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에는 미술관이 정말 많다.
우선 국립근대미술관과 교세라 미술관을 꼽을 수 있는데, 시 외곽까지 확장하면 미호 미술관과 비와호 근방의 사가와 미술관이 있다.
오늘의 일정을 챙기며 느긋하게 일어나니 커텐을 친 창밖이 환하게 밝아왔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한국의 정치 상황이 궁금하기 짝이 없었지만 해외에 나와 있느니만큼 무관심하려 애쓰자 마음이 편해졌다.
호텔 조식을 먹으러 3층으로 내려갔다.
마침 오늘 생신을 맞은 서 회장 내외분과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종업원이 갖다준 메뉴판을 보면서 내가 말했다. "여섯 가지 메뉴 중에 하나가 빠졌네요."
다들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길래 한 마디 했다. "미역국이요."
이번 여행에서 눈 호강(단풍 풍경과 미술작품, 건축물 감상), 입 호강(맛있는 일본 음식 먹기)을 하고 있지만 유머 감각이 뛰어난 서 회장님과 동행하면서 시시때때로 웃음보가 터지니 귀 호강까지 하는 중이었다. 엊저녁에도 일행 중 누구가 말을 잘 안 듣는다고 하자 서 회장님이 "겨울 빨래구만. . ." 하셨다. '못 말려'가 잘 마르지 않는 겨울 빨래가 되어버렸으니 '빵'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이런 유머 감각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예전에 학술 세미나 사회를 볼 때에도 조크 한 마디에 긴장된 분위기가 풀어지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한 바 있다.
아니나 다를까 교토 디자인 투어 단톡방의 공지사항으로 서 회장 생신임을 안 일행들이 우리 자리로 와서 "Happy Birthday"를 노래했다. 결국 서 회장은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오늘이 양력 생일인 것은 맞지만 집에서는 음력 생일을 쇠므로 이미 지났다고 해명하여야 했다. 그런데 부친의 출생신고가 늦어지는 바람에 당신의 주민등록 생일은 또 다르다고 하여, 그것도 과태료를 물지 않는 마지막 날이려고 하여, 우리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좌중을 압도하는 서 회장님의 유머에 뒤질 새라 부인을 동반하고 오신 K 변호사님도 만찬석상에서 한 유머하셨다.
은퇴 후에 추가학력을 따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고 진지하게 말씀하시는 바람에 우리 모두 귀를 쫑긋했다.
K 변호사가 하바드 과정에 적을 두고 하노이와 사이공 과정도 수료했다고 하셔서 우리는 미국에서 경제학과 법학을 공부하셨고 그 동안 국제 변호사로 활동하신 것을 알기에 무슨 일인가 의아했던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는 하와이와 동경 코스를 오갈 듯하다고 하셔서 우리 모두 눈치를 챘다.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65세 이상의 어르신을 지공거사라 하는 식으로 머리 글자를 따서 만든 조크였다. 하노이(하루 놀고 이틀 쉬고), 사이공(사이사이 공치러 다니고)은 우스개 소리였다. 하와이 코스는 하루 종일 와이프 따라다니다 눈총 받는 것이고, 동경 코스는 동네 경로당(친지사무실)에 가는 것이니 현실적인 대안인 셈이었다. 끝으로 방콕(방에서 콕 두문불출)이나 예일(옛일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 과정은 피하는 게 좋겠다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우리 일행이 탄 버스는 교토 시내를 남북으로 흐르는 가모가와 강변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지금은 노랗고 붉게 단풍이 들었지만 봄에 벚꽃이 만발하면 아주 볼 만할 것 같았다.
우리가 찾아가는 엔코지는 교토의 동쪽 교외의 예전 귀족들의 주거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는 엔코지(圓光寺)의 아름답다는 액자 정원을 보기 위해 찾아왔는데 입구에 느닷없이 전몰자 위령탑이 서 있었다.
엔코지는 1601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설립한 사찰로 그 당시 서적을 인쇄할 때 쓰던 목판이 경내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도 엔코지는 승려와 평신도들의 연수도량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입구의 간판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어제 겐닌지에서 보았던 일본 불교 사찰의 현실이 이곳에서도 실감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숭신억불 정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는 것만으론 부족하고 전몰자 위령탑이라도 크게 만들어 생존을 모색해야 했던 것이다.
사찰 경내의 바윗돌과 잔돌 왕모래 위에 그려진 도형이 처절하게 보이는 것은 나 혼자만의 과민반응이었을까?
아마도 엔코지 주지 스님은 이곳을 사람뿐만 아니라 반려동물을 장사지내기 좋은 곳이라 알리고 싶은 듯했다.
실제로 일본인들은 절에서 장례식을 많이 하고, 대부분 대처승인 일본 스님들은 장례지도사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죽은 이를 추념하러 왔다가 아름다운 정원과 경치를 바라보며 지난 날을 회고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엔코지는 산 사람에게도 명소(名所)임에는 틀림없었다.
아름다운 정원과 배경으로 더할 나위 없는 경치에다 멀리 교토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를 아우르고 있으니 말이다.
이 날도 아주 화려한 기모노를 입은 일본 미인이 들어와 주위를 화사하게 만들었다.
엔코지에서 일본 불교 사찰의 민낯을 본 것 같았다.
그것은 부처님은 되도록 다운사이징하고 그 자리에 정원의 신비한 도형, 쌍용(双龍) 꽃나무 그림 등을 만들어 놓아 사람들이 자주 화제에 올리고 찾아오게 만드는 전략이었다.
마냥 아름답다고 할 수만은 없는, 과거의 영광스러운 추억을 안고 사는 노인을 보는 것 같다고 할까?!
창밖으로 펼쳐지는 가을 경치를 바라보며 가니 자연히 기분이 전환되었다.
우리 일행이 탄 버스는 12시 조금 못 되어 도로변의 음식점에 당도했다.
입간판에 맛있는 '오미에 쌀을 밥솥에 지은'(釜炊近江米) 긴다와라(銀俵) 음식점 Take out OK라고 쓰여 있었다. 주된 메뉴는 임연수 구이와 닭고기였다. 쌀도 좋고 물도 좋아 그런지 생각보다 맛 있었다. 경기도 이천 국도변의 밥집 같았다.
이곳 시가라키(信樂) 지방은 물이 좋아 양질의 도자기를 많이 생산한다고 하여 길 건너편의 도자기 판매점에서 도자기 화병을 하나 샀다. 이 지역 특산물은 관을 쓴 도자기 너구리라고 한다. 장식품은 물론 쓰레기통으로도 만들어져 있었다.
이윽고 우리가 탄 버스는 미호 박물관에 도착했다.
가이드 말이 숲속에 감춰진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고 했는데 버스에서 내린 우리 앞에 큰 터널이 떡 버티고 있었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이야기 처럼 어느 어부가 굴 속으로 들어가보니 복사꽃이 활짝 피어 있는 별천지가 나타나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미호 박물관은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밋을 설계한 I.M. 페이가 샹그리라를 상상하게끔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터널 입구에는 수양버들처럼 가지가 쳐지는 벚나무가 심어져 있다니 봄철에는 무릉도원 못지 않은 장관을 보여줄 것 같았다.
그레이 톤의 금속으로 내부벽을 마감한 터널을 지나자 현수교 다리가 나오고 그 건너편에는 기하학적인 단순미의 일본식 가옥이 나타났다.
미호 박물관 프로젝트는 산속에 길을 내고 새로 터널을 뚫어야 했으며 계곡에는 다리를 놓아야 하는 난공사였다.
이러한 장소에 만인의 칭송을 받는 건물과 교량, 터널을 건설했으니 I. M. 페이(Ieoh Ming Pei, 중국명 貝聿銘, 1917-2019) 야 말로 진정 위대한 건축가라 부를 만하다. I.M. 페이에게 이 프로젝트를 맡긴 건축주도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신지슈메이카이(神慈秀明会)라고 하는 30여만 명의 신도를 거느린 종교단체인데 위대한 예술작품의 보존에도 힘을 쏟고 있다 한다.
문득 2007년 UCLA 로스쿨에서 연구년을 보낼 때 폴 게티 센터(말리부에 있는 게티 빌라에서는 고대 그리스ㆍ로마의 미술품을 상설 전시)를 종종 찾아갔던 기억이 났다. 석유왕 폴 게티의 막대한 유산으로 설립된 게티 재단은 로스안젤레스 근교의 산속에 공사를 벌여 그의 컬렉션 예술품을 전시하고 있는 미술관이다.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어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모노레일을 타고 미술관으로 올라가야 한다. 미술관 부지는 그런 대로 널찍하고 그 아래 입체적인 정원과 함께 멀리 LA 도심이 바라다보이는 명소가 되었다.
역시 교주가 수집한 고대 이집트와 중국, 서남아시아의 컬렉션을 상시 전시하고 있으며, 현재는 일본의 식(食)문화에 관한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고대 아라비아에 존재하였던 믈레이하(Mleiha, 현재의 UAE에 속한 오아시스 마을)의 유물도 전시되어 있었다. 2024년 초 모래폭풍이 불면서 모래 밑에 묻혀 있던 고대도시의 유물이 드러났다고 한다.
지하 전시실까지 모두 돌아보고 나서 전시된 작품의 퀄리티도 중요하지만 소장품들이 어떤 건물 속에 자리잡고 있느냐가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여겨졌다.
마침 미호 미술관에서는 일본의 食문화에 관한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일본인의 도자기에 관한 사랑은 임진왜란 때 시작되었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흔한 막사발을 전리품으로 챙겨갔는데 이것을 접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감탄해마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의 도공을 잡아오라고 명하여 전라도의 도공들이 대거 포로로 잡혀갔다.
조선의 도기는 매우 단순하고 거칠게 완성된 것이었음에도 일본인의 와비사비 전통에 부합하여 크게 인기를 끌었고 다도(茶道)에 많이 사용되었다. 일본에 끌려간 심수관을 비롯한 도공들은 현지에서 도자기 만들기에 적합한 고령토 산지를 발견하고 도자기 산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일본의 도자기가 화란 상인들을 통해 유럽으로 대량 수출되었다. 그때 완충재 포장재로 쓰였던 일본의 우키요에 판화 그림이 반 고호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일화를 남겼다.
미호 미술관의 감동을 간직한 채 그 다음 방문지인 사가와 아트뮤지엄(佐川美術館)으로 향했다.
이곳은 사가와 다큐빙회사가 1998년 창업 40주년 기념사업으로 비와코 호수를 바라보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 물의 정원을 만들고 단순미의 소박해 보이는 건물을 지은 것이다.
예약제로 하루에 소수의 인원만 받고 있으며. 일본화 화가 히라야마 아쿠오, 조각가 사토주료, 도예가 라쿠 기치자에몬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우리가 갔을 때에는 북유럽의 미술작품 기획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비파 모습을 한 내륙 호수 비와 호를 건너가서 온천 료칸에 여장을 풀었다.
료칸 치고는 호텔식 고층 건물 구조인 유모토칸(湯元館)은 5층과 8층, 11층에 온천탕과 노천탕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매일 남탕과 여탕을 바꿔가며 운영하므로 반드시 확인을 하고 탕에 들어가라는 주의의 말을 들었다.
우리 일행은 유카타를 입고 전원 한 테이블에 앉아 이번 여행의 마지막 가이세키 만찬을 즐겼다.
P S.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이오밍 페이(Ieoh Ming Pei, 중국명 貝聿銘, 1917-2019)가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 공모작으로 그가 제안한 유리 피라미드가 선정되었다. 결과가 공개되자 처음엔 시민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았으나 미테랑 대통령과 자크 시락 파리 시장이 그를 지지하여 1988년에 완공되었다. 일반에게는 1989년 3월부터 공개되었다. 지금은 루브르 궁전과 아주 잘 어울리는 현대적 건축물로 칭송을 받고 있다.
댄 브라운의 소설 Da Vinci Code (2003)에 의하면 유리 피라미드 아래에는 거꾸로 피라미드(Inverted Pyramid)가 달려 있으며 그리스도와 관련된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한다. 다빈치코드에서는 여주인공 소피가 외할아버지가 행하는 밀교 의식을 보고 충격을 받아 가출을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톰 크루즈 주연의 Eyes Wide Shut에도 나온다. 톰 크루즈가 가면을 쓰고 롱아일런드 맨션에서 열리는 의식에 참여하지만 곧 非회원인 것으로 밝혀져 곤경에 처한다. 이게 바로 Freemason 회원들의 Hieros gamos 의식이었던 것이다.
프리메이슨은 본래 십자군전쟁에 참여한 템플기사단에서 유래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 어디엔가 숨겨져 있다는 언약궤를 찾는데 신명을 바쳤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 돌판을 보관하였던 언약궤가 성전 지성소에 안치되었다가 성전이 이교도에 의해 더럽혀지면서 언제부터인가 사라져버렸는데 이것을 찾으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템플 기사단이 프랑스왕과 교황의 틴압을 받고 해체된 후에도 남은 단원들이 다른 나라로 옮겨가서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장미십자회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프리메이슨은 미국의 독립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벤자민 프랭클린, 조지 워싱턴 등 신대륙의 건국지도자들이 대부분 그 단원이었으며, 프랑스 회원인 라파예트 장군은 자비로 프랑스 장병을 3척의 군함에 태우고 가서 조지 워싱턴의 시민군을 도왔다. 그리하혀 프리메이슨의 'All Seeing Eye' 심볼이 미 국장의 하나로 채택되었으며 1달러 지폐의 뒷면에 인쇄되어 있다.
현재 프리메이슨은 각국에서 친목 사교단체임을 표방하고 있으나 그들의 폐쇄적인 비밀결사 조직과 막강한 영향력으로 인해 '그림자 정부(Shadow Government)'라고도 불리며, 각종 음모설(Conspiracy theory)의 중심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 교토 사찰의 아름다움
⇒ 오사카의 미술관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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