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 이번 달엔 무슨 책을 골라 오셨나요?
P : '정권교체'를 기치로 내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면돗날 하나 차이(razor thin)로, 이재명 전 경기도지사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개표 결과를 지도로 표시해 놓고 보니 우리나라가 동서로 나뉘어 있어 남북전쟁을 치룬 미국만큼이나 심각해 보였어요. 윤석열 당선인이 링컨 같은 지도자가 되어 국가적 통합을 이루어 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에서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한길사, 1996)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G :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1527)는 단테처럼 중세 이탈리아의 피렌체 출신[1]인데 당시의 이탈리아 상황은 어떠했나요?
P :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15~16세기 이탈리아는 30개나 되는 소국으로 나뉘어 있었어요. 이들은 다시 밀라노공국, 베네치아공화국, 로마교황령, 나폴리왕국 그리고 피렌체공화국 다섯 나라 가운데 어느 하나에 흡수되거나 흡수되지 않더라도 실질적으로 그 지배 아래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부국강병은 물론 지도자의 내치와 외교 역량이 중요하다고 보고 그가 피렌체공화국 정부에서 일했던 경험을 토대로 여러가지 방책을 제안했던 겁니다. 피렌체나 어느 소국의 군주가 그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중용해 줄 것을 기대했던 거죠.
G :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요?
P : 피렌체공화국 정부에서 15년간 열심히 일했던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가 정권을 잡으면서 反메디치 파 공직자로 투옥되어 고문까지 당했다고 해요. 마침 메디치 가에서 교황(레오10세)이 배출되자 이를 축하하는 대사면령이 내려 간신히 풀려났습니다. 피렌체에서 조금 떨어진 교외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조그만 농장에서 가족과 함께 은거하며 지냈어요. 피렌체의 공직사회에서 일하기를 원한 그는 메디치 가의 지도자에게 자신의 방책을 적어 바쳤으나, 성에 차지 않는 성벽관리 담당 하급 관직을 제수받은 데 그쳤어요. 그러면서 피렌체의 젊은 귀족 자제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시간을 아껴가며 여러 책을 저술했습니다.[2] 이후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가 축출되고 공화정이 복귀하자 희망을 품었으나 되레 메디치 치하에서 공직을 맡았다는 이유로 배제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상심한 나머지 얼마 못 가 1527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의 사후에야 그의 저작물이 제대로 평가를 받게 되어 18세기 들어서는 산타 크로체 성당의 웅장한 묘로 이장되었다고 해요.[3]
G :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같은 르네상스(Renaissance) 시대를 살았음에도 아쉽게도 기회를 얻지 못했네요. 하지만 그의 저술은 좁은 이태리 반도를 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갔으니 그도 기뻐했을 겁니다.[4]
P : 그렇습니다. 《로마인 이야기》를 쓰면서 수많은 영웅과 천재를 소개했던 시오노 나나미로서는 마키아벨리가 제일 안타까운 존재가 아니었나 싶어요. 그래서 작가는 이 책의 서두에서 피렌체에서 10km 떨어진 산탄드레아 인 페르쿠시나에 있는 마키아벨리의 농장으로 가는 길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그의 면모를 이렇게 묘사했어요. 마키아벨리는 마흔네 살의 야심 많은 남자로서 자기의 아이디어를 펼치기 위해 집필에 몰두하였다고요. 은퇴 후에 삶을 정리하는 저의 입장에서 볼 때 그가 농장 일을 마친 후 옷을 단정히 입고 서재로 들어가 생각을 가다듬으며 글을 쓰는 모습이 충분히 상상이 가고도 남았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산탄드레아에서 1513년 12월 10일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이탈리아 문학사상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편지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는 편지다. 로마교황청에 피렌체 대사로 파견되어 있던 친구 프란체스코 베트리에게 보낸 것이다.
여기서 나는 해가 뜨면 일어나 숲으로 가네. 그곳에서 나무를 벌채시키고 있기 때문이지.
숲에는 두어 시간 머물러 있네. 그때까지의 작업을 다시 검토하기도 하고, 일꾼들과 함께 어울리곤 하면서 말일세. 이 친구들 손도 잘 다치고, 툭하면 저희들끼리 싸우고, 이웃마을 사람들과도 곧잘 다투곤 해서 도무지 사고가 그치지 않는 인간들이거든…
숲에서 나오면 옹달샘으로 가지. 그 생가에 가서야 비로소 나는 내 자신의 시간을 갖게 된다네. 보통 책 한 권을 들고 가는데. 단테나 페트라르카나, 아니면 더 마음 편한 티블루스나 오비디우스 같은 시인들의 작품이지. 그리고 거기에 흩어져 있는 정열적인 연애라든가 시인 자신의 사랑을 읽고, 내 자신의 그것들을 떠올리면서 잠시 그런 생각을 만끽하며 보낸다네.
그런 다음 한길로 돌아서 선술집으로 가네. 거기서는 나그네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그들 나라의 새로운 사건에 관해서 물어보기도 하고, 그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정보에 귀를 기울이곤 하면서 말일세. 그러면 사람들의 취향의 차이랄지, 생각의 차이 같은 것을 알 수가 있다네.
그렁저렁하다가 식사 시간이 되면 집에 가서 가족들과 식 탁에 둘러앉아, 이 가난한 산장과 보잘것없는 재산이 허용해 주는 식사를 들지.
식사가 끝나면 다시 선술집으로 돌아가네. 이 시간의 선술집 단골들은 푸줏간 주인과 밀가루 장수와 두 사람의 벽돌공인데, 이 친구들과 나는 그날이 끝날 때까지 크리커나 트릭 트랙 놀이를 하면서 불한당이 되어 보낸다네. 카드와 주사위가 난무하는 동안 무수한 다툼 이 벌어지고, 욕설과 폭언이 터져 나오고, 생각할 수 있는 별별 짓궂은 짓은 다 자행되지.
거의 매번 돈을 걸기 때문에 우리가 질러대는 야만스런 목소리가 산 카시아노 마을에까지 들릴 정도라네. 이렇게 해서 나는 나의 뇌에 눌어붙은 곰팡이를 긁어내고, 나를 향한 운명의 장난에 분노를 터뜨리는 것일세. 이처럼 내 자신을 짓밟는 것은, 운명의 신이 나를 괴롭히는 것을 아직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하네.
밤이 되면 집에 돌아가서 서재에 들어가는데, 들어가기 전에 흙 같은 것으로 더러워진 평상복을 벗고 관복으로 갈아입네.
예절을 갖춘 복장으로 몸을 정제한 다음, 옛사람들이 있는 옛 궁정에 입궐하지. 그곳에서 나는 그들의 친절한 영접을 받고, 그 음식물, 나만을 위 한, 그것을 위해서 나의 삶을 점지받은 음식물을 먹는다네. 그곳에서 나는 부끄럼 없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물어보곤 하지. 그들도 인간다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대답해 준다네.
그렇게 보내는 네 시간 동안 나는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않네. 모든 고뇌를 잊고, 가난도 두렵지 않게 되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느끼지 않게 되고 말일세. 그들의 세계에 전신전령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겠지.
단테의 시구는 아니지만, 들은 것도 생각하고 종합하여 정리하지 않는 한 과학이 되지 않는 것이니, 나 도 그들과의 대화를 [군주]이라는 제목의 소논문으로 정리해 보기로 했네. 거기서 나는 가능한 데까지 이 주제를 추구하고 분석해 볼 참이네.
군주국이란 무엇인가? 어떤 종류가 있는가? 어떻게 하면 획득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보전할 수 있는가? 왜 상실하는가?
만일 자네가 지금까지 내 공상의 소산이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도, 이것만은 마음에 안 들 덕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군주들에게는, 특히 신흥 군주들에게는 받아들여질 것임에 틀림없을 줄 알고 있네. 프롤로그 16~18쪽.
G : 아~ 마키아벨리가 《군주론(Il Principe)》 같은 저술을 할 때면 '의관을 정제'하고 글을 썼다니 옛날 우리 선비들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P : 저는 각종 문헌을 조사해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이런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 놓은 시오노 나나미가 참 존경스러워요. 전에 상법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런 퀴즈를 내주곤 했어요. "시오노 나나미의 말에 의하면 같은 시대의 이태리 사람이라 해도 피렌체 남자는 말끔히 면도를 한 반면 베네치아 남자들은 수염을 텁수룩하게 길렀다고 한다. 무엇이 두 지역의 패션 스타일을 다르게 만들었을까?"
G : 정말이예요? 주된 산업이 피렌체는 금융업, 베네치아는 무역업이라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무엇이 다르지요?
P : 이러한 통찰력이 시오노 나나미의 강점이고 많은 기업 CEO들이 그의 책을 즐겨 읽었다는 게 이해가 됩니다. 키워드는 '위험관리(risk management)'라 할 수 있죠. 베네치아의 무역거래 상대방이 터키인, 아랍인들이고 잘 생긴 이태리 젊은 남자들은 그들의 남색 대상이 되기 쉬웠답니다. 반면 피렌체에서는 금융업 종사자들이 고객의 신뢰를 얻기 위해 말끔한 차림을 해야 했겠지요.
G :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시대의 이탈리아 국내외 정세는 어떠했나요? 제 짧은 세계사 지식으로 동로마 제국이 1453년 오스만 튀르크에 멸망 당했고, 이태리 반도에서는 로마교황령을 비롯한 여러 도시국가와 공국이 난립해 있었으며 피렌체에서는 메디치 가의 후원으로 르네상스가 꽃을 피웠다는 정도인데 《피렌체사》를 썼던 마키아벨리는 어떻게 진단했는지 궁금합니다.
P : 네, 피렌체 하면 메디치 가, 그중에서도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i Piero de' Medici, 1449~1492)를 빼놓을 수 없지요.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사》에서 동시대의 피렌체 시민들로부터 '위대한 자(Il Magnifico)'라고 불렸던 로렌초를 "운명으로부터, 그리고 신으로부터 최대한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다"라고 썼습니다. 20세에 피렌체공화국의 지도자가 된 그는 군사 대국이 못되고 용병에 의존하는 피렌체공화국의 독립과 자유를 지키려면 먼저 이탈리아 반도의 독립과 자유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군사 대국이 아닌 이탈리아의 독립과 자유를 지키려면, 이탈리아 내의 여러 나라가 서로 싸우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이탈리아 내 각국의 분쟁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전쟁은 무슨 원인으로 일어나는가? 대국끼리 직접적인 원인으로 정면 충돌하는 경우도 물론 있다. 그러나 대국간의 전쟁, 이를테면 이탈리아 독립과 자유를 위협할 구실을 프랑스 같은 타국에 줄 우려가 있는 전쟁은, 대국간의 경계에 있는 소국에 지배권을 확대하려다가 일어나는 경우가 전자의 경우보다 훨씬 많은 것이 현실이다. 당시 대국에 속하는 밀라노공국, 베네치아공화국, 피렌체공화국, 로마교황령, 나폴리왕국이 국경 바로 밖에 있는 소국에 세력을 뻗치고 싶어도 그러기 어려운 상태를 만들어내면 된다. 소국들의 건전한 존속이야말로 대국간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불가결한 요인이다. 74쪽.
G : 인접 소국 우크라이나가 NATO 가입을 추진하자 러시아가 옛 위성국에 대한 지배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지난 2월 23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잖아요? 유럽에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상황이 되풀이되는군요. 15세기 후반 로렌초는 이 문제를 어떻게 대처했나요?
P : 로렌초는 세력균형을 위해 이리저리 동맹을 맺고 푸는 외교정책보다 싸움의 근본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멀리 내다보고 협력강화정책을 폈습니다. 메디치 가에서 운영하는 은행에서 돈을 빌려 인접소국이 필요로 하는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요. 그러자 당시 초국가적 지위에 있는 로마교황령의 식스투스 교황이 그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걸림돌이 되는 로렌초를 제거하려 했어요. 1478년 부활절 날 은밀하게 추진되었던 로렌초 암살 음모가 실패로 돌아가자 교황은 로렌초에 우호적인 여러 나라는 빼고 이웃 나폴리왕국을 시켜 로렌초 축출 작전을 폈어요. 그러자 로렌초는 겨울철 휴전에 들어가자 나폴리왕국에 단신으로 찾아가 협상을 벌이고 나폴리 국왕의 체면을 살려주는 선에서 나폴리 군대가 피렌체 외곽에서 철군하도록 했습니다. 마침 1480년 7월 오스만 튀르크가 옛 영유권을 주장하며 남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교황은 더 이상 피렌체에 신경쓸 수 없게 되었지요. 1481년 5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던 메메드 2세 술탄이 급서하자 이탈리아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렌초는 행운아라는 발을 듣고 피렌체를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 꽃의 도시로 만들었어요. 그러나 집안의 내력인 통풍을 피하진 못하고 1492년 세상을 떴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마키아벨리가 지도자론의 모델로 삼은 것은 행운을 누렸던 로렌초가 아니었습니다.
《피렌체사》에서 그토록 찬사를 받았던 로렌초가, 군주 정체건 공화 정체건 지도자론이기도 한 《군주론》과 《정략론》에서는 왜 푸대접을 받아야 했는가? 로렌초의 말년에 있었던 약간의 공금 횡령이 실격사유였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도덕성을 요구하지 않았다. 도덕적이게 거동하는 것이 민중 조작에 효과가 있다면 그런 체나 하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또 로렌초의 혜택받은 환경과 출발을 감안하여 그후의 업적을 할인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치학자나 역사가의 편견으로부터도 마키아벨리는 자유로왔다. 다른 사람보다 더 혜택 받은 환경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행운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행운을 타고났으면서도 역량이 없어 그 행운도 활용하지 못한 사람을 너무나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로렌초가 《군주론》의 모델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책 속에 수십 명이나 등장하는 인물들 속에도 끼지 못했다. 《군주론》의 모델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추기경 시절에 낳은 사생아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 1475~1507)였다. 로렌초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교양도 낮고, 더욱이 자기의 야망을 실현하는 일밖에 생각하지 않은, 그러나 역량과 행운을 타고 난 체사레 보르자였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111~112쪽.
Note
1] 시오노 나나미는 놀랍게도 700년 전에 씌어진 단테의 《신곡》을 읽을 때 현대어로 옮길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현대 이탈리아의 표준어는 피렌체와 시에나를 중심으로 하는 토스카나 방언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토스카나 사투리야말로 단테와 보카치오와 로렌초와 마키아벨리 덕택에 그 시대에 이미 완성되었으며, 그것이 지금까지 승계되어 내려온 데 지나지 않는다. 물론 옛 고전 투의 표현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그것도 '주'를 달면 해결되는 정도의 것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고문(古文)이 아니다." 104쪽.
2] 르네상스 시대답게 마키아벨리의 저술은 《로마사 논고》, 《만드라골라》, 《전술론》, 《피렌체사》 등 실용서와 역사서를 넘나들고 있다.
3] 1527년 시골의 초라한 가족묘지에 묻혔던 마키아벨리는 그의 명성이 커지면서 200년 후 아주 웅장한 교회묘지로 옮겨졌고 그의 묘비명에는 "그 어떤 찬사로도 부족할 만큼 위대한 이름"이라는 글이 새겨졌다.
4] 마키아벨리는 그의 저술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명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중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군주는 여우와 사자를 겸비해야 한다. 사자는 스스로 함정을 막을 수 없고, 여우는 이리를 막을 수 없다. 따라서 함정의 단서를 알기 위해서는 여우가 되고, 이리를 도망가게 하기 위해서는 사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2. 시간은 이익과 해악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한꺼번에 몰고 온다.
3. 인간은 대체로 내용보다는 외모를 통해 사람을 평가한다. 누구나 다 눈을 가지고 있지만 통찰력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4. 인간은 운명에 몸을 맡길 수는 있지만 항거할 수는 없다. 또한 인간은 운명이라는 실을 짤 수는 있지만 이것을 찢어 끊을 수는 없다.
5.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허영심이 강하고, 타인의 성공을 질투하기 쉬우며 자신의 이익 추구에 대해서는 무한정한 탐욕을 지닌 자다.
6. 인간은 자유의지로 스스로에게 자초한 상처나 그 밖의 병에 대해서는 타인의 손으로 가해진 것만큼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7. 직함이 인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직함을 빛나게 한다.
8.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가난도 걱정도 병도 아니다. 그것은 생에 대한 권태다.
9. 올바른 모범을 보여주는 것은 무한한 자선보다 낫다.
10. 인간에게 덕과 부귀가 공존하는 경우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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