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음악을 가르쳐주신 김두완 선생님 덕분에 클래식 음악에 눈을 뜨게 되었다.
베트남 참전용사였던 형님이 귀국할 때 들고 온 라디오 겸용 포터블 전축으로 FM방송을 듣고 음악 선생님이 가끔 물어보시는 클래식 음악에 대해 손을 들고 제법 아는 척 할 수 있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클래식 명곡이라면 베토벤의 교향곡 6번("전원"),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 엘가의 "사랑의 인사" 그리고 사라사테가 연주하는 "지고이네르바이젠(Zigeunerweisen)"을 꼽을 수 있으며, 이 곡들은 여전히 나의 애청곡 리스트에 올라 있다.
그중에서도 에드워드 엘가(Sir Edward William Elga, 1857-1934)의 "사랑의 인사(Salut d'Amour)"는 로맨틱 무드에 잠길 때면 듣고 또 들어도 다시 듣고 싶은 곡이다. 지금은 "위풍당당 행진곡" 말고도 영화 <덩케르크>에 삽입되었던 "수수께끼 변주곡 님로드(Enigma Variations Nimrod)"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한편 엘가 만년의 작품인 첼로 협주곡을 비운의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1945-1987)가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하는 런던 필하모닉과 함께 연주하는 동영상(1967)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첼로 연주곡으로 기억된다. 뒤 프레는 신예 지휘자 바렌보임과 결혼도 했으나 이 곡을 녹음한 지 6년 후 다발성 경화증으로 온몸이 마비되어 첼로를 손에서 놓아야 했다.
에드워드 엘가는 2008년 각국의 개인정보 보호 법제에 관한 워크숍 결과물을 공저로 출간한 영국의 출판사 이름이기도 하다. 우아하면서도 귀족적인 그 이름이 가난한 형편에 정식 음악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던[1] 엘가에게는 너무 벅찼던 것 같다. 1872년 그는 일반중학교를 마친 후 일반적인 전문직 코스인 변호사 도제 수업을 받기로 하고 현지 변호사 사무실에 들어갔다. 당시 영국에서는 고전음악이 별로 인기가 없는 데다 무명의 가톨릭 교도인 엘가가 작곡한 곡을 발표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어려웠던 성장 과정
1857년 잉글런드 우스터(Worchester)에서 태어난 그는 피아노 조율사이자 성당의 오르가니스트인 아버지 덕분에 일찍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고 어머니를 통해서는 문학적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 열 살 때 가족공연을 위해 작곡[2]도 하고,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아버지가 조율한 귀족과 부호들 맨션의 피아노를 직접 연주해 보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는 아버지 어깨 넘어로 성당 안에서 도서관에서 빌려온 악보를 가지고 현장 실습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엘가가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는 변호사의 길을 포기하고 스물여덟 살까지 고향의 여러 소편성 관현악단에서 지휘를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실내악단에서 바이올린, 바순 등 여러 악기를 연주하고 공연을 위한 편곡도 하며 지냈다. 그는 악보 출판을 위해 런던을 종종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의기소침해졌다. 내성적인 엘가로서는 장래의 비전도 안 보이고 생활비마저 모자라니 삶의 활력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가 피아노, 바이올린 레슨 지도를 하며 근근히 먹고 살 적에 새로운 학생이 들어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보다 8살 연상인 캐롤라인 앨리스 로버츠(Caroline Alice Roberts, 1848-1920)는 그와는 신분이 다른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앨리스의 아버지는 인도 주둔 영국군 장성을 역임한 귀족이고 그녀 본인도 시와 소설을 출간하고 5개 국어에 능통한 문필가였다. 스물아홉이던 엘가는 앨리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다가 그만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이 결혼 의사를 밝히자 앨리스의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앨리스 집안에서는 신분도 종교도 다르고 여덟 살이나 연하인 엘가가 재산을 탐내 그러는 줄 알고 그녀의 상속권을 박탈해 버렸다.
행복한 결혼생활
1889년 5월 엘가와 앨리스는 천신만고 끝에 결혼하였다. 그 후 앨리스는 평생토록 엘가의 헌신적인 비서이자 매니저, 음악비평가가 되어 그가 명성을 얻을 때까지 최선을 다했다. 앞서 말한 "사랑의 인사"는 앨리스가 그에게 약혼기념으로 선물한 시집에 있는 시를 토대로 엘가가 1888년에 작곡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품이었다. 처음엔 독일어로 된 시 제목 Liebesgruß (영어로는 Love's Greeting)을 그대로 붙여서 악보를 출판했더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출판사의 제안에 따라 당시 유행하던 프랑스어로 제목을 붙이니 똑같은 악보가 영국은 물론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날개 돋힌 듯 팔리기 시작했다.
신혼 여행에서 돌아온 엘가 부부는 음악의 중심지에서 살아야 한다고 믿고 런던에 신혼 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으므로 여러 차례 이사를 다녀야 했다. 그럼에도 기분이 심하게 오르내리던 엘가와는 달리 '장군의 딸' 앨리스는 용기를 잃지 않고 한결같이 엘가를 격려해 주었다.[3] 앨리스의 내조에 힘입어 엘가는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집에서 가까운 수정궁(Crystal Palace)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거의 매일 참석하여 베를리오즈, 바그너 같은 새로운 대륙의 음악 경향에도 접할 수 있었다. 그가 작곡한 "사랑의 인사"가 관현악곡으로 연주되기도 했지만 신곡을 발표하고 관심을 끌 수 있는 기회가 올 듯하면서도 좀처럼 실현되지 않아 그로서는 애가 탈 노릇이었다.
런던에서는 일거리가 별로 없어서 1891년 엘가는 가족을 데리고 고향 우스터로 돌아가 소규모 앙상블을 지휘하거나 음악을 가르치는 일을 해야 했다. 그 결과 잉글런드 중부지방(Midland)에서 열리는 합창제(choral festivals) 같은 행사에서 그의 음악활동[5]은 돋보이기 시작했고 평단의 평가도 우호적이었다.
대기만성(大器晩成)형의 작곡가
마침내 앨리스의 확신은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1899년 엘가의 신곡 "수수께끼 변주곡(Enigma Variations)"이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런던에서 초연되었다. 그 곡은 아내 앨리스(CAE)를 비롯한 친한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들이라면 이런 식으로 곡을 쓰겠지 하는 심정으로 작곡하였기에 해당 곡을 그들에게 헌정했다. 그 중에서도 출판업자인 오거스트 예이거에게 헌정한 "님로드(Nimrod)"에 대한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는 단숨에 고전음악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영국 최고의 음악가로 떠올랐다. "수수께끼 변주곡"은 고전음악의 원산지라 할 수 있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주요 관현악단의 레퍼토리에도 자주 오르게 되었다.
1900년 영국을 대표하던 음악가 아더 설리번 경(Sir Arthur Sullivan)이 타계하자 엘가가 그 뒤를 이을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뉴먼 추기경(Cardinal John Henry Newman)의 신앙시에 곡을 붙인 합창곡 "게론티우스의 꿈(The Dream of Gerontius)"은 1901년의 초연 때 합창 파트의 준비 부실로 성공하진 못했으나 독주와 관현악 부분이 걸작임에는 이견이 없었다. 이 오라토리오 신곡이 1901년 "수수께끼 변주곡"과 함께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연주되었을 때에는 크게 호평을 받았다. 비엔나, 파리 등 유럽 평단의 호평은 1902년에도 이어졌다. 엘가가 한때 흠모했던 당대 음악의 최고봉 리하르트 쉬트라우스가 엘가를 '마에스트로 엘가'라 칭하며 그를 위해 "영국 최초의 진보적 음악가(the first English progressive musician, Meister Elgar)"라고 축배를 제안할 정도였다.
뭐니뭐니 해도 엘가를 세계적인 음악가로 만든 것은 모든 영국적인 요소를 내포한 "위풍당당 행진곡(Pomp and Circumstance Marches)"이라 할 것이다. 1901년 런던 프롬나드 콘서트에서 처음 연주되었을 때에는 청중의 열화 같은 요청에 따라 앙콜곡으로 한 번 더 연주되었다. 1902년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 갈라 콘서트를 위해 벤슨(A.C. Benson)의 대관식 송가(Coronation Ode)에 "위풍당당 행진곡"의 일부 멜로디를 붙여 "희망과 영광의 땅(Land of Hope and Glory)"이란 곡을 만들었다. 이 곡은 영국인들이 주요 행사 때마다 일어서서 손을 들고 떼창으로 부르는 제2의 국가 같은 노래가 되었다.
이와 같이 엘가가 작곡한 다른 곡들도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국내외적으로 가장 영국적인 작곡가로서 인정 받음에 따라 1904년 3월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온통 엘가의 곡만 가지고 사흘간 축제 공연이 열렸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마침내 그해 7월 엘가는 '기사(Knight, 후에는 First Baronet)' 작위를 받고, 앨리스 역시 그와 함께 한 공로로 'Lady Elgar'라고 불리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녀가 원래 속했던 귀족사회로 복귀한 셈이었다. 그리고 엘가는 미국으로 여러 차례 연주여행을 다녀오는가 하면 1908년 버밍엄 대학의 교수 직을 제안받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애국심을 고취하는 여러 곡을 작곡 발표하였다. 그가 유명해질 수록 그의 사생활은 그만큼 제약을 받게 되었는데 앨리스가 1920년 세상을 뜨자 그는 삶의 동력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건강까지 악화되는 바람에 1934년 77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그리고 리틀 맬번(Little Malvern)에 있는 성 월스턴 성당(St. Wulstan's R.C. Church) 가족 묘지의 앨리스 곁에 묻혔다.
Note
1] 엘가는 중학교를 졸업하면 독일로 유학을 가서 멘델스존이 세운 라이프치히 음악원(Leipzig Conservatory)에서 음악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독일어를 열심히 공부했으나 아버지의 재정 형편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정식 음악교육을 받은 것은 스무 살 때 잠시 런던에 가서 헝가리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 아돌프 폴리처(Adolf Pollitzer)로부터 받은 매스터 클래스가 거의 유일했다.
2] 엘가가 열 살 때 가족 연극을 위해 작곡한 곡은 고이 간직했다가 40년 후에 약간의 수정을 가해 관현악 조곡 "젊음의 지팡이(The Wand of Youth)"로 발표하였다.
3] 앨리스는 엘가와 결혼한 후 일찍이 촉망 받는 작가로서의 커리어를 기꺼이 포기했다. 그 무렵 앨리스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The care of a genius is enough of a life work for any woman."(천재인 남자를 돌보는 일은 여자가 평생을 두고 해볼 만한 일이다.) 엘가는 "사랑의 인사" 곡을 Carice에 헌정했는데 Caroline과 Alice를 합친 약혼녀의 애칭이었고 1890년 딸이 태어나자 Carice라고 이름지었다.
위 앨리스의 말이 딱 들어맞는 케이스는 또 있다. 바로 '스웨덴의 국민화가'로 블렸던 칼 라르손의 아내 카린, 비록 사후일망정 남편 테오 반 고흐와 시숙 빈센트 반 고흐를 '위대한 화가' 형제로 추앙받게 만든 네덜란드의 요한나 봉허가 그 주인공들이다.
4] 엘가의 친구이자 악보 출판업자인 오거스트 예이거(August Jaeger)는 다음과 같이 엘가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다. "어느날 우울증이 엄습하더라도 신의 섭리로 그대가 받은 창조적 능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그대의 욕망과 필연성은 꺾을 수 없을 겁니다. 누구나 인정해주는 때가 반드시 찾아올 것이요." (A day's attack of the blues ... will not drive away your desire, your necessity, which is to exercise those creative faculties which a kind providence has given you. Your time of universal recognition will come.) 성경 창세기 10장 8-12절에 등장하는 니므롯은 함의 손자, 구스의 아들로 재능이 많고 능력이 뛰어난 사냥꾼, 장군, 정치가였다. 구약성경에서 니므롯은 바벨론을 건설하고 큰 건축물을 많이 세웠으나 그것은 가나안 식의 세속적인 성공일 뿐 영적인 헌신은 없었다고 전한다.
5] 1890년대에 엘가가 꾸준히 작곡하여 발표한 작품으로는 "The Black Knight"(1892), "King Olaf"(1896), "The Light of Life"(1896), "Caractacus"(1898) 등이 있다.
⇒ 사람이 만들어가는 세상을 더 보시려면 이곳을 탭하세요.
'Peopl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물] S급 인재는 거져 나오지 않는다 (0) | 2022.03.29 |
---|---|
[Book's Day]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0) | 2022.03.13 |
[인물] 좋은 일진(日辰)이란 무엇인가? (0) | 2022.03.08 |
[심리] 생각에 관한 생각의 오류 - 편향 (0) | 2022.02.18 |
[Book's Day] 연어, 나목(裸木), 탐조(探鳥) (0) | 2022.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