쟁 후 10년 만에 돌아온 오디세이가 고향에서의 사태를 평정한 후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술회하며 행복한 여생을 보낸다 해도 좋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디세이는 다시 이타카를 떠난다. 한 뼘 밖에 안 되는 이타카에 몸을 누이기에 그가 너무 거인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리라.

 

영웅의 서사시는 [애환(哀歡)의] 서정을 넘어 비극(悲劇)도 불사

Heroic epic may end  in tragedy beyond lyric emotions.

 

이와 같이 KoreanLII가 리걸 콘텐트와 관련 있는 시까지 싣기로 한 것은, KoreanLII에서도 밝혔듯이, 우리나라의 신화와 고대 시가를 함께 수록해 놓은 역사책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본받기 위함이었다.

僧 일연은 김부식과는 달리 출세하기 위해, 또는 명성이나 재물을 얻기 위해 역사서를 편찬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Note

1] 미국에서 한국의 장관급 인사(이른바 public figure, 公人)가 현지 교포신문의 보도(인터넷판의 만평 포함)로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주장하고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배심원 재판(jury trial)이 열린다고 가정할 경우 다음과 같은 쟁점이 문제될 것이다.

o 미국의 보통사람들인 배심원이 한국어로 된 교포상대 언론에 난 만평이 불특정 다수인이 인지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볼 것인가?

o 한인 교포를 포함한 평균적인 미국시민의 관점에서 해당 일러스트레이션이 원고의 가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가?

o 미국 수정헌법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살만 루시디의 소설, 덴마크 신문의 무함마드 만평 선례에 비추어볼 때 법무장관을 역임한 公人에 대한 간접적 풍자가 아닌가?

o 문제 언론사의 보도행태에 미루어 볼 때 원고에 대한 악의적 의도(actual malice)가 있진 않았는가?

o 원고가 전에 그와 상반된 주장을 SNS를 통해 한 적이 있으니 이는 금반언(estoppel) 아닌가?

o 징벌적 배상을 명함으로써 미국 내 재발방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가?

o 반대로 언론에 대한 역효과는 없겠는가?

o 증거조사를 주로 한국에서 실시해야 한다면 미국 법정에서의 손배소송은 부적합(forum non conveniens)하지 않은가?

o 승소 가능성에 비추어 소송비용은 원고가 얼마나 부담하고, 이를 소송대리인이 체당하거나 모금으로 충당할 수는 없는가?

o 미국내 한인 변호사의 과도한 소송 부추김이 아닌가?

o 혹여 BTS, 영화 ‘미나리’가 높여준 국가위신을 손상시키지는 않겠는가? 등등.

 

2]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심리학교수인 Ramani Durvasula (임상심리학)는 Business Insider 2018년 3월호에서 이런 사람은 '나르시시즘(narcissism,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문제가 있다고 진단하고 그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 자신의 잘못을 남 탓으로 돌린다.

2.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3. 친절을 베푼 후 상대방이 한없이 고마워하길 바란다.

4. 매력적이거나 카리스마 있다는 말을 듣는다.

5. 많은 사람들이 첫인상을 ‘아주 강했다’라고 기억한다.

6. 자신감이 부족하다.

7. 지나치게 당당해 보인다.

8. 나르시시스트는 종종 세상이 자기를 몰라준다고 느낀다.

9. 자신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0. 충고하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11. 깔끔하고 멋진 외모를 추구한다.

12. SNS로 보여주기를 좋아한다.

13. 자주 화를 낸다.

출처: 신효정, "깔끔한 외모에 유창한 언변으로 다가온 사람아… 왜 이렇게 변했을까?", 동아경제, 2018.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