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를 강원도에서 보냈다.
눈에 닾인 오대산 월정사(月精寺)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금강교 아래 소란스러운 속세(俗世)처럼 소리를 내며 흐르던 오대천(五臺川)은 눈 덮인 얼음장 밑으로 조용히 흘렀다.
오히려 흰눈 쌓인 주변 풍경과 함께 한폭의 수묵화를 보는 것 같았다.
천왕문을 지나 사찰 경내로 들어섰다.
얼마 전까지 검은 천으로 가리고 보수공사를 벌이던 적광전 앞의 팔각 구층석탑과 보살석상이 화려한 자태를 드러냈다.
석탑은 꼭대기 첨탑과 층마다 금빛 장식을 붙여놓아 사찰 경내를 밝게 비추는 듯 했다.
그 맞은 편에도새로 지은 요사채가 조만간 단청 칠을 앞두고 있었다.
팔각 구층석탑(八角九層石塔)은 고려시대의 다층석탑으로 국보 제4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석탑을 향해 무릎을 끓고 다소곳이 경배하는 모습의 석조 보살좌상(石造菩薩坐像)은 보물 제139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잎도 꽃도 다 진 나목(裸木) 가지마다 소원을 적은 형형색색의 색종이가 걸려 있었다.
이곳 오대산에서 화엄경과 씨름하며 불도를 닦으셨던 탄허(呑虛) 스님이 이것을 보신다면 "중생을 제도할 고즈넉한 절집에 이 무슨 방정이냐!" 하고 꾸짖으실 것 같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화엄경 앞에 놓고
탄허 스님 말씀하시길
선재동자와 같은 깨달음은
오색 종이에 써서 바치는 게 아니라
힘써 마음밭을 갈아서
얻는 것임이라
아닌게 아니라 모 일간지에서 명사들이 소장하고 있는 가치가 있는 소장품을 "나의 현대사 보물" 시리즈로 장기간 소개한 바 있다. 이것을 이어받아 광화문 앞 역사박물관에서도"나의 보물, 우리의 현대사" 특별전을 열고 있는데 한 달 반 만에 13만 영이 관람하였다고 한다.[1]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집안의 물건도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든 사물이든 참된 가치는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에 감춰져 있다는 것을 갈파한 시인이 있다.
사실 전복 껍데기는 어둡고 거칠어 보이지만 조개 안쪽에는 찬란한 무지개를 내포한 은빛이 찬연하게 빛남을 알 수 있다.
장농을 만드는 장인들은 조개의 내피(內皮)를 다듬어 자개농짝에 갖다 붙였던 것이다.[2]
무지개 - 이정록
Rainbow by Lee Jung-rok
슬몃 자개농짝을 어루만지는 걸 보니
너도 이제 제법 나이를 먹었는가보다
어미가 저 전복 패한테 배운 게 있다
무엇이든 겉만 보고 가름하지 말거라
누구나 무지개는 가슴 안쪽에 둔단다
I've seen you stroking the cabinet inlaid with mother-of-pearl
You must have got pretty old now, too.
Your mother was taught something from that abalone shell.
Don't judge anything by its appearance.
Everyone has a rainbow inside their heart.
사실 월정사의 구층석탑과 보살석상도 석가탑, 다보탑, 석굴암에 비하면 그 가치를 몰라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칫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우리 곁의 보물을 어떻게 하면 찾아내서 오래 간직할 수 있는가.
평소에 독서와 사색을 통해 내재된 가치를 발견할 줄 아는 고상한 안목(眼目)을 기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Note
1] 조선일보, "지금의 대한민국 만든 보물들… 현대사 특별전", 2025.1.23 참조.
2] 전복 같이 껍질 안쪽의 진주질 성분 때문에 반짝이는 조개류를 재료로 빛나는 무늬를 만들어 정성껏 옻칠을 하여 새겨넣은 기물을 나전칠기(螺鈿漆器)라고 한다. 여기서 나/라(螺)는 '소라', 전(鈿)은 '장식하다'는 뜻이며, 껍질 안쪽이 반짝이는 조개껍질 조각을 순우리말로 '자개'라 하므로 자개를 박고 옻칠한 가구를 나전칠기 또는 자개그릇/장농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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