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지방 곳곳으로 산불이 번질 때 온 국민이 두 손 모아 비가 오기를 빌었다.
서울에서는 개나리와 목련이 피기 시작할 즈음 오랜만에 찾아간 평창에서는 눈이 내렸다. 그것도 상당히 많이.
하지만 철 모르는 눈이라고 타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펜시아는 이미 스키 시즌이 끝났고, 용평에서는 스키어들이 슬로우프를 내려오는 모습이 간간히 보였다.
나의 아쉬움을 달래주듯 눈발이 그치고 하늘의 먹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발왕산의 명물 케이블카를 타본 지도 오래 되었다. 지난 번 스키 시즌 피크 때에는 용평 리조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기도 어려웠을 뿐더러 케이블카 타는 줄이 어찌나 길던지 두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한다고 했었다. 그래서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나와야 했다.
지금은 스키 시즌도 거의 끝났고 아침부터 눈비가 내렸던 데다 평일 오후 시간이었다. 리조트 주차장도 텅텅 비어 있었고 티켓 창구 앞에는 우리 같은 몇몇 사람이 어떻게 하면 할인을 더 받을 수 있을까 궁리하며 서 있을 뿐이었다.
경로 할인으로 왕복 티켓을 산 후 곧장 케이블카를 타러 갔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긴 거리(제일 긴 곳은 통영 미륵산 1975m)의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20여분 동안 풍경이 시시각각으로 바뀌었다. 해발 1100m 이상의 구간에서는 나무들이 온통 눈꽃을 입고 있었다. 대기 중의 수증기가 간밤에 나뭇가지에 엉겨붙은 서리꽃 상고대가 아니라 '진짜 눈꽃'이었다.
이윽고 케이블카 상부 스테이션에 당도했다. 여기저기서 관광객들이 즐겁게 철 지난 눈을 밟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전망대에 서서 사방을 둘러 보았다.
조금 전 눈발을 날리던 구름이 걷힌 사이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이더니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대관령 너머 동해안 쪽으로는 푸른 하늘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요즘 황사와 미세먼지로 제대로 숨을 쉬기조차 어려웠는데 발왕산 산정에서 이런 설경까지 보다니!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다만, 바람이 세차게 불어 오래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천년 주목 숲길을 걸었다. 아름다운 관상목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로도 각광을 받는 우리나라 주목(朱木)의 자생발원 군락지라고 했다.
능선 조금 아래의 주목 숲에 계단이나 턱이 없는 데크를 설치해 놓아 유모차 휠체어도 편리하게 숲길을 다닐 수 있었다. 우리도 세찬 바람을 맞지 않고 설경을 구경하며 걸을 수 있었다.
주목 나무 가지마다 흰눈이 소복이 쌓여 있고 조금 더 가니 두꺼비 모양의 큰 바위가 나타나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700여 m를 걸어가니국기 게양대와 평창올림픽 성화 모양의 기념탑이 서 있는 평화봉이 나왔다. 해발 1458m의 발왕산 정상이라고 했다. 비록 케이블카를 타고 힘들이지 않고 올라온 것이지만 최근 들어 가장 높은 고지에 오른 셈이었다. 게다가 백설공주가 내려온 것 같은 기막힌 설경까지 구경하면서 말이다.
눈이 그쳤을 때 오른 발왕산
눈꽃 단장한 백설공주 만난 듯
눈부신 설경을 본 게 언제련가!
One day in March
When snow ceased to fall,
I climbed Balwang-san via ropeway.
It looked like a beautiful snow white-
Lady sitting on the top.
It’s really awesome to see
Fascinating snow-covered landscape.
오후 5시가 넘어 폐장 시간이 다가오면서 사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산 위로 먹구름이 대거 몰려온 까닭이었다.
1500m 공중에 떠 있는 발왕산의 또 다른 명물 스카이워크로 올라갔으나 강풍 때문에 멀리 걸어가지는 못하게 했다.
그런대로 좋았다.
나름대로 미국과 캐나다, 스위스의 유명 관광지를 두루 다녀 보았지만 이렇게 설경(雪景)이 아름다운 곳, 그것도 단 몇 시간만 허용되는 경치를 언제 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가사 전문은 이곳을 탭)
숙소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마침 장사익의 '봄날은 간다' 구성진 노래가락이 흘러나왔다.
지금은 황혼, 나도 푸른 꿈에 부풀었던 청춘 시절이 있었지. . .
정말로 아름다운 설경을 구경하면서 내 인생의 봄날이 언제였던가 되돌아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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