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초 일본 교토로 디자인을 주제로 한 여행을 다녀왔다.
여러 미술관과 전통 사찰, 그리고 예술가들이 건축에 참여한 건축물을 돌아보는, 주제가 있는 여행이었다. 유명 디자이너가 설계한 특급호텔과 레스토랑, 그가 작업하는 부티끄 숍 등 역시 탐방 대상이었고 건축&아트 전문 여행사인 TravelON의 이정민 대표가 직접 가이드를 해주었다.
막상 교토에 도착해 보니 아름다운 세계의 디자이너인 조물주(Creator)의 '가을(秋)' 작품이 펼쳐져 있었다.
인솔자의 말에 따르면 올 여름 폭염으로 인해 12월이 되었음에도 이제 막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간무천황이 교토로 천도한 794년부터 12세기 말까지의 중앙집권적 천황 통치 시대) 이래의 천 년 고도(古都)답게 은행나무 가로수가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간사이 공항에 도착 한 우리 일행은 미리 QR 코드로 입국 및 세관신고서를 작성해 두었기에 간단히 수속을 마친 후 곧바로 짐을 찾을 수 있었다. 입국장 밖으로 나와 이미 일본에 와 있던 이정민 대표와 로칼 가이드 이기영 씨를 만나 버스에 탑승했다.
우리 일행은 모두 19명으로 몇 년 전부터 아트&디자인을 주제로 월드 투어를 해 온 브랜드와 요리 전문가 다이아나 강 여사와 그 지인들의 그룹, 동행하는 부군들, 또 이정민 대표와 세계 여행을 해 온 몇 분들로 구성되었는데 초면인 경우에도 만나자마자 친해질 수 있었다. 취향이 비슷한 데다 몇 사람만 건너면 서로 아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우리 같은 연장자들은 버스의 앞자리, 보다 젊은 세대는 뒷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인솔자가 이번 디자인 투어의 개요를 설명하였다. 우리나라와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건축과 미술을 디자인의 관점에서 살펴보자는 것이었다. 이정민 대표는 나름대로 전문성 있는 가이드를 자신했는데 이번 그룹은 대부분 전문가들이어서 다른 때보다 1.5배(?)는 신경써서 공부를 해두었다고 말했다.
우리 일행이 탄 중형버스는 셀 수 없이 많은 교량을 건너고 고가도로를 지나 오사카 외곽을 돌아 북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교토 서쪽 교외의 한적한 시골마을로 갔다.
첫 날의 행선지는 점심 식사 후 단풍 관광지로 유명한 도롯코 가메오카(亀岡)에 가서 단풍 관광열차를 타는 것이었다.
교토 여행의 첫 인상을 좌우할 수 있는 첫날 점심 메뉴는 맛집으로 유명한 라쿠사이(洛菜) 식당에서 가이세키(懷石: 다도에서 차 마시기 전에 먹는 간단한 요리) 런치였다. 미니 가이세키(会席)라 할 정도로 정갈하고 맛있는 사계절의 음식이 순서대로 나왔다. 일본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부부 사이라도 같이 나눠먹는 음식이 없다. 모든 음식이 개별적으로 나온다.
교토의 유명한 단풍열차를 타러 가기 전에 약간의 시간 여유가 있어 상아 교세라 스타디움 앞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기차 시간을 기다렸다. 이 스타디움에 'by Kyosera'라는 브랜드네임이 붙은 이유는 우리나라의 지하철역 이름 같이 교세라가 그 이용료를 냈기 때문이다. 이 스타디움은 교토 상아 FC의 홈구장이다. 스타디움 바로 앞의 스타벅스 안에는 노트북을 켜놓고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여럿 있었는데 한 무리의 한국 관광객들을 보고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작은 시골역에는 단풍을 보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인솔자가 단풍철에 인기 만점인 단풍열차를 타기 위해 한국처럼 광클(빛의 속도로 온라인 예약 사이트 접속하기)이 아니라 새벽에 일찍 나와 줄을 서서 간신히 21명의 표를 구했다고 말했다.
본래 호즈가와 계곡의 삼림을 벌채하여 교토로 운반하기 위해 만든 철도였으나 지금은 관광용으로 운행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을 포함한 관광객들은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 계곡 위로 펼쳐지는 바깥 풍경을 정신 없이 바라보았다. 산속보다는 철로변에 단풍나무와 벚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봄철에는 벚꽃, 가을에는 단풍잎이 볼거리였다. 그리고 계곡 물에서 배를 타고 선유나 래프팅을 즐길 수 있다고 했다.
단풍열차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아라시야마(嵐山) 오코치 산장으로 걸어갔다. 아라시야마 치쿠린(竹林) 뒤에 자리잡은 고즈넉한 산장(山莊) 정원으로 흑백영화 시절의 유명햔 영화배우였던 오코치 덴지로(大河內 1898-1962)가 사재를 털어 조성한 정원과 별장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별장 기념관의 벽에는 실제 큰 칼을 잘 쓰는 배우로 유명했던 오코치 전성시대의 사진들이 죽 걸려 있었다. 상대역의 배우들은 그가 휘두르는 진짜 칼에 맞을까봐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나무 한 그루 바위돌 하나 정성껏 그가 만들고 손질했다고 하는데 걷다 보면 교토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뷰포인트도 있었다.
이번에는 대나무 숲속에 들어가진 못하고 시간 관계상 입구만 보고 돌아나와야 했다.
여러 해 전에 아라시야마 텐류지(天龍寺) 옆 치쿠린에 왔을 때 시비(詩碑)에서 보았던 하이쿠(계절의 경치와 감성을 노래한 17음절의 짧은 시)가 생각났다. 노노미야 신사(野宮神社)는 일본의 고대소설 겐지의 이야기(源氏物語)에도 등장하며 학문ㆍ연애ㆍ안산(安産)을 빌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野宮の竹美しや 春しぐれ
노노미야 신사
죽림(竹林)의 아름다움
봄비에 젖네
이것에 대한 대구(對句)로 내 나름대로 국・영문 하이쿠를 지어 보았다. 글자 수를 세면서 하이쿠를 다듬는 사이에 저녁 라이트업 쇼 관람이 예정되어 있는 교토부립(京都府立) 식물원에 당도했다.
교토는 죽림만 알았는데
불타는 단풍을 보네
Kyoto is known for bamboo forest.
Now I can see burning maple trees.
이미 날이 어두워진 후에 입장한 식물원 구내의 정원에서는 은행나무의 노란 단풍잎이 조명을 받아 더욱 빛나 보였다.
식물원 개원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계 곳곳에서 조명 쇼를 연출한 바 있는 Moment Factory가 10월 18일부터 금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까지 Light Cycles라는 타이틀로 식물원의 유리 온실을 빛과 소리의 쇼 무대로 탈바꿈해 놓은 곳이었다.
6시 정각 우리 일행도 긴 줄을 따라 식물원의 유리 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4구역으로 나누어 경쾌한 비트 음악을 배경으로 레이저 광선이 현란한 빛과 소리의 쇼를 펼치고 있었다. 건물이나 동굴의 외벽이 아닌 식물원의 나무와 선인장에 비추는 빛이 생명력 넘치게 보였다.
저녁 식사 장소는 고다이지(高台寺) 부근의 사도 레스토랑이었다.
유명 화가의 아틀리에로 쓰였던 곳을 레스토랑으로 개조한 곳이었는데 정원이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었다. 음식은 이탈리아식이었다. 손님의 대부분이 여성이고 남성들도 비주류가 많은 터라 당연히 주문을 해야 할 와인은 없고 스파클링 워터를 달라고 하니 웨이터들이 다소 놀라는 눈치였다.
정원 한 쪽에는 Cozy Music Hall이라는 안내판이 걸려 있는 건물이 있었다. Cozy란 말이 Music에 걸릴지 (주로 조용한 실내악곡을 연주?) 아니면 Hall을 수식하는 말일지 (작고 아담한 실내공간?) 살왕설래가 있었다.
9시가 다 되어 첫 날과 둘째 날 연박(連泊)을 하게 될 에이스 호텔로 갔다.
본래 전화국으로 쓰이던 건물을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건축가 구마 겐고(隈 研吾 1954 - ) 도쿄대 교수와 코뮌 디자인 그룹이 리노베이션을 해 2020년에 문을 연 5성급 호텔이다.
구마 겐고의 시그니쳐인 목재를 써서 기둥과 차양을 설치한 독특한 외관을 자랑한다고 했다. 또 1층 로비에는 길다란 탁자와 독서대가 놓여 있어 젊은이들이 노트북을 켜 놓고 작업을 하고 한 쪽 벽에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 나올 법한 캐릭터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객실에는 턴테이블과 앰프가 놓여 있어 그 옆에 비치되어 있는 LP판을 직접 들어볼 수 있게 한, 말 그대로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는 호텔이었다.
P S.
숙소에서 하루를 마감하기 전에 노트북을 열고 늘상 그러하듯이 내가 운영하는 온라인 백과사전 KoreanLII와 블로그의 트래픽을 점검했다. 작년부터 종종 트래픽 스파이크, 해킹 사고가 발생하곤 하여 즉각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특이사항이 있었다. KoreanLII에서 Martial law (계엄령)를 찾는 사람이 급증하고 1일 트래픽 한도가 차기 직전이었다. 한국 뉴스 기사를 보니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고 했다. 곧 이어 아이들이 전화를 걸어 왔다. 그러나 일본에 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를 두고 속수무책(束手無策)이라 할 수밖에. . .
⇒ 교토 사찰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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