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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 블로그를 통해 …… 하려는 의지!

Onepark 2021. 8. 22. 07:25

어느덧 8월 하순이 되었다.

뉴욕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 이맘 때쯤에는 단풍이 들기 시작한 9W 도로[1]를 드라이브하고 웨스트포인트[2]나 우드베리 카먼 몰에 자주 다녀오곤 했다.

또 댈러스 SMU에서 유학생활을 마칠 무렵 PBS 방송에서 보여준 야니의 아크로폴리스 공연 중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던 "The End of August"도 생각난다. 콜로라도 로키 산맥의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빌 더글러스의 "Autumn Song"도 빼놓을 수 없다.

 

* 뉴욕 업스테이트 9W의 Scenic Drive
* 그리스 출신 뉴에이지 음악가 야니의 1993년 아크로폴리스 공연 장면

 

내 인생의 추수기

이제는 내 인생에서도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릴케가 "가을날" 시(둘째 연)에서 읊었던 것과 같은 심정이다.

 

마지막 결실이 꽉 차도록 명해 주시고,
그 열매에 이틀만 더 남쪽의 따스한 햇빛을 주시어
무르익도록 재촉하시고,
무거워져가는 포도송이에 마지막 달콤함을 넣어 주소서.

 

과연 나의 인생에서는 무엇을 수확할 수 있을까?

 

* 계절이 지나가는 들판

 

전에 강단에서 진로를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자기가 제일 잘 하는 것,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권하곤 했었다.

지금 은퇴 후 코로나 팬데믹까지 겹쳐 주로 집에 머물러 있는 내 자신에게는 뭐라고 말할까 생각해보곤 한다.

 

요 며칠 사이 나희덕 시인의 "오분간"이란 시를 읽고 여러 상념에 젖었다. 아카시아[3] 꽃잎이 흩날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5분 동안 옛날에 귀가하는 어린 아들을 기다렸던 일, 그 아들이 청년이 되어 곁을 떠난 일을 잠깐동안 회상한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누구나 일쑤로 경험하는 일이지만, 나로서는 그것이 아카시아 꽃잎을 따먹고 놀았던 어린 시절, 꽃 향기에 취했던 젊은 시절 등 추억이 떠올라 몇 번을 되풀이해서 읽었다. 그리고나선 이러한 추억어린 정서가 외국인들에게도 통할진 몰라도 "Five Minutes"라는 외국 노래도 있느니 만큼 영어로 옮겨볼 생각을 했던 것이다. 

결국 영어로 번역한 시가 5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한 사람의 일생을 반추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KoreanLII의 Time 항목에 번역한 시를 추가하는 것으로 작업을 마쳤다. 

 

오분간  - 나희덕

 

이 꽃그늘 아래서
내 일생이 다 지나갈 것 같다.
기다리면서 서성거리면서
아니, 이미 다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기다리는 오분간
아카시아꽃 하얗게 흩날리는
이 그늘 아래서
어느새 나는 머리 희끗한 노파가 되고,
버스가 저 모퉁이를 돌아서
내 앞에 멈추면
여섯 살박이가 뛰어내려 안기는 게 아니라
훤칠한 청년 하나 내게로 걸어올 것만 같다.
내가 늙은 만큼 그는 젊어서
우리는 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보겠지.
기다림 하나로도 깜박 지나버린 生,
내가 늘 기다렸던 이 자리에
그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쯤
너무 멀리 나가버린 그의 썰물을 향해
떨어지는 꽃잎,
또는 지나치는 버스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나는 내 기다림을 완성하겠지.
중얼거리는 동안 꽃잎은 한 무더기 또 진다.
아, 저기 버스가 온다.
나는 훌쩍 날아올라 꽃그늘을 벗어난다.

 

* 안개 낀 산골의 신비롭고 평화로운 전원 풍경. 사진제공: 유양수

 

빼놓아서는 안 될 이야기

이와 같이 1주일에 한 번씩 블로그에 글을 올려 내 인생을 어떻게 갈무리할지 생각해보는 일이 많아졌다.

중ㆍ고등학교, 대학 동창들과 SNS를 통해 교류를 하면서 "나는 이렇게 기억되면 좋겠다", 또는 "나는 저런 식으로 인식되는 일은 피해야겠다"고 마음먹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을 떠난 후 자손들에게 내가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았는지 알려주기 위해 굳이 자서전이나 회고록의 형식을 취하진 않더라도 기록으로 남겨둘 작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올렸던 블로그 기사 중에는 이러한 내용이 유독 많았다.

* 요한나 봉허는 남편 테오 반 고흐가 형 빈센트와 나눈 편지와 시숙 빈센트의 그림을 잘 간수했다가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예술혼을 이해할 수 있도록 책을 펴내고 전시회를 여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무명에 가까운 괴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일약 세계적인 화가로 명성을 얻고 암스테르담에는 그의 전용 미술관이 건립되었다.

* 파리 주재 미 외교관의 부인이었던 줄리아 차일드는 미국 주부들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프랑스 요리를 소개하기로 하고 8년에 걸쳐 책을 쓰고 TV 요리강좌에도 나섰다.

*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이 개발 붐을 타고 번창할 때 LA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지역에 로스(A.W. Ross)라는 부동산개발업자가 제안한 Miracle Mile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로스는 널찍한 주차장을 갖춘 고층건물과 함께 중산층도 정원이 딸린 내집을 마련[4]할 수 있게 하는 한편 대중에 보급되기 시작한 자동차로 쇼핑 몰과 상가, 은행에서 일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로스의 프로젝트는 미국민들을 열광시켜 누구나 이곳에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그의 영향으로 미국에서는 10분 이내로 고속도로를 통해 전국 어디로든지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도시설계안이 표준이 되었다.

 

* 미국 LA Miracle Mile의 대표적인 상업문화시설인 The Grove

 

잘 살아보려는 의지를 솔선수범하는 지도자

여기서 주인공들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시대의 조류에 따라 새로운 트렌드를 선도하거나 여기에 적극 동참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대학 들어가서 조순 <경제학 원론>을 처음 읽었을 때 한국 경제가 발전할 수 있으려면 국민 모두가 '경제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명제에 큰 감명을 받았다. 당시 조순 교수는 정부가 경제계획을 바로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업과 가계, 국민 모두가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하셨다.

 

우리 세대만 해도 1960∼70년대 '잘 살아보세'라는 새마을운동에 참여한 적이 있기에 너무나 당연하고 처절하기조차한 경제원리가 아닐 수 없었다. 다음 우리 세대가 직접 또는 식구들을 통해 겪었던 몇 가지 사례를 보자.

* 영화 <국제시장>처럼 1960년대 한국의 젊은 남녀는 해외 노동력을 수입하던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로 가서 피땀 흘려 번 돈을 고국으로 보내 자기 부모ㆍ형제는 물론 국가경제에도 큰 보탬이 되었다.

* 1960년대 후반 한국의 젊은이들이 베트남전이 한창인 월남에 청룡부대, 백마부대의 장병으로, 또 일부는 군수지원단에 파견되어 목숨 바쳐가며 국군장비의 현대화, 월남전 특수의 원동력이 되었다.

* 1970년대 세계경제가 오일쇼크로 휘청일 때 건설업체를 중심으로 한국의 근로자들이 중동 산유국의 건설현장에 나가서 밤에도 횃불 켜놓고 일하면서 귀중한 외화를 벌어왔다.

* 1960~70년대 공장과 공사장, 버스 등 일터를 가리지 않고 무수한 젊은이들이 가족을 부양하고 동생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일했다. 

*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조기 극복하기 위해 전국에 초고속 통신망을 깔고 실직자들을 고용하여 법원 판례를 포함한 공공기관의 문서를 전자화[5]함으로써 세계 어느 나라보다 먼저 전자정부의 기틀을 마련했다. 

 

지난 8월 15일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광복절을 대체휴일까지 만들어가며 경축하는 사이 매우  충격적인 뉴스를 접했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미군 철수를 명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대통령이 해외로 피신하고 정부군은 미군에게 받은 고성능 군사장비를 쓰지도 않은 채 맥없이 탈레반에 투항하였다는 소식이었다. 우리 조선조 때에도 민초들이 왜란ㆍ호란을 겪을 때 선조ㆍ인조 임금과 조정 대신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구한말에는 왕이 외세를 끌어들이기도 했고, 6.25 때는 병력과 무기가 열세인 나머지 UN군의 참전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은 달랐다. 그 당시 이순신 장군과 의병ㆍ승병은 배수진을 치고 외적에 맞섰다. 구한말에도 죽창 외에는 변변한 무기도 없었지만 농민군이 일본군에 분연히 대항[새야 새야 파랑새야]하였고, 6.25 당시에는 낙동강 전선에 학도병까지 뛰쳐나가 온몸으로 인민군을 막아냈던 것이다.

 

사정은 달라도 예전에 의병활동ㆍ국채보상운동을 벌였듯이 IMF 위기 때 장농 속 금붙이까지 나라에 바쳤던 것처럼 우리 국민들에게는 '위기에 맞서 싸우려는 의지'가 있다. 지금의 MZ세대가 모래알 같이 개인주의화되었다고 하지만, 우리 모두의 DNA 속에 들어 있는 '위기에 맞서 가족과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를 고양함으로써 당면 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

우리 역사가 입증하였듯이 비전과 통찰력을 갖고 솔선수범하는 지도자가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 '내로남불'의 지도자는 역사와 민족의 이름으로 퇴장을 명해야 한다.

 

* 출이집트(Exodus)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nbsp;

Note

1] 조지 워싱턴 브리지 뉴저지 쪽에서 시작해 뉴욕주 업스테이트로 올라가는 Route 9W는 베어마운틴을 거쳐 허드슨 강 상류의 킹스턴까지 이어져 있다. 펠리세이드 절벽 위로 달리는 뉴저지 구간은 그 일대가 록펠러 가의 소유였고 대공황 당시 록펠러가 자금을 대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드슨 강 건너편은 Route 9E인데 도로변의 멋진 풍광은 허드슨 라인 철길만 못하다.

 

2] 웨스트 포인트는 허드슨 강이 굽이쳐 돌면서  강폭이 좁아지는 강의 서쪽 튀어나온 지형을 말한다. 조지 워싱턴 장군이 독립전쟁을 벌일 때 강 양안에 쇠사슬을 걸어놓고 영국군 함대의 통행을 저지했으며 지금도 독립군 수비대의 대포가 전시되어 있다. 미 육군사관학교는 일부 구역을 누구나 들어올 수 있게 개방해 놓아 우리 식구는 손님이 올 때마다 9W를 드라이브하고 전쟁박물관 견학, 웨스트포인트 경치와 대포 구경을 하고 우드베리 카먼(Outlet mall) 푸드코트에 가서 식사를 하곤 했다. 

 

* 뉴욕주 웨스트포인트 포대가 위치한 트로피 포인트에서 새벽 동틀 때. Source: Wikimedia Commons

 

3] 본래 아카시아는 아프리카, 호주에서 빨갛고 노란 꽃을 피우는 가로수, 관상수로 많이 심는 Acacia Vermelha라는 꽃나무다. 학명이 Robina pseudo-acacia이며 영어로는 false acasia 또는 black locust라고 부른다. 원래 '가짜 아카시아'라고 일컫다가 가짜(pseudo)를 빼고 불려졌다. 그래서 '아까시'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었으나 여전히 아카시아와 함께 쓰인다. 우리나라에 사방사업ㆍ산림녹화 용으로 많이 심었으나 원산지가 북아메리카임에도 일제가 많이 심게 했다거나 다른 나무의 생육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많이 벌채되었다. 그러나 아카시아는 콩과식물로 토지를 비옥하게 만들고 무엇보다도 꿀을 만드는 밀원식물로서 가치가 많으므로 산림청에서는 조림사업을 다시 펼치고 있다. El Mundo by 77 Harvey.

 

4] 2007년 미국 UCLA 로스쿨 방문교수로 가 있는 동안 거처를 LA의 Miracle Mile에 있는 Park La Brea에 마련했다. 이색적이게도 2층 타운하우스와 고층건물을 포함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이다. 물론 여러 방향의 자동차 출입로와 단지내 실내풀장, 공연장 같은 다양한 시설과 중앙정원을 갖추고 있다. 인근에는 Miracle Mile이 본래 농사짓는 땅이었음을 보여주는 Farmers Market과 첨단 상업문화시설과 세계적 수준의 콜렉션을 자랑하는 The Grove, LA County Museum이 자리잡고 있다.

 

* LA Park La Brea 아파트 단지

 

5] 우리나라에서는 법치주의라는 공공성과 국민적인 수요를 바탕으로 법제처와 총무처(현 행정안전부), 대법원이 협력하여 법령정보와 판례정보를 가장 먼저 DB로 구축했다. 공식 판례집인 법원공보의 경우 판결요지 등 부가정보를 수작업으로 입력하는 등 판결 파일을 일일이 가공하여야만 했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에는 공공근로 사업의 일환으로 투입된 수많은 인력이 어려운 법률용어와 한자를 배워가면서 방대한 법률 데이터를 큰 차질없이 입력할 수 있었다. 당시 정부는 ‘정보화 근로사업’의 일환으로 고학력 실업자들을 임시직으로 채용하여 공공정보를 DB화하는 작업을 실시했다. 자칫하면 소모적인 예산집행에 그칠 뻔하였으나 어려운 법률용어와 한자를 극복하면서 묵묵히 입력작업에 동참해 준 수많은 입력요원의 땀과 눈물 덕분에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강민구(전 법원도서관장,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법률 정보의 마법상자”, 매경춘추 2009.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