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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3] 베네치아

Onepark 2024. 5. 18. 18:00

베네치아는 나에게 아주 익숙한 관광지이다.
2000년 여름 은행원에서 대학교수로 전직할 때 퇴직금을 받아서 실행한 것이 서유럽 가족여행이었고 베네치아를 파리, 로마 다음의 행선지로 꼽았다. 파리-로마 구간은 야간 열차 침대차를 타고 한 콤파트먼트 안에서 우리 네 식구만 지냈기에 중학생 아이들의 흥분이 최고조에 달했고 그때부터 가족여행은 우리 가족의 전통이 되었다.

그런데 시오노 나나미의 《바다의 도시 이야기》 上・下를 통독한 뒤에는  모르고 지나쳤던 명소 몇 곳을 다시 가고 싶어졌다. 댄 브라운의 《인페르노》를 소설과 영화로 보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베네치아를 몇 번씩 가보고도 또 가는 이유는 불리한 환경조건을 극복하고 1000년 이상 공화정을 유지하면서 줄곧 경제적 번영을 구가해 온 점이라 하겠다. 그리고 베네치아에서는 지금까지도 셀 수 없이 많은 문화・예술 행사가 열리고 있으며 로맨틱한 영화와 음악, 미술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다.

 

 

베네치아 외곽에 소재한 셰라톤 계열의 포 포인츠 호텔에서 간단히 조식을 먹고 오늘 관광의 목적지인 베네치아를 향해 떠났다. 왜 Four Points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물론 호텔 체인의 브랜드 네임이지만 버스를 타고 가면서 베네치아의 Four points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간단히 베네치아의 화려하고 찬란했던 과거(1천년 공화정을 유지한 지중해 해상무역의 최강자), 현재(유럽의 문화, 예술과 엔터테인먼트의 중심지), 미래(지구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침수될 가능성) 세 가지는 포인트는 쉽게 떠올랐다.

고심하는 사이에 버스는 베네치아 역까지 연결된 연륙교에 올라섰다. 무솔리니 시대에 건설되었다고 하는데 열차와 승용차, 버스, 트럭이 부단히 오가고 있었다. 일부 구간에서는 바닷속 뻘 준설 작업을 하는 것도 눈에 띄었다.

본섬에 가기 위해서는 다시 배를 타야 했으므로 간단한 휴대품만 챙기고 버스에서 내렸다.

나머지 한 개의 포인트는 베네치아에서 제일 먼저 거론되기 시작한 "수용 가능한 인원을 초과한 관광객이 몰려올 때의 대책" 이 아닐까 싶었다. 팬데믹 이후에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글로벌한 이슈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베네치아 본섬에 배를 타고 가려니 마치 환영 받지 못하는 손님이 된 양 마음이 찜찜해졌다.

최근 들어 베네치아 시 당국은 넘치는 관광객들 때문에 지역 주민의 생활의 질이 떨어지는 것을 막고 각종 편의 시설을 유지 관리하기 위해 당일치기 개인 관광객에 대해서도 관광세를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우리 일행도 전날 저녁 개인 별로 관광세를 냈다는 QR코드를 자기 휴대폰에 사진으로 찍어 저장해 두어야 했던 것이다.

 

정확히는 베네치아 입장료(Venice Access Fee)라 하여 4월 하순부터 7월 중순까지 주말에 1인당 5유로씩 미리 온라인으로 납부하고 본섬에 들어가야 한다. 당일치기가 아닌 하룻밤 이상 숙박하는 여행자는 미리 숙박장소를 등록할 것을 요한다. 면제(exemption) 받을 수 있는 경우도 있으나 입장료를 내지 않고 본섬에 들어온 여행자는 과태료 50~300유로와 현장 입장료 10유로를 물어야 한다

이탈리아의 다른 유명 관광지들도 베네치아와 같은 관광세 부과를 고려하고 있다는데 베네치아의 사례를 참고하여 조만간 시행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이러한 과잉관광(overtourism)에 대해서는 팬데믹 이전부터 이슈가 되어 왔다.

우리나라만 해도 제주도와 서울 북촌 마을, 전주 한옥 마을에서는 수용가능 인원을 초과하는 관광객들이 몰려들자 주자난, 쓰레기, 소음, 주민들의 사생활 침해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 결과 2019년 말 관광진흥법이 개정되어 소관 지자체가 조례로써 문제가 된 지역을 특별관리지역으로 지정하는 등 대책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보트 정박장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배를 타고 물살을 가르며 본섬으로 갔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시원하고 오늘 베네치아에 가서 무엇을 구경할까만 생각하면 되었다.

 

본섬 선착장에는 나비 여러 마리가 꽃나무에 붙어 있는 조형물이 서 있었다. 마침 지난 4월 20일부터 '미술계의 올림픽'이라 일컬어지는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어 본섬에도 여러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하선 직후 시청 직원으로부터 관광세 납부 여부를 QR 코드로 일일이 확인 받았다. 그리고 나서 파도바에서 왔다는 현지 여성 가이드를 따라 우리 일행은 베네치아 골목길과 운하를 누비기 시작했다.

 

 

우리는 공동 우물이 있는 넓은 광장의 한 켠에 서서 베네치아 인들의 도시 건설과 건물 건축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물이 부족한 만큼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은 물론 바닥에 떨어진 빗물도 정화하여 재사용하는 베네치아 인들의 삶의 지혜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바퀴 달린 운송수단이 규제를 받는 골목길과 운하로 연결된 사통팔달의 통로를 이용하여 산 마르코 광장 쪽으로 이동했다. 

 

* 베네치아 광장마다 설치되어 있는 공동우물과 빗물을 모아두는 지하 저수조
* 베네치아 본섬의 지반 침하 현상이 뚜렷하여 출입구의 돋움 공사를 하는 곳이 많았다.

 

이번에 처음 본 것인데 본섬 선착장에서 산 마르코 성당 앞으로 사람 키의 검은 색 조형물이 일렬로 서 있었다.

바로 스페인의 화가 벨라스케스의 (마가리트 공주의) "시녀들"에 나오는 시녀 모양을 한 아이디어 조각 작품이었다.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베네치아를 방문했을 때에는 시녀들 조형물을 치우고 그 자리에 레드 카핏을 깔았다고 한다.

시녀들이 도열한 맨 끝에는 당연히 공주의 조형물이 서 있다.

 

* 마가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성 마르코 성당의 파사드
* 네 필의 청동말은 본래 십자군 전쟁 때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져 온 것으로 나폴레옹에게 약탈 당했다가 되찾아온 것이다.

 

이 대목에서 현지 여성 가이드는 베네치아가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를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마가복음의 상징인 사자 상을 도시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엠블럼으로 정하게 된 사연을 설명하였다.

 

로마 제국 시대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아주 번창한 무역항이었다. 비옥한 나일강 삼각주의 바다쪽에 위치하여 물산이 풍부하고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유대인들이 대거 몰려 들었고 초기 기독교가 교세를 확장한 곳이었다.

사도 베드로의 최측근이기도 했던 복음서 저자 마가의 유해가 이곳 교회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9세기 무슬림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기독교가 크게 위축되었다.

이때 영악한 베네치아 상인 두 사람이 교회의 그리스인 사제와 짜고 마가의 유해를 베네치아로 옮길 작정을 하였다.

시오노 나나미의 표현에 의하면 이탈리아의 다른 경쟁도시에 비해 내세울 것이 별로 없었던 신생 도시 베네치아는 성 마가의 아우라를 장사하는 데 활용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가의 유해를 수레에 싣고 무슬림들이 혐오하는 돼지고기를 쌓아 올려 수출화물 검사를 무사 통과했다. 그들은 마가를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유해를 안치할 산 마르코 성당을 본섬 한복판 두칼레 궁(공화국 지도자의 집무실) 옆에 세웠다. 또한 마가복음의 첫 장이 빈들에서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는 것을 사자가 포효하는 것으로 보아 황금 사자를 상징물로 정했다.

베네치아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천 년도 전에 CI(Corporate Identity) 통합작업을 완성한 그들의 혜안에 탄복하게 된다.

 

* 영화 〈인페르노〉의 첫 장면에도 나오는 산 마르코 광장의 종탑 및 파수대.
* Grand Canal 앞에 서 있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King Vittorio Emanuele II)의 기마상
* 산 마르코 광장 한켠의 레스토랑에서 먹은 점심식사 메뉴
* 베네치아 운하에서 곤돌라 타기는 옵션(60유로/인) 상품이다.

 

한 시간 여의 자유시간에는 나폴레옹의 점령 당시 그의 집무실로 쓰였던 뮤지엄 카페에 가서 광장 쪽을 향해 사진을 찍기로 했다. 그는 산 마르코 광장을 내려다보며 그 스케일만큼 세계 정복의 야욕을 키웠던 게 틀림없다.

프랑스 대혁명 후 나폴레옹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와 북부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 군대와 싸워 이기고, 베네치아가 중립 약속을 어기고 오스트리아를 지원했다는 구실을 붙여 1797년 5월 베네치아 공화국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베네치아가 자랑하는 수많은 예술품과 보물, 값나가는 재산을 약탈해 갔다.

이 때 그의 나이가 약관 28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유럽 여러 나라를 지배하고자 하는 야망에 사로 잡혔고 이를 착착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 나폴레옹은 그의 집무실(지금은 뮤지엄 카페)에서 광장 쪽을 바라보면서 "유럽 제일의 응접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광장 한 쪽에 모여 있다가 베네치아 시녀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났다.

베네치아의 수상버스는 정류소마다 승객을 태우고 내리므로 재미있기는 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린다. 우리 일행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주차장까지 직행하는 수상택시로 바닷물을 가르고 처음에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 왔다.

  

 

베네치아에서의 흥분도 가라앉힐 겸 버스를 타고 가면서 고속도로 변에 펼쳐진 토스카나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인솔자가 토스카나 출신의 세계적인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의 공연 실황을 DVD로 보여주었다.

Three Tenors 공연 이후 유행이 된 밤 시간의 야외 무대 공연이었다. 시각 장애인이면서도 수많은 뮤지션들과 네트워크를 갖고 팝과 클래식, 오페라 등 장르를 넘나드는 그의 역량을 만끽할 수 있었다.

저녁 무렵 우리가 탄 버스는 소나무와 플라타나스가 우거진 예스러운 마을 몬테카티니에 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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