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와 시에나, 토스카나는 내게 있어 그림조각 맞추기 퍼즐(jigsaw puzzle)의 빈 칸이었다.
1990년대 맨처음 로마에서 베네치아로 가는 기차 여행을 할 적에 유레일 패스만 있으면 아무 자리에나 앉아갈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던 나는 내 또래의 일본인 관광객들이 우루루 타면서 콤파트먼트 입구의 좌석 예약 표시를 가리켰다. 나중에 그들이 우루루 피렌체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부끄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피렌체에 관해서는 공부도 많이 했고 피렌체가 나오는 영화도 숱하게 보았다.
우선 피렌체 하면 연상되는 것이 단테와 메디치 가, 르네상스, 마키아벨리이고 영화로는 〈냉정과 열정 사이〉, 〈인페르노〉 등이 있다. 최근에는 배우 유해진 일행이 tvN 케이블 프로 〈텐트 밖은 유럽이지〉에서 토스카나 지방을 집중적으로 소개한 것도 아쉬움을 더 키웠다. 그러므로 이번 이탈리아 일주 여행은 직소 퍼즐에서 빈 자리를 채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한진관광에서는 오늘 피렌체 시내 관광을 앞두고 유서 깊은 몬테카티니에 있는 좋은 호텔에 숙소를 마련했다. 이탈리아 상류층이 사는 곳, 묵는 호텔을 체험해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우선 호텔의 외관도 품위 있는 베이지 색이었으며, 중정에서는 가족이 파티를 벌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호텔 레스토랑도 인테리어나 음식 배열이 고전 스타일이었다. 아침에 우리 일행이 앉은 식탁은 30명이 앉을 수 있는 대형 테이블이었다.
반면 미국식 호텔 문화에 익숙한 우리 입장에서 보면 엘리베이터나 실내 공간배치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인솔자가 예고한 어제 저녁 식사 메뉴가 高퓨린 식품인 해산물 요리였으므로 우리 내외는 호텔 디너 대신 방안에서 한국 음식을 해 먹기로 했다. 그러나 다른 일행들은 저녁 식사로 나온 파스타와 해산물 요리가 한국 사람 입맛에 맞게 조리되어 있어서 처음으로 맛있게 먹었다고 말했다.
피렌체에서의 관광 일정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동상이 서 있는 언덕 위 전망대에서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피렌체 구 시가지가 한 눈에 바라다 보인다. 두오모 성당의 붉은 돔과 아르노 강, 메디치 가 VIP의 전용통로였다는 이중교 베키아 다리가 보였다.
통풍으로 인한 통증에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는 나로서는 아름다운 관광지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노역장이나 다름없었다.
피렌체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Cathedral of Santa Maria del Fiore: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피렌체 시민들의 자부심 그 자체였다.
피렌체 도시 규모에 맞게 신축된 대성당은 1418년 120년의 공사 끝에 직경 45m의 돔 건설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오랜 기간 기술적 해결방법을 찾지 못해 미완성인 채로 남아 피렌체 시민들이 자괴감을 안고 있었다. 피렌체의 금세공업자 출신으로 로마 등지에서 건축술을 공부한 필립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는 대성당의 거대 돔 건축에 도전했다. 브루넬레스키는 설계도를 제출하지 않고 오직 말로만 자신의 건축법을 설명했으나 심사위원들은 그의 제안이 실현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이를 채택했다. 그는 고대 로마의 판테온 건물에서 영감을 얻어 전례 없이 천재적인 방식으로 설계 및 공사를 진행하였다. 돔은 지붕 위가 아니라 드럼에 얹혀졌으며 이중벽 구조의 8각으로 디자인된 독특한 형태를 취했다. 지면으로부터 비계를 설치하지 않고 전체 돔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홍예가 없이 건축된 최초의 커다란 돔이었다. 4백만 장 이상의 벽돌이 사용된 무게 37,000톤의 돔은 1420년에 건설을 시작해 1436년에 완공되었다.
영국과 미국 잘 사는 사람 자제들이 이탈리아로 Grand Tour를 떠날 때 가장 인기 있는 장소가 피렌체 베키아 궁 우피치 미술관이었다.
금융업으로 큰 부를 축적한 메디치 가의 사람들은 철학적 담론을 즐기고 예술을 사랑하여 수많은 인문학자와 예술가들이 피렌체로 몰려들었다. 그 결과 이 곳에서 르네상스(Renaissance) 운동이 태동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시뇨리아 광장의 카페에서 쉬는 동안 발목의 통증으로 걸어서 돌아다닐 수 없는 대신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쳤다.
우선 카페 화장실 입구 홀의 벽면을 채운 그림들이 영화 〈Best Offer〉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뒤늦게 연정이 싹튼 老 미술품 경매사는 의문의 여인을 자기만의 미술품 콜렉션 룸으로 초대한다. 그 방에는 다양한 포즈의 진귀한 여인의 초상화들로 가득 차 있었다. 며칠 후 그의 콜렉션은 전부 사라져버렸다. 그림을 모두 훔쳐간 그 여자를 만나기로 했던 프라하의 시계 카페는 문을 닫았는데, 두 사람의 재회는 영영 불가능한 것일까?
영화 제작자의 한 사람이 이 카페에 왔다가 그 영화의 모티브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병섭 인솔자는 한 술 더 떠서 화장실의 수도꼭지가 순금이라고 했다. 설마~
바로 옆 파스텔 톤의 베이지 색 건물 아래에는 노란색 앤틱 오픈카를 탄 젊은이들이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 남녀가 몇 분 후에 의견을 모으면 차 시동을 걸고 어디론가 떠날 것 같았다. 그 다음 장면은 노란 오픈카가 잘 어울리는 사이프러스 가로수가 줄지어 서 있는 토스카나 들판 길이 되지 않을까?
다이안 레인의 〈Under the Tuscan Sun〉도 그렇고 내가 보았던 토스카나를 무대로 한 영화는 대부분 해피 엔딩이었다.
점심 메뉴는 피렌체의 명물 T본 스테이크였지만, 통풍을 앓고 있는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이래저래 고생스러웠던 피렌체 관광을 마치고 우리가 탄 버스는 강을 건너고 터널을 통과하여 토스카나의 중심 도시 시에나에 당도했다.
일찍이 금융업이 발달했던 시에나에서는 많은 이벤트가 열리는 캄포 광장과 피렌체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성당을 짓고자 했던 하얀 대성당을 보는 게 관광의 포인트였다.
주차장에서 나와 마침 농산물 장마당이 열리는 공원을 지나 중세의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 섰다.
시에나 입구의 성당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작은북소리가 울리며 중세 복장을 한 젊은이들이 성 카타리나의 초상을 메고 행진해 왔다. 시에나의 수호성인인 성 카타리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오상(五傷)을 받았고 고위 성직자, 군주를 대상으로 기독교 정신을 변증한 것으로 유명하다.
성당 안에서도 깃발을 날리며 무슨 의식을 행하는 것 같았다. 급히 Google을 통해 검색해보니 해마다 5월이면 노블 콘트라다를 비롯한 각 구역에서 중세 전통 복장을 하고 가두 행진(procession of the Noble Contrada "Oca")을 벌인다는 설명이었다.
시에나의 '마조(Maggio)' 축제는 봄의 시작을 축하하며 콘트라다 별로 공동체 의식과 유대감을 다지는 행사로 사랑 받고 있다 한다. 그밖에도 기사 복장으로 말타기 경주가 있는데 그 절정은 매년 7월과 8월 두 차례 17개 콘트라다를 대표하는 기수들이 캄포 광장을 3바퀴 도는 말 경주대회 '팔리오(Palio)'이다. 비록 30초면 끝나버리지만 캄포 광장에 모인 시민과 관광객들은 이 레이스를 보면서 열광한다는 것이다.
이날 오후 우리는 캄포 광장 주변의 골목길에서 중세 복장 차림의 행렬과 여러 차례 조우하였다.
중세 시에나는 순례자와 여행자들이 로마로 갈 때 반드시 들르게 되는 길목에 위치하여 일찍이 숙박업과 금융업이 발달하였다. 자연히 세계 최초로 은행이 설립되었고 규모가 큰 예배와 기도처에 대한 수요가 커져 성당 건립이 추진되었다.
이웃 피렌체의 두오모보다 더 아름답고 큰 성당을 지으려 했으나 페스트의 창궐과 도시의 쇠퇴에 따른 재정상의 어려움으로 그 계획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피렌체의 두오모 못지 않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확장을 예정한 내부 벽, 시설 등 들어가서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부어오른 발목은 더 이상 이를 허용치 않았다.
나로서는 아침부터 고생스러웠지만 지구를 구하는 길은 나무를 비롯한 생태계의 보존이라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조형물을 보는 것으로 시에나 관광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오늘도 날씨는 쾌청하였으며 서머타임의 태양이 지는 가운데 하늘의 구름이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토스카나의 풍경 그대로 푸른 초장이 끝없이 펼쳐진 낮은 구릉에는 사이프러스와 소나무가 군데군데 숲을 이루었다.
이윽고 오늘 우리가 투숙할 아시시 언덕 위의 마을이 버스의 전면에 나타났다.
성 프란치스코 성인이 태어난 마을이고 그를 기념하는 프란치스코 성당이 있는 곳이다.
카톨릭 순례자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성지라고 한다.
우리가 탄 버스는 Grand Hotel Assisi 앞에 승객과 짐을 내려주었다. 호텔 로비는 3층이고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었다. 즉 산을 깎아서 만든 호텔이므로 (-)로 표시된 층의 객실에서도 바깥을 내다볼 수 있다.
P.S. 통풍 소감
피렌체와 시에나는 이번 여행에서 나에게 제일 큰 고통을 안겨준 곳이 되고 말았다. 두 달 전에 통풍발작을 일으키고 적절한 치료를 받아 완쾌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앞서 돌로미티의 경관에 취한 나머지 점심 때 나온 피자 半판과 돼지 족발을 먹으면서 맥주 한 병을 마신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노벤티 아웃렛에서 오른 발목이 조금 시큰거린다 생각했는데 그것이 통풍 재발의 전조 증상이었다.
사실 이태리 단체여행을 하면서 쓰리 코스로 나오는 파스타, 소-돼지-닭-생선 등으로 번갈아가며 나오는 메인 디쉬, 티라미슈가 나오는 후식에서 高퓨린 식품을 제외하면 먹을 게 별로 없었다. 음식의 절제는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환부인 발목의 안정을 취하는 일은 절대 불가능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오른쪽 발목 복숭아뼈에 작열감과 통증이 엄습했지만 일행을 따라서 계속 걸어야 했다. 나의 상태를 잘 알고 있는 아내는 고통이 심해 보행이 어려우면 당장 여행을 중단하고 귀국하자고 말했다.
피렌체와 시에나에서 좁은 골목길을 2만 보 이상 걸어다닐 때 발목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동반한 아내에게는 마음 고생, 같은 그룹의 여행객들에게는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쳤다. 관광하는 길이 고통을 참으며 가는 고행길이 되었고, 이를 악물고 발밑을 보며 걷는 구도자의 길이 되고 말았다. 이날 시에나까지의 일정을 마쳤을 때에는 신발을 벗기 어려울 정도로 오른발이 심하게 부어 있었다.
먹구름에는 빛나는 테두리(silver lining)가 있는 것처럼 피렌체 시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르네상스의 발원지로 만든 로렌초 데 메디치가 잡안의 내력인 통풍(gout)에 시달리다 43세의 나이로 죽은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되었다.
또한 우리 일행과 인솔자는 물심양면으로 우리 부부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어느 분은 통풍 치료 경험담을 나눠주시기도 하고, 다른 분은 비상용으로 들고 온 등산용 스틱을 선뜻 빌려주었다. 정말로 이 스틱이 아니었으면 이탈리아 일주를 어떻게 완주할 수 있었을까! 아시시 호텔에서 만찬을 가질 때 우리 내외는 일행에게 감사의 표시로 와인과 맥주, 주스 등 음료를 제공하였다.
⇒ 이탈리아 5. 아시시, 티볼리
⇒ 이탈리아 3. 베네치아
'Trav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탈리아 6] 소렌토, 카프리, 나폴리 (1) | 2024.05.18 |
---|---|
[이탈리아 5] 아시시, 티볼리 (0) | 2024.05.18 |
[이탈리아 3] 베네치아 (2) | 2024.05.18 |
[이탈리아 2] 돌로미티 알프스 (1) | 2024.05.18 |
[이탈리아 1] 밀라노, 베로나 (4) | 2024.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