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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 자유로운 영혼과 책임감

Onepark 2024. 10. 23. 22:00

40여 년의 직장생활을 마치면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리라 생각했다.

자유롭게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며 보고 들은 것을 사진과 글로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지란지교를 꿈꾸며"로 유명한 유안진 교수의 "자화상"을 읽게 되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모델이 거기 있었다.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라니 무엇이 그를 가로막겠는가!

비와 이슬, 눈과 서리가 강물이 되어 바다로 쉬지 않고 흘러간다고 말했다.

영어로 옮기는 데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보면 구름에도 높낮이 있음을 알게 된다.

 

자화상  - 유안진

Self-Portrait   by Yu An-jin

 

한 오십 년 살고 보니

나는 나는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라

눈과 서리와 비와 이슬이

강물과 바닷물이 뉘기 아닌 바로 나였음을 알아라

After fifty years of life,

I realize that I’m I’m the daughter of clouds and lover of winds.

Snow, frost, rain, and dew

Rivers and seas know that it’s me, no one else.

수리부엉이 우는 이 겨울도 한밤중

뒤뜰 언 밭을 말달리는 눈바람에

마음 헹구는 바람의 연인

가슴속 용광로에 불 지피는 황홀한 거짓말을

오오 미쳐볼 뿐 대책없는 불쌍한 희망을

내 몫으로 오늘 몫으로 사랑하여 흐르는 일

Even in the middle of winter nights when the owl cries,

In the snowy wind galloping like horses

over the frozen soil in the backyard,

It’s the lover of winds that rinse the heart.

I'll tell you a ravishing lie that ignites the furnace in my heart

Only trying to be mad but hopeless with no countermeasure,

Flowing with love for my share, the share of today's work.

삭아질수록 새우젓갈 맛나듯이

때 얼룩에 절을수록 인생다워지듯이

산다는 것도 사랑한다는 것도

때 묻히고 더렵혀지며

진실보다 허상에 더 감동하며

정직보다 죄업에 더 집작하며

어디론가 쉬지않고 흘러가는 것이다

The more I get fermented,

the more delicious it becomes like pickled shrimp.

The more I bow to the stain, the more I’m close to real life.

To live and to love are meant

To get stained and dirty.

I am more moved by illusions than truth.

I'm more commited to sin than honesty.

It flows to somewher without stopping.

나란히 누웠어도 서로 다른 꿈을 꾸며

끊임없이 떠나고 떠도는 것이다

멀리 멀리 떠나갈수록

가슴이 그득히 채워지는 것이다

갈 데까지 갔다가는 돌아오는 것이다

하늘과 땅만이 살 곳은 아니다

허공이 오히려 살 만한 곳이며

떠돌고 흐르는 것이 오히려 사랑하는 것이다

Even if we lie side by side, we dream different dreams.

We are constantly leaving and wandering.

The farther we go away,

The more our hearts are filled to the brim.

We go where we want to go. and then we come back.

Heaven and earth are not the only place to live.

The empty sky is the place to live.

To wander and flow is to love.

돌아보지 않으리

문득 돌아보니

나는 나는 흐르는 구름의 딸이요

떠도는 바람의 연인이라

I will not look back.

Suddenly I turn around.

I‘m I’m the daughter of the flowing clouds, and

The lover of the wandering winds.

 

얽메임이 없는 자유로운 영혼은 누구나 원하는 바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고 우리의 성정(性情)에도 맞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은퇴 후에 자주 접하게 되는 YouTube에 청취자들의 사연을 들려주는 채널이 있다. 

사연도 갖가지인데 고진감래의 인간승리, 배신과 인과응보의 사이다 복수,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야설 등 자신의 기호에 따라 골라 듣는(요즘은 사연이 길어져서 속도를 150% 빠르기로 해야 지루하지 않음) 재미도 있다.

 

그 중에서 내가 즐겨 듣는 '썰사남'(썰을 사랑하는 남자) 사연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음도 알게 되었다.

초년 고생이 많은 주인공은 고아원에서 자랐거나, 형제가 많은 가운데 부모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가장을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맏이는 동생들을 먹이고 가르쳐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불철주야 애를 쓰는 반면 둘째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나 몰라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 세대만 하여도 형편이 어려운 식구들이 잘 살게끔 독일에 광부나 간호사로 가거나 월남 파병을 자원하고 중동에 건설기능공으로 가는 사람이 많았다. 아니 1960, 70년대에는 어느 집이고 식구들 중에 타지에 가서 공장 노동자, 식당 종업원, 버스 차장 등으로 고생하며 집에 돈을 부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이 고생한 덕분에 집안 형편이 나아지고 경제사정도 좋아지며 국가적으로도 상품수출 못지 않게 외환보유고가 늘어나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그러므로 식구를 위해 희생할 줄 모르고 자기 혼자 잘 살겠다는 무책임한 사람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반감 정도가 아니라 역겨움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 충북 단양 상공을 비행하는 패러글라이딩. 사진출처: Activity Rail-ro

 

이런 생각을 하다가 '자화상' 시를 다시 [영어로] 읽어보니 느낌이 사뭇 달라졌다.

첫째 연에서 나이가 들면서 성격이 바뀌는 것 같아도 비와 눈, 서리와 이슬이 모두 한가지인 것처럼 사람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

둘째 연에서는 젊어서 한 때 말 달리듯 돌아다니고 가슴 속에선 용광로 불길처럼 타오르지만 그것은 한낱 희망 사항이었다는 것, 

셋째 연에서는 나이가 들면서 마음에 묻은 때와 얼룩에도 익숙해지고 그런대로 쉼없이 흘러가는 삶이라고 깨닫게 된다는 것,

넷째 연에서 '가슴이 그득히 채워지고 갈 데까지 갔다가는 돌아오는 것'이 삶을 사랑한 것이었음을 자각하고,

마지막 연에서  자기가 흐르는 구름의 딸/아들이요 떠도는 바람의 연인이었음을 자랑스럽게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 인생에서 구름이 없다면 비도 내릴 수 없으니 그 땅은 사막이 되고 말 것이다. 또 바람이 불지 않으면 대기의 순환이 안 되어 공기가 탁해지고 식물은 가루받이를 못할 것이다. 옛날에는 바람을 이용해 바다를 항해할 수도 없었을 테니 문명의 발전, 무역의 성행을 기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오로지 노를 젓기만 해서는 어찌 큰 바다를 건널 수 있었겠는가!

 

처음엔 이런 자화상을 그려 놓은, 책임감을 모르는 사람은 상종하지 못할 인간으로 여겼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도 얼마 전 윤동주의 '자화상'을 읽으며 많은 공감을 했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어떻게든지 살아내야 하는 사연의 주인공처럼 미워할 수 없다고 체념 비슷한 동정심을 느꼈다. 

그러나 유안진의 '자화상'은 읽으면 읽을 수록 구름처럼 바람처럼 다이나믹하게 노력하는 모습이 가상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러한 모습을 많이 닮아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