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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Escape from Oblivion

Onepark 2021. 6. 1. 15:40

5월이 가고 6월이 왔다.

어느 시인은 지금이 봄은 늦고 여름은 이른 때라며 "봄이 간 후에야 봄이 온 줄 알았던" 것처럼 젊음이 지난 후에야 젊음인 줄 알았던, 한 템포 늦은 중년의 사람을 '6월 같은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1]

 

마침 오늘 아침 FM 방송에서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Concerto For Clarinet and Orchestra in A Major, K. 622, 2nd Mov. Adagio)을 비올라 연주곡으로 들었다. 단순한 편곡이 아니었다. 모차르트는 그 당시에도 독주악기가 아니었던 비올라를 위한 협주곡으로도 편곡을 하여 악보를 출판했다는데 그 느낌이 클라리넷 연주와는 사뭇 달랐다. 비올라 연주자(Lars Anders Tomter 비올라, Arvid Engegard 지휘 Norwegian Chamber Orchestra 2006 공연실황)가 자기만의 생각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존 배리가 음악을 담당했던 영화 《Out of Africa》(1985)[2]에 삽입된 곡이기에 여러 번 보았던 그 영화의 장면 장면이 연상되었다. 무엇보다도 여주인공 카렌 폰 블릭센(메릴 스트립)이 데니스(로버트 레드포드)가 조종하는 경비행기를 타고 아프리카의 초원과 호수 위를 비행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 영화 《Out of Africa》의 한 장면. 이하 같음

 

하지만 보통사람의 눈으로 볼 때 카렌의 삶은 어서 잊어버리고 싶으리 만큼(ready for oblivion) 실패의 연속이었다.

스웨덴 귀족과 결혼하고 아프리카로 건너가 케냐에서 남 부럽지 않게 대농장과 커피 가공공장을 운영했다. 기대와는 달리 남편은 집밖으로 떠돌고 아이는 유산했으며 성병으로 크게 고생하였다. 그 사이 영국 남자 데니스를 만나 잊었던 꿈도 되찾고 그와 가정을 이루고 싶었지만 그 역시 사랑에 얽매일 사람은 아니었다. 얼마 후 그는 비행기 사고로 그녀 곁을 영영 떠나고 말았다. 아프리카에서 모든 것을 잃고 귀국한 그녀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만일 덴마크로 돌아간 카렌이 지난 시절을 한탄하며 생을 마감했다면, 신문 부고 난에는 어느 박복한 남작부인이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다는 단 몇 줄로 요약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렌은 달랐다. 모닥불 앞에서 데니스와 재밌는 이야기 이어말하기를 하면서 자신의 몰랐던 스토리텔링 재능을 발견하고 그에게서 만년필을 선물로 받은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담당하게 아프리카에서 17년간 겪었던 모든 일을 이삭 디네슨(Isak Dinesen)이란 필명으로 탈고하여 1937년 《Out of Africa》[3]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헤라자드 왕비처럼 끊임없이 이야기를 풀어놓은 그녀는 왕성한 작품활동을 벌여 한때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올랐다. 그녀의 다른 소설 "바베트의 만찬" 역시 영화화되어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박복한 여인과 비범한 여류 작가의 차이점은 바로 '만년필'로 써내려간 이야기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원작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았던 러브 라인을 50년 후의 시드니 폴락 감독이 사람들이 잊지 못할 로맨틱한 명장면으로 엮어내 사람들이 《Out of Africa》를 영원히 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물론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조곡 OST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에게 "2021년 5월이란 무엇으로 남게 될까" 곰곰 생각해 보았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더 빨리 지나간다는 말을 한다. 누구나 10대 학창시절은 지루했던 기억밖에 없으나, 4,50대 한창 때는 하루하루 정신없이 보냈고, 60대가 되니 작년 일이 어제 일 같다고 곧잘 이야기한다.

나 역시 5월 달엔 뭘 했는지 달력 속의 삼십한 날이 순식간에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날이 있었다. 주말마다 비가 오는 궂은 날이 많았지만, 강원도 리조트에도 가서 일박하고 무엇보다도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전시회를 본 것이 기억에 남았다. 또한 피천득 교수의 "오월"을 처음으로 번역하여 나 역시 'Staying Alive'를 기뻐하게 된 것이 또 다른 수확이었다.

 

에리히 프롬은 'Escape from Freedom'에 대해 썼거니와, 우리가 세월을 허송했다고 탄식하지 않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루하루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면 되므로 사람들은 일기를 쓰기도 하고 특별한 사건이나 사연이 있는 날은 소감이나 여행기를 메모나 사진/동영상, 수필 등의 형태로 남기기도 한다. 앞서 말한 카렌은 자전적 소설을 썼다. 

다시 말해서 'Escape from Oblivion'은 그 방법이 여러 가지이므로 무엇이 됐든 일단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

 

라디오 방송의 진행자가 말했듯이 "피었다 져버린 장미꽃처럼 어느새 오월이 갔구나"고 탄식하고만 있을 게 아니다.

나뭇가지에서 지저귀던 나이팅게일 새 한 마리, 언제 왔다가 어디로 날아갔는지 모르겠다는 상념을 덧붙인다면 세월의 무상함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이 같은 시구절로 12세기 페르시아 시인(Omar Khaiyyam. 1048~1131)은 오늘날에도 우리 곁에서 살아 숨쉬는 것같다.[4]

그렇구나~ 누구나 다 아는 것이지만, 무엇이든지 의미있는 것을 글로 써서 남기거나 혹은 사진으로 남기는 일이라는 매우 평범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뭔가 색다른 의미를 부여한다면,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카렌처럼,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처럼, 인생의 색깔이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특히 정년퇴직 후 고정적인 일과가 없는 나로서는 깊이 유념해야 할 사항이라고 여겨졌다.

 

Note

1] 서두에 소개한 이채의 시에서는 "청춘이 지나간 후에야 나에게도 청춘이 있었음을 알았다"고 한 중년의 고백과 탄식을 노래하고 있다. 다음과 같이 영어로 옮겨보았다.

 

6월에 꿈꾸는 사랑  - 이채 (정순희)

A Love Dreamt of in June  by Yi Chae

 

사는 일이 너무 바빠
봄이 간 후에야 봄이 온 줄 알았네
청춘도 이와 같아
꽃만 꽃이 아니고
나 또한 꽃이었음을
젊음이 지난 후에야 젊음인 줄 알았네

Absorbed in daily life,
I recognize the springtime after it's gone.
Our youth is like this.
Only flowers can't be cited as beautiful.
So am I.
I get to know my youth after its passing.

인생이 길다 한들
천년만년 살 것이며
인생이 짧다 한들
가는 세월 어찌 막으리

However long-lasting our lives are,
We cannot live long for thousand years.
Even though our lives are short,
We cannot stop the time flight.

봄은 늦고 여름은 이른
6월 같은 사람들아
피고 지는 이치가
어디 꽃뿐이라 할까

Hi, there, you are like June,
When spring is late and summer comes too early.
You may say the blooming and falling
Are not limited to flowers.

 

2] 1986년 제58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Out of Africa》는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미술상, 촬영상, 음악상, 음향상 등 7개 부문을 석권했다.

3]  'Out of Africa'란 말은 로마의 과학자/철학자였던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 AD23~79)의 "Ex Africa semper aliquid novi."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There is always something new out of Africa."란 뜻인데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도 Out of Africa theory라고 일컫는다.

 

4] 12세기의 페르시아의 천문학자ㆍ수학자ㆍ시인 오마르 하이얌의 4행시(Quatrain) 몇 편을 영국 에드워드 피츠제럴드의 번역과 함께 소개한다. 따로 제목 없이 Stanza Number만 붙어 있는 다양한 주제의 루바이야트 4행시는 이곳을 참조. 오마르 하이얌은 내가 5년 전 이란을 여행할 때 조우했던 12세기 페르시아의 위대한 시인이었다. 존재감도 없던 그의 시집을 발굴하여 압운(1,2,4-line rhyme)을 딱딱 맞춘 영시로 재탄생시킨 피츠제럴드 역시 그 못지 않게 훌륭한 시인이었다.

 

Rubaiyat   by Omar Khaiyyam

사행시  - 오마르 하이얌

XCVI  

Yet Ah, that Spring should vanish with the Rose! 
That Youth's sweet-scented manuscript should close! 
The Nightingale that in the branches sang, 
Ah, whence, and whither flown again, who knows!

#96  아, 장미꽃과 함께 저 봄도 사라지고 
젊음이 달콤한 그 책장도 닫혔구나!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하던 나이팅게일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날아갔는고!

XXXVII  

Ah, fill the Cup: — what boots it to repeat 
How Time is slipping underneath our Feet: 
Unborn TO-MORROW and dead YESTERDAY, 
Why fret about them if TO-DAY be sweet!

#37  아, 잔을 가득 채워라 – 또 말해서 무엇하리 
시간이 우리 발밑에서 얼마나 빨리 미끄러져가는지 
내일은 태어나지 않았고 어제는 죽었는데 
오늘이 즐거우면 됐지 왜 내일과 어제에 조바심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