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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통영-욕지도에서 발견한 재미

Onepark 2024. 12. 30. 20:30

얼마 전 같은 종심소욕(從心所欲)의 나이인 친구가 일상 속에서 재미를 찾고자 한다며 '노잼' 없는 하루가 '잼 데이'가 아니겠냐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일흔 넘은 사람의 삶의 재미란 무엇일까"를 놓고 친구들 사이에 설왕설래가 있었다.

이럴 때 공자님의 '군자삼락'(君子三樂)을 말하면 '꼰대' 소리 듣기 십상이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나 역시 남은 인생을 무슨 재미로 살 것인가 곰곰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아들 내외가 이끄는 대로 세밑 남해 바다 여행에 나섰다.

통영에 있는 좋은 호텔에서 푹 쉬면서 한려수도의 '카프리 섬'으로 알려진 욕지도에 배를 타고 가보는 일정이었다.

전에 통영에 가서 케이블카도 타고 이색적인 해물탕과 충무김밥을 먹은 적이 있는 데다 지난 봄 이탈리아 일주 여행을 하면서 바로 카프리 섬에도 가보았던 터라 "별거 있을까?" 크게 기대를 하진 않았다. 

 

 

마침 일기예보에 중부 지방에는 눈이 내리고 전국적으로 기온이 떨어진다고 하여 단단히 무장을 하고 떠났다.

고속도로 주변 산과 들에는 흰눈이 덮여 있어서 간밤에 눈이 내린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대전 이남 지역에는 눈의 자취도 없고 오히려 동지가 지나서 봄의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다. 

통영 가는 길은 대전-통영 고속도로를 이용할 수 있으므로 서울에서 한반도 남단까지 가는 것임에도 네 시간 남짓 걸렸다.

우리의 숙소는 통영 국제음악당 옆의 스탠포드 호텔&리조트로 갔다.

콘도미니엄의 큰 방 2개와 거실 겸 주방이 있는 오션 뷰 룸이어서 방에 들어가자마자 탁 트인 남해 바다가 보였다.

몇 달 전부터 사용 후기를 참조하여 고르고 고른 며늘아기의 계획성 있는 준비 덕분이었다.

 

* 통영 스탠포드 호텔에서 산타클로스가 벽을 기어오르고 있다.
* 스탠포드 콘도 객실 밖으로 보이는 한려수도

 

통영에 가면 가 볼 곳이 많다고 했지만 오래 전 전망대에 올라가서 한려수도 경치를 구경했던 것이 생각나 통영 케이블카부터 타러 가자고 말했다. 오늘은 하늘이 아주 맑으므로 먼 곳의 섬까지 다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케이블카 타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우리는 줄을 서자마자 케이블카를 타고  미륵산(해발 458m) 아래 전망대까지 올라갔다. 

 

* 케이블카의 길이는 1975m, 소요시간은 10여 분, 주탑은 상부역사 부근 1개이며 2007년 12월 운행을 개시했다.
* 다도해가 펼쳐진 사진 왼편 산그림자의 봉우리 왼쪽 끝 건물이 스탠포드 리조트, 중앙의 골프코스는 통영로열 CC

 

통영 케이블카 전망대 3층에서는 바로 눈 앞의 한산도는 물론 용호도와 한려수도의 여러 섬들, 그리고 저 멀리 대마도까지 보였다.

한산대첩 전망대에서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을 함락한 왜병들이 배를 타고 선단을 이루어 이 앞바다를 지나 여수와 목포 방면으로 향하는 것이 더 잘 보였을 것이다.

당시 왜군은 수륙병진 계획을 세우고 남해안을 돌아 서해로 진출하여 호남지방을 석권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합동작전을 펴서 왜선들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했다. 그리고 유명한 학익진을 펴서 왜선들을 격파하고 그들이 더 이상 조선의 바다를 침범할 수 없도록 대첩( 閑山島大捷, 1592.7.)을 거두었다. 

실로 기원전 480년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한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이 아테네를 공격하기 직전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 장군이 페르시아 함대를 폭이 좁은 살라미스 만으로 유인해 격파한 것에 비견할 만한 국운(國運)을 좌우한 큰 승리였다. 그 이후 정유재란 때까지 이순신이 버티고 있는 한 일본 수군은 서해안으로 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 케이블카 역사에서 올려다 본 미륵산 한산대첩 전망대

 

저녁식사를 하러 통영의 유명 맛집인 한마음식당을 찾아 갔다.

그리고 굴과 새우, 삼겹살, 콩나물, 김치를 한 불판에 구워서 먹는 한마음 삼합을 주문했다. 여기에는 굴을 넣은 솥밥과 굴전, 석화, 무침, 생선구이가 따라 나왔다.

대패밥처럼 얇게 썰어 동그랗게 말린 삽겹살은 구웠을 때 굴과 새우, 김치와 맛이 썩 잘 어울렸다. 그래서 삼겹살 1인분을 추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해돋이 광경도 아주 장관이었다.

깜깜하던 동녘 하늘이 붉은 빛을 띠기 시작하면서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수평선 위로 섬들의 실루엣이 확실히 드러나면서 하늘이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아침 일찍 바다로 어로작업을 나가는 배들이 불을 밝히고 파도를 만들며 지나가는 게 보였다.

 

* 동트기 전에 고기 잡으러 바다로 나가는 어선

 

 

우리는 아침 일찍 삼덕항으로 가서 욕지도로 가는 카페리에 차를 실었다.

아침 8시 반에 욕지도로 떠나는 차량이나 승객이 그리 많지 않았다. 승용차와 소형트럭들을 1/3 정도 채운 가운데 배가 출항했다. 여름철 성수기에는 사람이고 차량이고 가득 가득 들어찰 것이다.

여기저기 펼쳐져 있는 가두리 양식장에서는 우럭과 고등어, 참치까지도 양식을 한다고 했다. 지난 여름엔 바닷물의 수온이 크게 오르는 바람에 수많은 양식 어류가 폐사하여 어민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 후진하여 카페리에 승선하는 차량
* 카페리의 앞쪽 선실은 온돌로 되어 있어 발을 뻗고 눕거나 일행이 많으면 빙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갈 수도 있다.
* 욕지도의 선창가

 

우리가 하선한 욕지도의 여객선 터미널에는 1인당 만원을 받고 한 시간 동안 욕지도의 명소를 일주하는 소형버스가 차 없는 관광객들을 맞고 있었다. 

우리는 일단 아침식사를 하러 뒷골목의 조그만 해녀촌식당을 찾아 갔다. 이곳은 1천 수백만의 구독자를 자랑하는 YouTuber 쯔양이 이곳에서 먹방을 하여 더 유명해졌다고 한다. 

우리는 쯔양이 먹은 메뉴는 엄두도 못내고 역전의 해병용사인 사장님이 추천하는 대로 해물탕라면과 전복죽, 성게알미역국 등을 시켜서 먹었다.

 

* 먹방 인플루언서 쯔양이 다녀간 흔적

 

다음 일정은 욕지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모노레일 상부 스테이션 전망대로 올라가는 일이었다.

좁은 산길을 차를 타고 올라가 천왕사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300여 m의 가파른 계단을 걸어서 올라갔다.

당초 이곳에는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2019년 말부터 운행을 시작했으나 2021년 11월 탑승객 8명이 크게 다치는 탈선사고가 일어나 무기한 휴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우리는 제천 비봉산과 평창 발왕산 애니포레에서도 모노레일을 타 보았다. 교통약자가 높은 전망대에 올라가서 좋은 경치를 구경할 수 있게 하는 이런 시설이 필요하다고 본다. 육지에서는 접근성이 좋은 곳이면 많은 관광객들이 이용할 수 있는 케이블카나 체어 리프트가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탈선 사고까지 발생한 마당에 시설을 안전점검하고 문제가 된 구간을 복구 수선하는 데 엄청난 비용이 들 것임에 틀림없다. 왕년에 등산철도를 포함해 스위스와 같은 이동형 관광시설을 프로젝트 금융(project financing) 방식으로 건설하는 것을 연구하였기에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 가파른 계단을 올라오면 오른쪽엔 통신기지, 왼쪽 능선 위로 전망대가 있다.

 

 

 

관광객 몇 명만이 찾아온 전망대 한쪽에는 욕지도가 배출한 저명한 언론인 김성우 기자의 수필 "돌아가는 배"에 나오는 한 구절을 새긴 명판이 서 있었다.

"섬은 작을수록 바다는 크다. 바다가 아무리 넓어도 섬이 바다의 중심이다." 

맞는 말씀이다. 그분 역시 이 섬을 떠나 세계로 진출하는 꿈을 꾸었고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한 후 한국일보 파리 특파원이 되어 유럽 각지로 다니며 현장 르포 기사를 많이 썼다. 젊었을 적에 내가 세계를 보는 창문(Window to Europe) 역할을 해주었던 저널리스트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이 섬 이름의 유래가 화엄경에 나오는 불법(佛法: 부처의 가르침)을 알고자 한다는 욕지(欲知)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여겨졌다. 각자 어디서 무슨 삶을 살든지 그가 서 있는 땅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겠는가!

 

* 대기봉 전망대가 그리 높지는 않지만 계단이 연속되어 있어 노약자에게는 힘든 코스이다.

 

전망대에서 내려온 우리는 욕지도의 명소인 출렁다리를 몇 개 찾아다녔다.

그리고 이 섬의 특산물인 고구마(고메)로 만든 뜨거운 음료와 고메 빵을 사 먹었다.

섬을 빙 돌아서 여객선 부두 가까이에 있는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갔다. 장미화원과 잔디, 종려나무, 야자수가 늘어서 있는 별빛정원 카페에 들어가 유자차와 커피를 마시며 통영으로 가는 배 시간을 기다렸다.

 

* 욕지도 여러 곳의 출렁다리는 관광용으로 건설되었다.
* 잔잔한 바다의 윤슬 속에 바위섬이 지나가는 배처럼 보인다.
* 뭔가 전설이 서려 있을 법한 단애(斷崖) 절벽 등 가는 곳마다 경치가 수려했다.
^ 25년간 정성껏 가꾼 정원 안쪽에 카페를 차려놓고 왕년의 교장선생님이 정년 후의 소일거리를 만들었다.

 

4시 45분에 출항하는 카페리를 타자 마침 서쪽 수평선 위로 아름다운 낙조가 드리웠다.

갈매기 떼가 여객선의 승객들이 던져주는 과자를 받아 먹으려고 배 주변을 분주히 날아다녔다.

2024년을 마감하는 여행으로서 기가 막힌 타이밍에 아름다운 석양을 오랫동안 감상할 수 있었다. 

 

* 남해 섬 위로 지는 낙조와 우리 배를 배웅하는 갈매기 떼

 

통영에 다시 돌아온 우리는 이곳의 명물이라는 배말칼국수와 톳김밥을 먹으러 갔다.

배말은 바닷가 바위나 배 밑에 많이 붙어 사는 따개비의 종류인데 그 살코기를 갈아서 육수를 만들므로 바지락 칼국수보다 국물이 훨씬 진하고 맛있었다. 톳김밥은 해조류인 톳이 많이 들어간 건강식 김밥이었다.

 

 

비록 짧은 여정이었지만 통영과 욕지도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재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는 좋은 경치를 보는 즐거움이었다.

이번에 제일 인상적인 장면은 해돋이 직전의 한려수도의 풍경이었다.

그리고 통영 케이블카 미륵산 전망대, 욕지도 대기봉 모노레일 전망대에서 바라본 한려수도는 이탈리아 카프리섬의 바다 풍경 못지 않았다.

둘째는 이색적인 향토음식을 먹는 재미였다.

삼합구이와 굴밥, 배말칼국수, 톳김밥, 쯔양 해물탕라면 등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셋째는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깨닫는 재미였다.

한산도 앞 바다에 와서 보니 이순신 장군은 무과에 급제했어도 함경도에서 오랑캐를 무찌르던 육전(陸戰)에 능한 장수였다.

그런데 조선 수군이 함선이나 병사나 숫적으로 열세임에도 어떻게 일본의 수군을 철저히 궤멸시킬 수 있었는지 정말 놀라웠다. 과연 조국을 외침에서 구한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전공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많을 것을 예상하고 난중일기(亂中日記: 1592-1598)를 써서 남긴 점이었다.

어떻게 긴박한 전시상황임에도 직접 붓을 들어 그렇게 자세하게 군사작전과 용병술, 지휘관으로서의 심정을 써놓았다니! 직접 한산도에 와서 보니 범인(凡人)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더욱이 욕지도 산에 올랐을 때 무안 공항에서 제주항공 여객기가 추락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승무원 2명만 구조되고 179명의 승객과 승무원이 참변을 당했다는 소식에 아연 실색했다. 그들도 우리처럼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이용해 모처럼 관광 길에 나섰을 뿐인데 너무 안타깝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구나! 비록 '노잼' 데이일지라도 무탈한 일상을 사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P S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여행지 숙소의 가성비를 따지는 게 일상이 되었다. 에어비앤비의 효과가 아닌가 싶다.

이번 여행에서 이틀 밤 묵은 스탠포드 리조트의 오션뷰 객실은 가성비 면에서는 아주 좋았다.

우리가 예약한 룸은 큰 방 2개에 각각 더블베드와 싱글베드가 있고 거실과 주방도 널찍했다.

 

* 통영 스탠포드 리조트의 거실과 오션뷰 침실

 

그러나 콘도미니엄 타입이어서 냉장고, 세탁기까지 설치되어 있음에도 주방도구가 전무했고 무엇보다도 생활 동선과 편의성을 고려하지 않은 가구배치는 '빵점' 수준이었다. 베드사이드에 USB나 휴대폰 충전단자는 커녕 전기 콘센트도 없고, 화장실도 단일 스위치여서 불을 켜면 팬 소음이 크게 나서 야간조명으로 쓸 수가 없었다. 쓸데 없는 서랍이 너무 많고 거실에 긴 소파를 놓은 것이나 발코니의 쇠창살 같은 난간도 눈에 거슬렸다.

사우나에서도 해수탕이 있음에도 수온이 19℃여서 너무 차가웠고, 앉아서 몸을 씻는 시설이 없었다. 또 호텔이 통영 국제음악당과 붙어 있고 또 해변 산책로가 있음에도  그에 대한 안내가 전혀 없는 것도 아쉬웠다.

이 점은 미국과 일본에서도 호텔업을 영위하고 있는 프랜차이즈 호텔로서는 너무 수준 미달이어서 지적을 하는 것이다.

 

* 중앙고속도로(춘천 방향) 단양팔경 휴게소의 남자 화장실

 

반면 귀로에 들른 단양팔경 휴게소에서는 아주 놀라운 경험을 했다.

우리나라 지하철 역이나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장실은 세계인들이 감탄할 정도로 잘 관리되고 있지만 이곳은 좀 달랐다.

변기와 세면대 앞에 빈센트 반고흐의 작품이 복제 그림이 아닌, 시원한 느낌의 디지털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청결하고 쾌적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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