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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Day] 세계사의 탄생

Onepark 2024. 12. 13. 10:00

G : 2024년 마지막 달에 소개해 주실 책은 무엇인가요? 시국도 혼란스럽고 누군가 속시원히 우리를 신명나게 할 수 있는 걸 제시해주면 좋겠어요.

P : 네, 은퇴한 저도 동감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읽었던 책 중에서 바로 말씀하신 길을 제시한 위대한 인물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꽉 막혀 있는 국내 현실에 얽메이지 말고 시야를 크게 널리 가지면 뭔가 해결방안이 떠오를 수 있거든요.

 

 

G : 보여주신 책의 원서 표지를 보건대 몽골 기병대가 진격하는 장면이네요. 그럼 이 책은 몽골 제국의 칭기즈 칸이 세계사를 탄생시켰다는 내용인가요?

P : 네, 일본의 동양사학자인 오카다 히데히로(岡田英弘 1931-2017) 교수의 책을 이진복 교수가 번역한 「세계사의 탄생」(황금가지, 2002) 입니다. '몽골의 발전과 전통'이라는 부제를 붙였어요. 제1장에서는 칭기즈 칸이 나라를 세운 1206년, 즉 13세기 초에 동아시아와 유럽에서는 어느 민족이 무슨 나라를 세웠고 무슨 종교를 믿었으며 무엇을 이룩했는지 파노라마처럼 보여줍니다.

 

1206년 봄, 몽골 고원의 한쪽에서 유목민이 모여 칭기즈 칸을 자신들의 최고지도자로 선출했다는 사건은 태평양에서 대서양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의 나라에서는 거의 알지 못했고, 관심을 불 러일으킬 만한 사건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세계사에서 최대의 사건 중 하나였다. 이 사건은 세계사의 시작이었다.

칭기즈 칸의 즉위식에 즈음하여 그의 의형제인 대샤먼 쿠쿠 팀 탱그리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은 신탁이 내리고 있었다.

 

영원한 하늘의 명령이 있다. 천상에는 유일한 그리고 영원한 천(天) 의 신(神)이 있고, 지상에는 유일한 군주인 칭기즈 칸이 있다. 이것은 너희들에게 전하는 말이다. 내 명령을, 지상의 모든 지방과 모든 자에 게 말의 발자국이 이르고, 배가 이르고, 사자(使者)가 이르고, 편지가 이르는 한, 듣고 알게 하라. 내 명령을 듣고 알면서 따르지 않는 자는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게 되고, 손이 있어도 가질 수 없게 되고, 발이 있어도 걸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하늘의 명령이다.

 

이 신탁은 칭기즈 칸을 지상 전인류의 유일한 군주로 지명하고, 그의 신하가 되지 않는 자는 누구라도 하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로 간주하여 파멸시킨다는 취지다. 이 천명을 받은 칭기즈 칸과 그 자손에게 인솔되었던 몽골인들은 이제 신성한 사명 을 수행하기 위해 세계 정복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것이 세계사의 발단이 된 것이다.  26쪽.

 

G : 당시 칭기즈 칸의 부족은 몽골 안에서도 마이노리티였다는데 어떻게 부족을 통일하고 세계 각국으로 파죽지세로 진격해 나갔을까요?

P : 물론 칭기즈 칸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있었기에 가능했지요. 그의 뛰어난 리더십과 지략을 뒷받침하는 충성스럽고 용맹한 부하들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에 대적할 만한 군사강국이 없었다는 천운이 따랐습니다.

 

G :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에도 그러한 영웅이 없었던 건 아니잖아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없었으면 나라가 결단 났을 거예요. 글로벌 기업경영으로 확장해서 본다면 불모지나 다름 없던 한국의 전자산업, 조선업, 자동차산업, 해외건설업에서 월드 클래스 기업들이 나왔다는 건 놀라운 일이지요. '우리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게 헛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P : 바로 잘 지적하셨습니다. 오카다 교수는 역사를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여러 인간 부족이 활동한 기록이라고 하면서 인류사에 있어서 역사가 있는 문명(지중해 문명, 중국 문명)과 역사가 없는 문명(인도 문명, 마야 문명)을 구분하고 있어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외국의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역사의 교훈과 지혜를 오늘의 상황을 타개하는 데 적용하자는 겁니다. 

 

역사가 있는 문명과 역사가 없는 문명이 대립하면 항상 역사가 있는 문명이 유리하다. 그 이유는 분쟁이 일어나면 역사가 있는 문명은 "이 문제에는 이러저러한 유래가 있다고 그 경위부터 말하면서 자신들이 정당하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없 는 문명에는 그러한 주장에 반론할 수 있는 유효한 방법이 없다.

또 하나의 이유는 역사가 있는 문명에는 현재를 살아가는 것과 더불어 과거도 살아왔다는 것으로 항상 사물의 뿌리를 생각한다. 사물에 뿌리가 있다면 과거를 자신의 것으로 하기 때문에 현재를 보다 잘 알고 더욱이 미래의 예측도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틀린 시나리오를 세우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미래에 대해 무언가를 준비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역사가 없는 문명은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의 관련이 애매하기 때문에 예측을 세우기 어렵다. 줄거리 없이 일어나는 사건의 순서대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방침을 미리 정할 수 없고  항상 뒤로 돌아가는 결과가 된다.

군사력이 막강해서 상대 국가를 압도할 수 없는 한, 역사가 없는 문명은 항상 불리하다. 그런 의미에서 본래 역사가 없다고 해도 좋을 이슬람 문명도 지중해 세계에서 로마 제국과 대항할 필요성 때문에 역사라는 문화 요소를 채용했던 것이다.

역사는 강력한 무기다. 역사가 강력한 무기였기 때문에 역사가 있는 문명에 대항하는 역사가 없는 문명은 무언가 나름의 역사를 발명하여 역사라는 무기를 획득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역사라는 문화는 그 발상지인 지중해 문명과 중국 문명으로부터, 그밖의 원래 역사가 없던 문명에 의해 복사되고, 다음에서 다음으로 '전염'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래 역사가 없었던 문명은 역사 문화를 채용한다 해도 그 역사는 힘이 약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세계의 정세는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립,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 민족주의와 전체주의의 대립이 서로 엉켜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본질적인 대립은 아니다. 현대에서의 본질적인 대립은 역사가 있 는 문명과 역사가 없는 문명의 대립이다.  39-40쪽

 

G : 그러고 보니 여러 세계 일류기업을 일구고 기상천외한 발상을 하였던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가출한 후 서울에 올라와 쌀집 배달부 일을 할 때 통신강의록을 통해 「나폴레옹 전」 같은 역사물을 탐독했다고 들었어요. 그것이 현대건설의 세계 진출의 뿌리가 되었던 모양이네요.

P : 이 책은 세계사의 관점에서 서양과 동양(중국)의 역사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상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서양)역사의 아버지라고 하는 헤로도투스가 쓴 「히스토리아」(원래 '연구'라는 뜻)가 그리스 신화로 전승되어 오던 이야기를 인간의 역사로 둔갑시킨 것이라고 보았어요. 또 구약성서는 유대 민족의 편협한 역사를 여호와와의 언약이라는 관점에서 기록한 것이지만 요한 계시록에서는 조로아스터 교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를 핍박하던 로마제국을 선과 악의 대결구도로 보아 장래 전개될 역사를 서술한 것이라고 평가했어요. 중국의 역사서는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라는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실권은 군대를 거느린 장군들이 장악하고 있음에도 5경에 능통한 과거 출신 문신들이 사서의 기록을 맡아 정통성이나 따지고 있다고 비판하였습니다.  

 

G : 그렇다면 이 책의 저자는 동양과 서양의 교류는 어떻게 이루어졌다고 보았습니까?

P : 큰 활을 쓰는 동이(東夷) 유목 부족이 중국 내륙의 황하 중류 지역에 도시국가를 건설하여 황하 문명을 건설했어요. 서융(西戎) 출신의 진 왕국이 중원을 통일하면서 흉노족은 중앙유라시아 초원을 따라 서진했습니다. 진시황이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지요. 흉노족의 서양식 표기인 훈족이 동고트를 정복하고 흑해 북쪽의 초원을 지배하자 서고트인이 도나우 강을 건너 로마제국 영토로 피난을 가면서 게르만 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어요. 사마천이 묘사하는 흉노의 풍속은 천수백 년 후의 몽골인 그대로였으니, 바로 중앙유라시아의 유목민이었던 몽골족이 동양과 서양의 정복전쟁, 통상의 매개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카다 교수는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유목민인 몽골인이 어떻게 군사적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는지 쉽게 설명하고 있어요.

 

몽골 고원의 유목민이 통합되면 곧 정복 전쟁을 시작하는 데는 그 이유가 있다. 원래 유목이라는 생활 형태에서는 그다지 단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매년 강우량이 적어 풀의 성장이 어렵기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하면 가축이 풀을 모두 먹어버려 생활이 어렵게 된다. 그 때문에 봄에 어린 풀이 자랄 때부터 이동을 시작하여 가축에게 풀을 먹이면서 여름부터 가을까지 초원을 천천히 옮겨다니고 겨울이 되면 남향의 계곡에 들어가 추운 북풍을 피하는 것이다. . . .

유목 생활은 이러한 것이기 때문에 한 장소에 인구가 집중되면 들의 양이 부족해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충분한 수의 가축을 사육할 수 없다. 그 때문에 함께 유목하는 것은 기껏해야 몇 가족 정도다. 다시 말하면 유목민이 생활하기 위해서 커다란 조직과 사회의 통합은 필요하지 않다. 가축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독립 경영의 유목민은 자유로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 농경민이 공동 작업을 통해 곡식을 심는 것과 관개를 하기 위해 조직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유목민이 단결하는 계기는 농경민과의 교역이었다. 인간에게는 고기와 유제품뿐 아니라 칼로리원인 당분도 필요하다 그러나 건조한 몽골 고원은 농경에 적합하지 않아 곡물을 재배할 수 없다. 또 양잠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의류를 만드는데 필요한 견직물도 만들 수 없다. 그래서 유목 지대와 농경 지대의 경계에서 교역이 이루어진다. 이 경우 유목민이 교역 시장에 가지고 온 상품은 말이었다.

말은 전차(戰車)를 끌거나 기병을 태우기 때문에 군대에서 없어서는 안 되지만 화북의 평원에서는 사육되지 않아 번식할 수가 없다. 그 때문에 중국 이전의 도시국가나 통일 이후 중국에서도 말은 매년 몽골 고원에서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 식염도 화북의 평원에서는 구할 수 없지만 몽골 고원에는 염호가 많고 양질의 식염이 풍부하게 존재한다. 그 외에 모피와 양모, 피혁 제품 등도 몽골 고원의 특산품이기 때문에 유목민은 이러한 물건을 농경 지대에 수출하여 필요한 곡물이나 견직물 등과 바꾸었다.

이러한 교역이 평화적으로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한 유목민은 각각 가족 단위로 독립하여 자유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지만 일단, 중국에 강력한 통일 제국이 출현하면 그렇지 못하였다. 국경 무역은 중국 황제의 직할이어서 상품의 가격도 어느 시장에서나 같은 데다가 유목 지대의 생산물은 싸고 농경 지대의 생산물은 높게 통제되어 유목민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다. . . .  이러한 상황이 되면 유목민들이 서로 단결하고 중국에 대한 교섭이나 전쟁을 준비할 필요가 생긴다. 기원전 221년 진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직후, 몽골 고원에 최초로 흉노의 유목 제국에 출현했던 것은 중국에 대항할 필요에서 목특선우(冒頓單于)를 중심으로 유목민이 단결한 결과였다. 단지 유목 제국의 본질은 부족 연합이다. 이 연합의 중추가 되는 것은 선우의 군기 아래 모여든 사람으로 구성된 친위군이기 때문에, 이것이 그대로 선우의 궁정이 되고 유목 제국의 중앙 정부를 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우 주변에는 항상 대단히 많은 수의 사람이 모였고, 그들의 생활을 풍족하게 유지하기 위해 . . .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량의 곡물을 농경 지대로부터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군주들은 그들의 능력으로 외부로부터 조달한 재물을 기분 좋게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  . . 이것은 흉노의 선우로부터 몽골의 칸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았다. 백성에게 나누어줘야 할 재물을 손쉽게 획득하기 위해서는 중국을 군사력으로 위협하여 경제 원조를 받거나, 중국의 변경에 침입하여 약탈을 행해야 한다. 한(漢)과의 화친 관계가 성립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흉노 군이 기원전 166년부터 여러 번 한에 대규모의 침입을 반복했던 것은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흉노의 침입에 대해 한은 이렇다 할 방법이 없었다.  . . . 이는 유목민의 군대가 모두 기병이었기 때문에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었음에 비해 농경민 출신의 군대는 대다수가 보병이었기 때문에 진군이 늦어 쉽게 적을 잡을 수 없었다. 게다가 농경민 출신 군대의 주식은 곡물이기 때문에 초원 지대에서는 쉽게 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주력 부대의 진군로 요소마다 미리 보급 부대가 식량을 대량으로 운반하여 쌓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무방비의 수송 부대는 적의 가장 좋은 목표가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몽골 고원 에서의 전쟁은 병력이 적은 유목민이 농경민 출신의 중국 대군에 비해 항상 유리한 입장이었던 것이다.  122-126쪽

 

*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 마상에서 뒤로돌아 활을 쏘는 고난도의 파르티얀 샷을 구사하는 장면

 

G : 우리 민족은 한반도에서 농경생활을 해왔지만 본래 북방에서 온 기마민족이라고 하잖아요. 조선 왕조가 해금(海禁) 정책을 펴서 그렇지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많이 다니고 세계 어느곳에나 가서 정착하고 사는 걸 보면 그걸 실감하게 됩니다. 이러한 기질을 살려서 뭔가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P : 해외 진출한 우리 기업들의 성공 비결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일단 목표를 정하면 '빨리빨리' 정신으로 신속하게 의사 결정을 하고 거리의 원근을 불문하고 진격하는 거죠. 그리고 그곳에 터 잡고 뿌리를 내리는 것이 우리 민족의 DNA 속에 들어 있음에 틀림 없어요. 사우디 주베일 항만 건설 때 정주영 회장은 말도 안되는 가격에 수주했지만 철구조물을 모두 울산에서 조립 제작해서 바지선에 실어나름으로써 채산도 맞추고 중동 건설, 해양구조물 설치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그 당시 공사비가 국내 유입되자 통화관리에 비상이 걸렸다는데 우리나라가 오일 쇼크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지요.

 

G : 몽골 역사에서 서양의 종교 특히 기독교는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P : 본래 몽골인은 샤머니즘을 믿었고 티벳에서 전래된 불교 라마교의 교세도 강했습니다. 외몽골 케레이트 왕이 사냥에 나섰다가 눈길을 헤맬 때 천사의 도움으로 살았다고 하죠. 그와의 약속에 따라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었다고 해요.

 

케레이트 인들이 1007년 기독교(네스토리우스파) 세례를 받기 시작하면서 서방으로부터 기독교 상인들이 초원의 길을 통해 외몽골로 들어오게 되었다. 상인들이 전해온 기독교의 신앙은 외몽골 케레이트 부족만이 아니라 내몽골 옹구트 부족에게도 퍼졌다. 이 두 유목 부족은 그로부터 200년 이상 몽골 고원에서 기독교 왕국으로 번영했다. 13세기의 몽골 시대에도 칭기즈 칸은 처음에 케레이왕 완칸을 섬겼고,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의 어머니도 완칸의 조카로 기독교인이었다. . . . 몽골인은 하늘이 칭기즈 칸에게 세계 정복의 신성한 사명을 주었다고 믿었다. 하늘에 대한 몽골인의 관념에 기독교의 영향이 있었는가는 대단히 흥미 있는 문제다.

서방의 기독교도 상인이 가지고 들어온 것은 신앙만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문자가 있었다. 경전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종교가 퍼지자 이와 함께 문자의 사용도 확산되는 것이었다. 네스토리우스파(경교/景敎) 기독교회의 공용어는 아람어로, 경전은 아람문자의 알파벳을 사용했다. 기독교가 중앙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 사이에서 퍼짐에 따라 아람 문자도 퍼지고 . . . 이것이 투르크어에 응용되어 위구르 문자가 되고, 위구르 문자가 1204년 칭기즈 칸에 의해 몽골어에 채용되었다. 그리고 몽골 문자는 1599년 청 태조 누루하치에 의해 만주 문자가 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1007년 케레이트 왕의 기독교로의 개종은 알파벳의 보급이라는 점에서 중앙유라시아 문명에 큰 영향을 남겼던 것이다. 164-166쪽

 

G : 그렇다면 칭기즈 칸이 세운 몽골 제국이 세계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말씀해주실 차례입니다.

P : 이 책은 중앙유라시아 초원지대의 유목민이던 몽골족이 어떻게 세계사에 영향을 끼쳤는지 다루고 있는데 1206년 이전에는 흉노족, 훈족 등으로 불리면서 그들로부터 피해를 입은 쪽에서 쓴 역사가  전부였어요. 오카다 교수는 이 점을 소상히 파헤쳤지요. 그러나 그들이 문자를 쓰게 되면서 칭기즈 칸이 제국을 건설한 1206년을 기점으로 역사를 가진 민족이 되어 세계를 제패했다고 보았습니다. 저자는 군사정복의 관점에서 몽골 제국의 발전을 다음 몇 단계로 나누었어요.

 

제1단계는 서하 왕국의 정복이다. 칭기즈 칸이 즉위하기 전인 1205년부터 몽골군은 서하에 침입을 시작하여 1227년에 멸망시켰다.

제2단계는 천산 위구르 왕국의 투항이다. 위구르 왕국은 카라키타이의 보호국이었지만 1209년 카라키타이를 배반하고 칭기즈 칸 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제3단계는 금(金) 제국의 정복이다. 칭기즈 칸은 1210년 금과 단교하고 다음 해부터 금 제국 영역의 내몽골과 화북에 침입하였으며, 칭기즈 칸의 후계자 우구데이 칸은 1234년에 이르러 완전히 금 제국을 멸망시켰다.

제4단계는 카라키타이 제국의 정복이다. 전사했던 나이만의 왕 타양 칸의 아들 쿠출룩은 카라키타이로 망명하여 최후의 카라키타이 황제의 보호를 받았지만 1211년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이리하여 카라키타이 제국은 야율대석이 건국한지 87년 만에 멸망했다. 칭기즈 칸은 1218년 몽골군을 보내 구출룩을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몽골 제국의 최전선은 서방으로 카자흐스탄 동부까지 진출했다.

 

제5단계는 카라키타이 영토의 서쪽에 접하는 이슬람 세계의 정복이다. 7세기부터 한 손엔 칼, 다른 손엔 코란을 들고 서아시아를 정복한 이슬람 세력은 8세기에서 9세기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 칼리프 아래에서 가장 번영했다. 이 시대부터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이 노예로 이슬람 세계에 수입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용감하고 충실한 군인으로서 중요시되어 군사령관과 지방장관의 지위까지 오르는 자도 있었다. 11세기 카자흐스탄 초원에서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투르크멘인의 셀주크 왕조가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서투르키스탄과 이란 고원을 정복했다. 1055년 셀주크 왕조의 토그릴 베그는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로부터 '술탄(권력자)'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셀주크 제국은 한때 서아시아 전체를 지배했으나 점점 작은 지방 왕가로 나누어져 세력이 약해졌다. 셀주크 왕조의 영토 동쪽 절반을 이어받은 이슬람 호레즘 왕조는 셀주크 왕조 술탄의 투르크인 노예가 호레즘의 군사령관에 임명되어 세력을 구축한 것이다. 칭기즈 칸은 1219년 전군을 지휘하여 시르다리아 강을 건너 7년 만에 호레즘 제국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북인도 평원에 이르렀다. 이 원정에 종군했던 몽골인 대다수는 서투르키스탄의 정복지에 주둔하고 정복 사업에 종사했다.

 

제6단계는 킵차크 초원의 정복이다. 칭기즈 칸의 장남 조치는 아버지로부터 카자흐스탄을 하사받았다. 우구데이 칸은 1234년 조치의 차남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하고, 각 황족가에서 선발된 부대로 편성된 대군을 이끌고 우랄 강 서쪽 제국을 정복하러 갔다. 바투의 몽골군은 1236년에 볼가 강 중류의 불가르인의 나라를 정복하면서부터 점점 킵차크인의 제 부족, 루시의 도시, 북코카서스의 종족을 정복하고 폴란드 왕국에 쳐들어가, 1241년 레그니차에서 폴란드군과 독일 기사단의 연합군을 분쇄했다. 이어 헝가리 왕국을 유린하고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노이슈타트까지 도달했다. 또한 남쪽으로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 해안까지 진출했다. 그런데 1241년 12월 우구데이 칸이 죽자 몽골의 원정군온 동경 16도선에서 돌연 진군을 중지하고 귀환했다. 몽골에서 왕위 계승문제가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몽골의 유럽 작전은 끝났고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았다. 원정군 총사령관인 바투는 볼가 강가에 유목하며 북코카서스 우크라이나, 루시를 지배했고, 그의 궁정은 '황금의 오르도'라 불렸다. 볼가 강 동쪽 초원에는 바투의 큰형 오르다와 그의 동생들이 유목했다. 현재 타타르 공화 국의 타타르인, 카자흐 공화국의 카자흐인, 우즈베크 공화국의 우즈베크인은 모두 이 조치 왕가의 칸들과 함께 이주했던 몽골인들의 후예이다.

 

제7단계는 서아시아의 정복이다. 칭기즈 칸의 손자 몽케 칸은 1253년, 동생 홀라구를 서아시아 원정에 파견했다. 홀라구는 1253년 바그다드를 공략하여 최후의 칼리프를 처형하고 압바스 왕조를 멸망시켰다. 이어서 몽골군은 이집트 정복을 겨냥하여 시리아에 침입했다. 당시 시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이집트 아이유브 왕가의 정권을 탈취한 투르크인 노예 용병이 세운 맘루크 왕조였다. 몽골군은 1260년 팔레스티나의 아인 잘루트(이스라엘의 티베리아스 근방)에서 술탄 쿠투즈의 맘루크군 복병을 만나 대패했다. 이후에도 몽골군은 여러 번 시리아와 이집트 정복을 시도했지만 결국 성공할 수 없었다. 훌라구는 '일 칸'이라고 자칭하고 타브리즈를 중심으로 남아제르바이잔에 본거지를 두고 서투르키스탄과 아나톨리아 고원, 코카서스 산맥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다.

 

제8단계는 화중과 화남의 정복이다. 남송에 대한 작전은 우구데이 칸 이래 여러 번 시도되었고, 1276년 최후로 쿠빌라이 칸을 파견했던 몽골군이 항주를 점령하고 남송을 멸망시켰다. 이로써 중국인 황제의 '정통'은 다시 단절되고 중국은 유목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투르크, 위구르, 키타이, 금으로 성장해 온 또다른 '정통'이 승리하여 중국을 병합해 버린 것이다.
그외에 동아시아에서 쿠빌라이 칸은 1253년에 운남 타이인의 대리국을 정복하고 1259년에는 고려의 항복을 받았다. 티베트에서는 1260년 쿠빌라이 칸이 자신을 섬기는 불교 사카파 교단의 교주 팍파를 티베트 통치의 대리인으로 임명하고 팍파 일족의 곤씨에게 통치의 실무를 담당하게 했다.

이리하여 동쪽은 동해, 동지나해로부터 서쪽은 흑해, 유프라테스 강,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동아시아, 북아시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동유럽 대륙의 거의 전 지역이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인류가 시작한 이래 최대의 제국이었다.  186-192쪽에서 부분적으로 발췌

 

 

위의 연주곡은 1880년 러시아 알렉산더 2세의 즉위 2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과학자이기도 했던, 러시아 5인조 작곡가 알렉산더 보로딘이 만든 곡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G : 지난 1천년 간 세계를 움직인 가장 위대한 인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칭기즈 칸을 꼽는 데 주저함이 없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P : 저자는 이 책에서 과거 몽골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들이 지배계급은 물론 그 시스템까지 몽골의 영향을 받았으며, 인도인, 이란인, 중국인, 러시아인, 튀르키예의 터어키인 국민을 '창출'했다고 말합니다. 과거 로마 제국,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 이상 가는 영향을 주었던 겁니다. 심지어 청나라는 몽골 제국을 부흥시켰고, 러시아는 몽골 제국을 계승했다고까지 표현합니다.

 

몽골 제국이 일직선으로 팽창을 계속한 이유는 흉노 제국 이래 유목 왕권의 성격에 있었다.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군주는 유목민 전사들에게 끊임없이 약탈의 기회를 주거나, 재물을 하사하여 그 지지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독립성이 강한 신하들은 즉시 다른 군주에게 옮겨가 버리기 때문에, 군주로서는 끊임없는 정복 전쟁으로 신하를 만족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몽골 제국의 내부에는 다수의 유목 군주가 관할하는 영지가 병립되어 있고, 이것을 '울루스'라 하였다. 하나의 울루스는 그지역의 유목민 집단과 가축 그리고 정주민으로부터 재물과 노동력을 징발하는 특권으로 성립되고 있었다. 최대의 울루스는 4개가 있었다. 동아시아에는 쿠빌라이 왕가의 '대원국',즉 원 왕조가 있고, 중앙아시아에는 차가타이 왕가의 '차가타이 한국'이 있고, 서아시아에는 홀라구 왕가의 '일 한국'이 있고 그리고 동유럽에는 조치 왕가의 '킵차크 한국'이 있었다. 이들은 최대의 울루스이고 이외에도 울루스는 많이 있었다. 흔히 '몽골 제국은 네 개의 국으로 분열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몽골 제국에는 창립자 칭기즈 칸 시대 이래 이미 수많은 울루스가 있었고, 칸이라고 해도 지배권이 직접 미치는 것은 자신의 직할 울루스뿐이고 그외의 울루스 내정에 개입할 권리는 없었다.

 

이처럼 잡다한 몽골인의 울루스로 이루어진 몽골 제국을 통합하고 있었던 것은 위대한 칭기즈 칸의 인격에 대한 존경과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세계 정복의 신성한 사명에 대한 신앙이었다. 칭기즈 칸이 곧 몽골 제국이고, 몽골 제국이 칭기즈 칸이었던 것이다. 곧 몽골 제국 전지역을 통해 '칭기즈 통치 원리'라 불리는 것이 견고하게 신봉되고 칭기즈 칸의 피를 아버지쪽에서 승계한 남자만이 킨의 칭호를 쓸 자격이 생기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몽골 이전부터 유목민의 부족명과 씨족명은 모두 소멸하고, 몽골의 씨족으로 바뀌었다. 즉 중앙유라시아의 유목민은 거의 모두가 몽골인의 사회 조직에 편입되어 몽골인이 되었던 것이다. 예외는 키르기스인과 투르크멘인뿐이었다. 무엇보다 알타이 산맥 서쪽의 몽골인은 14세기에 들어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투르크어를 사용하게 되었지만 의식은 어디까지나 몽골인이기 때문에 투르크인이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192-193쪽

 

P : 놀랍게도 오카다 교수의 혜안은 몽골 제국의 시스템이 자본주의 경제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본주의' 하면 중세의 중상주의에서 싹이 터서 서구의 산업혁명을 통해 발전했고 프로테스탄티즘으로 뒷받침되었다고 알고 있었거든요. 나아가 중앙유라시아 초원의 길 양쪽 끝에 있던 러시아인과 중국인은 초원 유목민의 침입과 지배를 받아왔기에 이들은 아나키적인 성격이 짙고 강권으로 억압하지 않으면 질서를 지키기 어렵다는 몽골 제국 지배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또 몽골 제국이 대륙 제국이었던 만큼 대항해 시대 이후 서유럽의 해양 국가의 경제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고 했어요.

 

몽골 제국은 많은 울루스로 성립되었지만 칭기즈 칸이 받은 천명을 믿고, 칭기즈 칸의 「야사」 법전을 지키고, 칭기즈 칸의 남계 자손을 칸으로 받들고 있는 점은 같았다. 그리고 몽골 제국의 문명은 키타이 제국 이래 유목형의 정치와 정착형의 경제를 결합한 시스템이었다. 몽골의 대정복 결과 유라시아 대륙의 구석까지 치안과 교통의 편리가 이루어지고 동일한 문명의 시스템이 널리 보급되어 여러 지역을 연결하는 경제 활동이 활발해졌다. 金 제국 영역의 화북에서 이미 성립되고 있던 신용 거래의 원리와 자본주의 경제의 맹아도 이 정세에 따라 몽골 세계 전체로 넓혀지고, 그밖에 있는 서유럽에도 강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지중해 세계에서는 몽골 제국의 출현과 동일한 시기인 13세기에 흑해와 동지중해 무역권을 장악하고 있던 베네치아에 유럽에서 최초로 은행이 세워지고 있었다. 이 베네치아로부터 알프스를 넘어 자본주의적인 경제 형태가 서유럽으로 퍼졌던 것이다. 이것은 몽골 제국의 성립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세계 최초의 지폐를 발행하여 성공한 것도 몽골인이다. 원 제국의 쿠빌라이 칸은 원거리 무역이 성행하자 결제의 편리를 위 해 1275년 세계 최초의 불환 지폐를 발행했다. 이것이 원 제국 유일의 법정 통화로 지폐 외에는 금화나 은화, 동화도 없었다. 이 몽골 지폐의 신용은 높았고, 유통은 순조롭게 이루어졌으며 가치 는 안정되어 인플레이션의 정도도 커지지 않았다. 그러나 1351년 홍건의 난이 일어나면서 폭발적인 악성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지폐의 신용이 실추하기 시작했다. 원 제국에게서 중국을 빼앗았던 명 제국은 원 제국을 모방하여 불환 지폐를 발행했으나 중국인의 명 제국에 대한 신용은 몽골인의 원 제국에 미치지 못하여 그 지폐는 완전히 유통되지 않았고 중국의 경제는 침체했다. 명 제국의 중국 경제가 호황을 누리게 된 것은 은이 대량으로 중국에 유입되고 세공되지 않은 은이 결제에 사용되기 시작하면서이다. 이 통화 제도에서 보아도 현대 세계가 몽골 제국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211-214쪽

 

G : 지금까지 말씀해주신 것만 보아도 우리의 역사관이 헤로도투스나 구약성서, 사마천의 역사서에 치우친 감이 있네요. 우리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조선왕조실록 같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역사서가 있는 만큼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6.25의 잿더미에서 일어나 압축성장을 달성하고 민주화를 이룩한 경험, 특히 K한류, K방산 등의 성공사례를 분석한 역사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