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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실기한 배추 농사의 허탈감

Onepark 2023. 12. 9. 09:40

전북 진안에서 감(枾) 농사를 짓는 친구가 단체 카톡방에 그 마을 주민의 안타까운 소식을 올렸다.[1]

온갖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힘 들여 돈 써가며 배추 농사를 지었는데 김장철이 지났음에도 수확하지 않은 배추가 밭에 그대로 널려 있다고 말했다. 작년 겨울에는 눈밭에 남아있는 배추가 진시황의 병마용(兵馬俑)을 보는 것 같다며 사진을 보내온 적도 있었다. 

 

* 팔리지 않아 방치돼 있는 배추밭. 사진출처: 유양수

 

마을 어귀 문전옥답 배추 농사 볼 만하네
힘들여서 거름 주고 모종 사다 심은 후엔
가뭄 때는 밭에 나가 아침 저녁 물을 주고

장마 철엔 고랑 내고 서리 올까  짚을 덮고
행여나 병이 들까 약통 메고 약 뿌리고
외국 일손 데려다가 돈 써가며 키웠는데ᆢᆢ

The cabbage farm at the entrance of village is noteworthy.
After the hard work of fertilizing, buying and planting seedlings,
The farmer went out in the dry season to water them in the morning and evening.
In rainy season, he made furrows. Against frost, he covered them with straw.
When they got sick, he cared too much and sprinkled them with medicine.
He spent money to take care of them by bringing in foreign laborers.

부지세월 노심초사 공을 들여 가꿨으나 
김장철이 다 가도록 찾는 사람 일도 없네
아침마다 무서리에 흰눈까지 뒤덮히면

희고 검은 배추머리 진시황릉 병마용일세
지금까진 포근하니 소망 붙든 우리 농부
갈무리하며 늦부지런 손님 맞을 채비하네

* 유양수의 카톡 메시지를 가사체로 변형 [2]

He cultivated his cabbage farm with great efforts.
But no one came to see until the end of kimjang season.
Every morning, when the farm was covered with frost or snow,
B/W cabbage-heads looked like terracotta warriers of Qin Shi Huang's tomb.
So far, it's warm, so the farmer can't lose hope.
He's prepared to welcome the late visitors.

 

* 흰눈밭 위에 얼어붙은 배추가 병마용 같이 열을 맞춰 서 있다. 사진출처: 유양수(2022.12.27)

 

때를 놓쳐 팔리지 않은 물품이 어디 시골 마을의 배추뿐이랴!

유전 탐사든, 벤처 창업이든, 모험적인 사업이 성공할 가능성은 5% 미만이라고 한다.

나 역시 20여 년의 학자 생활을 마치고 그 동안 공부했던 것을 인터넷에 올려놓았지만 독자들의 반응은 "So-so"일 뿐이다.

 

- 온라인 법률백과사전 KoreanLII를 동역자 없이 혼자서 13년째 운영하고 있다. 지난 8, 9월 한 때 해외 방문자가 급증하자 사이트가 다운이 되곤 하여 트래픽 용량을 크게 늘렸다. 그런데 지금은 예상에 크게 미달하는 방문자 수를 기록하고 있다.

* 우리의 시와 노랫말을 영어로 옮긴 것도 대략 300편이 넘는다. 그러나 국내외 독자들의 관심과 반응은 훨씬 기대에 못 미치는 실정이다. 

* 학문적 호기심에서 출발한 첨단 동산관리 기법을 많은 돈을 들여 특허등록하는 데까진 성공했으나 상업화는커녕 해마다 특허등록 유지비만 나가고 있다.

 

그러니 실기 (失期? 失機)한 배추 농사의 안타까움이 나에겐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고랭지 채소로 유명한 강원도 평창에 자주 다니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배추 농사에도 여간 많은 품이 드는 게 아니며 그때마다 외국인 근로자들을 봉고차로 실어 나르다 보니 적잖은 현금지출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제때 수확을 하여 팔지 못하면 고스란히 농부의 손실이 되는 것이다.

 

내 처지도 배추 농사를 허탕친 시골 농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셈이다.

요즘 시골 농부들도 신시장 개척과 유통망 확대를 위해 온라인 쇼핑, SNS 활용에 열을 올리는 것처럼 나도 대책마련이 시급하다고 생각되었다.

비록 인터넷 사이트와 블로그를 통해 가외 수입을 올리거나 핵인싸가 되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일지라도 내가 여기에 들인 시간과 노력만큼 성과를 얻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 제주도 남원(南元)의 일출광경. 사진출처: 김종열

 

다른 한편으론 부주의하거나 게으른 일꾼이 기대하지 않았던 성공을 거둔 사례가 귀에 솔깃하게 다가왔다.

#1. 실험실 배양 접시 뚜껑을 닫지 않은 채 휴가를 떠났다가 돌아온 영국의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은  그곳에서 푸른 곰팡이가 세균을 모조리 없앤 것을 보았다. 수차례 실험을 거듭한 끝에 항생제 페니실린을 발견하였다.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부상병을 죽음에서 구할 수 있었다.

# 2. 가을철 포도 수확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포도나무에 달린 채로 있던 포도송이가 찬바람과 눈에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했다. 그 결과 포도의 당도가 25 brix 이상으로 높아져 이것을 가지고 포도주를 만들자 훨씬 달콤한 아이스와인이 되었다. 일반 품종은 방치하면 썩어버리기 때문에 리슬링이나 비달 같은 품종이 아이스와인 만들기에 적합하다. 

#3. 강력 접착제를 개발하던 미국 3M사의 연구원이 원료배합을 잘못하여 접착력이 떨어지는 실패작이 나왔다. 그러나 몇 번이고 떼었다 붙여도 접착력이 유지되는 것을 알고 포스트잇이라는 신제품으로 출시하였다. 

 

진안의 배추 농사 짓는 농부에게는 무슨 조언이 필요할까?

트랙터를 동원해 그냥 갈아엎기에는 너무나 억울하고 안타까웠다.

못쓰게 된 배추를 가지고 어린이나 어른이 리크레이션으로 즐길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온라인 법률백과사전의 경우 국내 로스쿨에서는 외국 학생을 위한 LL.M. 과정이 개설되기 전에는 수요처가 없지만, 이미 인공지능(AI) 학습자료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음이 밝혀진 바 있다.

이미 영역(英譯)해 놓은 한국의 시와 노래 가사는 보다 유력한 매체(예: 동영상 사이트, 메타버스 등)나  선율로 옮기는 등의 활용도를 찾을 수 있다면 연쇄반응(chain reaction)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한 해를 마감하며 내리는 결론은 단 한 가지라 하겠다. 17음절의 단시(短詩)로 심경을 표현해 보았다.

 

꾸준히 준비하고

끈기 있게 기다리는 일 뿐 !

Prepare consistently, and

wait for a chance persistently.

That's it !

 

* 제주도 산방산 앞의 금잔옥대 수선화. 사진출처: 조선일보 (2016.3.3)

 

우연찮게도 실기한 배추 농사 매시지를 받은 그 다음날 다른 친구가 복효근의 시 여러 편을 소개해주었다.[3]

수선화에 관한 시를 읽는 도중 구태여 "이유를 찾는것은 사치라는 듯 말없이 꽃몽오리는 맺히고"라는 구절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온라인 사이트를 홀로 운영하고, 또 블로그에 1주일에 한두 편씩 올리는 것이  무슨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좋아하기 때문에 하는 것임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그렇다! 무에 그리 목마르게 그리운 것이 있는지 우리 모두 무모한 여행 같은 삶은 사는 게 아닐까.

무슨 대가나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해야 할 일이라고 단순히 믿었기에, 말라비틀어졌을 망정 구근을 흙속에 묻으면 수선화가 싹이 트고 꽃이 피게 마련 아닌가! [4]

이것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고 믿었기에 오랜 기간 온라인 사이트와 블로그를 운영헤 온 게 틀림없었다.

 

 

수선화에게 묻다   - 복효근

I Asked a Daffodil    by Bok Hyo-geun

 

말라비틀어진 수선화 알뿌리를 다듬어
다시 묻고 나니
비 내리고 어김없이 촉을 틔운다

After trimming the dried-up daffodil roots,
I planted them in the soil again.
After some rains, they sprouted without fail.

 

한 생의 매듭 뒤에도 또 시작은 있다는 것인지
어떻게 잎사귀 몇 개로
저 계절을 건너겠다는 것인지
이 무모한 여행 다음에
기어이 다다를 그 어디 마련이나 있는지

I wonder, after the knot of a life, there is another beginning.
How, with a few leaves,
they could cross that season.
After this reckless journey,
there would be a destination to be reached in the end.

 

귀 기울이면
알뿌리, 겹겹 상처가
서로를 끌어안는 소리
다시 실뿌리 내려 먼 강물을 끌어오는 소리
어머니 자궁 속에서 듣던
그 모음 같은 것 자음 같은 것

If you listen to them,
you can hear the roots with the layered wounds
embracing each other,
re-rooting and pulling in distant rivers.
The sound is, in my mother's womb,
that vowel-like thing, or that consonant-like thing.

 

살아야 함에 이유를 찾는 것은 사치라는 듯
말없이 꽃몽오리는 맺히고
무에 그리 목마르게 그리운 것 있어
또 한 세상 도모하며
잎은 잎대로 꽃대궁은 또 꽃대궁대로 일어서는데

As if finding a reason to live is a luxury,
Wordlessly, flowers are ready to bloom.
There is something so thirsty for that they miss,
Looking for another world,
Leaf after leaf, flower stem after stem, all arise.

 

이제 피어날 수선화는
뿌리가 입은 상처의 총화라면
오늘 안간힘으로 일어서는 내 생이,
내 생에 피울 꽃이
수선화처럼은 아름다워야 되지 않겠는가

Suppose the daffodils that are going to bloom
must be a total combition of all wounds bourn by the roots,
My life, that stands up today with my damnedest,
should be as beautiful as the daffodil.
It's the flower which will bloom in my life.

 

꽃,
다음 생을 엿듣기 위한 귀는 아닐까

The flower,
It must be an ear with which I listen to the next life.

 

Note

1] 2023. 12. 9 아침 유양수의 카톡 메시지 전문(첨부 사진은 생략)은 다음과 같다.

**  해마다 반복되는 허탈 ?ᆢ 
힘들게 거름들여 밭갈고 모종사다 심어ᆢ 
가뭄들면 아침 저녁 물주고 행여 병들면 약통메고ᆢ 
옆에서 보기에도 노심초사 열심히 키우던데ᆢ 
매일 서리는 내리고 기온은 내려가는데 ,아직도 동네 입구 배추밭에는ᆢ 
그나마 때마다 외국인 일손 빌려 돈써 키웠는데ᆢ 
조만간 눈이 오면 배추머리는 병마용갱처럼 줄맞춰 검고희게 변할터ᆢㅉ 
그래도 따뜻한 날씨에 희망을 놓지 않는 길건너 농부는 덮게로 임시 갈무리

 

2] 4-4조의 운율을 기본으로 하는 가사체는 고려말에 등장한 긴 노래(長歌) 스타일이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이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 여러 가사(歌辭) 문학작품을 남겼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 개신교의 찬송가가 전래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가사체 운율을 타게 되었다. 미국의 찬송가 작사가로 유명한 찰스 버틀러가 "예수님 계신 곳이 천국이다"(Where Jesus is, 'Tis Heaven)라는 제목으로 가사를 쓰고 여기에 제임스 블랙이 곡을 붙인 찬송가가 1900년대 초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우리나라에는 1919년 성결교단이 펴낸 신증 복음가에 처음 실렸는데 아주 자연스럽게 4-4조의 가사를 붙였던 것이다.

 

새 찬송가 438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 

(1 절)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3] 복효근(卜孝根, 1962~  ). 시인, 전북 남원에서 출생하였으며 전북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후  남원 송동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1991년 계간 <시와 시학>을 통해 등단하였고, 편운 문학상 신인상, <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 등을 수상했다.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1993), <버마 제비>(1996),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2002), <목련꽃 브라자>(2005) 등 시집을 출간했으며 특정 주제에 관한 촌철살인의 시어로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추운 겨울철에 처마밑에 매달린 고드름을 놓고서 복효근이 읆은 다음 시를 보자. 

* 처마밑 고드름 사진 출처: 바오로딸 콘텐츠, "추억의 스케치북"

 

고드름  - 복효근

Icicle   by Bok Hyo-geun

 

모두들 저 위를 향하여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을 때
저 빙점 이하의 낮은 곳으로
쓸쓸히 계단을 내려서는 이들 또한 있어

When everyone looks up over there
earnestly piling up one by one,
someone walks down the stairs forlornly
to a low point below freezing point.

 

불빛마저 들지 않는 경계의 바깥
더는 발 내디딜 수 없는 처마 밑에서
누가 밤새 소리도 없이 울었을까

Outside of a light-free boundary,
under the eaves where no one can step any more,
who cried all night in silence?

 

가파른 난간을 붙잡고
동굴 같은 지상을 향한 빛기둥 몇 개
눈물로 빚어낸 종유석

Holding on to the steep railing,
a few columns of light towards the cavernous earth
have built stalactites made of tears.

 

거꾸로 매달려
이내 독을 일구는 순교의 아침을 꿈꾸었을까
저 무모하게 투명한

Hanging upside down,
did it dream of a morning of martyrdom to cultivate poison?
That recklessly transparent one.

 

4] 제주도 대정읍의 수선화는 워즈워드 등 수많은 시인과 가객(歌客)들이 불렀던 수선화와 같은 종류의 꽃임에도 하얀 꽃잎 중앙의 꽃술 있는 부위에 노란 꽃잎이 볼록 솟아나와 예로부터 금잔옥대라 불렸다. 특히 추사 김정희(秋史 또는 阮堂 金正喜, 1786-1856)이 정적의 모함을 받아 제주도 대정읍 산방산 부근에 유배(1840-1848)되어 유리안치 지내던 중 이른 봄이면 집 주변에 금잔옥대 수선화가 군락으로 피어 선생의 마음을 스산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 제주도 대정읍 추사관에 서 있는 수선화 기념비. 사진출처: Naver 블로그 '소소하게 떠나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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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조 운율의 가사체 시가지리산별곡 (윤용호 지음), 권효가 (작자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