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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가을에 읽기 좋은 시

Onepark 2024. 11. 11. 10:00

평소 철 따라 계절에 맞는 시를 찾아 보내주는 친구가 박이도 시인의 “생각하는 자유가”를 카톡방에 올렸다.

박 교수님은 필자의 경희대 재직 시절 고등학교 동문 모임에서 몇 차례 뵈었었다.

교수님의 근황을 알아보니 2003년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정년퇴임하신 후 아직도 신앙심과 평안도 민담을 소재로 사적(詩作) 활동과 강연을 하고 계신다고 한다.

은퇴 후에도 여전히 평생 해오신 대로 시를 쓰고 강연을 하고 다니시는 선생님께 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다.

잠시나마 한 캠퍼스에 몸 담았던 까마득한 후배의 입장에서 이 계절에 맞는 선생님의 시 몇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 2024. 5. 17 서울 코엑스 별마당도서관 명사초청 특강에서 강연하시는 박이도 시인

 

 

생각하는 자유가  - 박이도

Freedom to Think is   by Park E-dou

 

가을엔 돌아가고 싶다

그림자 따라 빈들에 나서면

사라지는 모두와 결별의 말을

나누고 싶어

In autumn, I want to go back.
When I follow the shadow to the empty field,
I want to say goodbye to
Everyone who disappears.

 

기러기처럼 사라지는 계절, 세월을 향해

아쉬움을 울고 싶다

허연 낙엽은 지고

마른 풀잎은 가볍게 날리는

여기에선 모두가 부산하다

The season that disappears like a goose, towards the years
I want to cry my regrets.
Gray-colored leaves are falling,
The dry grass blows lightly and
Everyone is busy here.

호올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 허수아비처럼

한참을 서서

울고 싶다

I can think of it a-lone 
Freedom, like a scarecrow.
Standing for a while,
I want to cry.

 

* 보는이가 있던 없던 늦여름과 가을의 단풍이 공존하는 풍경

 

박이도 명예교수님의 근황을 알아보다가 문단에 등단하신 계기가 현실의 답답함을 풀어주는 '사이다' 같은 시였음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황제와 나>라는 작품이 당선되었어요. 나는 학보병(학적보유병)으로 군에 가서 최전방에 배치됐어요. 수색 중대에 가니까 중대장이 절대적 권력을 가졌더라고요. 그를 황제와 같은 모델로 해서 좀 스케일 크게 썼지요. 그때 김광균 선생님이 장문의 편지를 써서 굉장히 칭찬하는 글을 써서 보내주셨어요. 한국문학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는. 미당에게 보여주었더니, 기뻐하며 김광균 선생을 만나면 안부 전해달라고요."

* 출처 : 문학인신문, "언어를 낚는 시인 박이도", 2024.2.22.

 

 

황제(皇帝)와 나  - 박이도

The Emperor and I   by Park E-dou

 

우리 황제의 눈은 원시안(遠視眼)

무한한 식민지의 노동을 모아 제국을 세웠다

스스로 돌아갈 웅대한 왕묘(王墓)를 준비하며

그는 만족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Our Emperor has far-sighted eyes

He has built his empire by gathering the labor of endless colonies.

Preparing a magnificent mausoleum for his own return.

He could only make a smile with satisfaction.

 

우리 황제의 눈은 멀었다

아직 거느리지 못한 대륙을 위하여

병정(兵丁)을 보내고 또 보냈다 살아 있는 한

저 멀고 먼 지평(地坪)을 넘고, 수평(水坪)을 넘어

끝없는 정복을 위해 살아 있는 한

그는 잠시도 왕관(王冠)을 벗을 수가 없었다

조용한 오수(午睡)의 비밀을 끝내 모르고

피로한 얼굴에 주름살이 잡혀갔다

Our emperor's eyes are blind.

For the continent he has not yet conquered,

As long as he lives, he has sent troops after troops,

Over the distant land horizon, over the maritime horizon.

For endless conquest, as long as he lives,

He could not take off his crown for a moment.

He would never know the secrets of the silent nap.

His face has wrinkled with fatigue.

 

황제의 눈은 원시안

그의 눈은 멀었다

그의 눈은 멀었다

The emperor's eyes are far-sighted.

His eyes are blind.

His eyes are blind.


졸병이던 시인이 수색중대의 중대장 때문에 인내심이 바닥이 날 즈음 중대장을 황제라 여기고 그를 가까운 데 있는 부하들도 못 챙기는 눈 먼 사람이라고 비웃어줬다는 발상에 무릎을 쳤다. 그가 아무리 권력을 휘둘러도 결국은 땅 속에 묻힐 존재라는 것, 그 무덤을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미더라도 그 속에 들어가는 자는 한낱 주검에 불과하다는 것, 잠깐의 휴식도 없이 낮잠의 즐거움을 모르는 가엾은 사람이라는 것은 그가 얼마나 불쌍한 인간이란 말인가!  

당시 학병으로 입대한 최전방의 군부대에서 황제 같은 권력을 가진 중대장이었지만 그가 얼마나 가련한 존재인가 동정하는 함축적인 시를 발표함으로써 중대장과 졸병의 관계가 그만 역전(逆轉)이 되고 말았다.

 

 

어느 인생  - 박이도

A Life  by Park E-dou

 

이제야 내 뒷모습이 보이는구나

새벽안개 밭으로

사라지는 모습

너무나 가벼운 걸음이네

그림자마저 따돌리고

어디로 가는 걸까

Now I can see my back.

Into the field of dawn mist

It disappears.

So light steps are

Overtaking even the shadows.

Where is it going?

 

* 이젠 나도 뒷모습을 돌아볼 나이가 되었다.


인생의 황혼기에 내가 살아온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자기 삶의 그림자를 되돌아보는 것과 비슷할 것 같다.

어느 그림자인들 화려하고 볼품이 있겠느냐만 늘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시인이 생각하기엔 그의 육신의 그림자가 초라해 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밑동이 잘려나간 무시래기 같다는 비유가 재미있다. 밑둥의 무는 여러 값나가는 용도로 쓰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하찮게 여겨졌던 무청일지라도 오늘날에는 섬유소가 풍부한 건강식품으로 애용되고 있음에 비추어 '존재의 없음'이 아니라 '존재의 재발견'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자  - 박이도

 

그림자 중엔 사람의 그림자가 제일 초라하다. 시의 그림자 중엔 내 모습, 육신의 그림자가 초라하다. 사막의 선인장처럼 엉성한 가시와 밑동이 잘려나간 무시래기처럼. 거추장스럽다. 정오를 맞아 그림자 없음의 가벼움, 내 존재를 드디어 확인한다. <없음>의 의미, 내가 없음으로 육신의 그림자도 없다고. 오늘은 비 오는 날이 그립다. 육신의 허물을 잊어버리고 싶다. 그립다. 잊어버리고 싶다.

 

Shadow  by Park E-dou

 

Among the shadows, the shadow of a person is the shabbiest. Among the shadows of poetry, my own shadow, the shadow of the flesh, is the shabbiest. Like untidy thorns of a cactus in the desert, or dried radish leaves with cut-off base, it is cumbersome. At noon, the lightness of shadowlessness finally confirms my presence. The meaning of ‘Nothing’ is translated into non-existence of me, or no shadow of the flesh. Today I long for a rainy day. I want to slip out of the hollow skin of the flesh. I long for it. I want to forget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