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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

Onepark 2023. 10. 20. 11:20

매달 한 차례 고등학교 동창들과 매우 지적인 성격의 모임을 갖고 있다.

구성원들이 대부분 은퇴하였음에도 오랜 기간 전문직에 종사하였던 만큼 이야깃거리 또한 수준급이다. 단순히 먹고 노는 이야기보다 독서나 여행을 통해 얻은, 같이 나눌 만한 경험담을 PT로 발표하고 토론을 하는 식이다.

가을철 꽃향유 속에서 열심히 꿀을 모으고 있는 박각시나방을 보려면 맨아래 See Video clip at the bottom.

 

9월 중엔 내가 일상생활에서의 인공지능(AI) 활용에 관한 체험담(PPT 자료는 이곳을 클릭)을 곁들인 발표를 한 데 이어 10월에는 재료공학 박사인 박찬경 교수가 "현대인이 알아야 할 와인 상식"이라는 주제 발표를 하고, 이 날 배운 것을 토대로 포도주 블라인드 테스트까지 하였다.

그 결과, 지금까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생선요리엔 화이트 와인, 육류에는 레드 와인 정도만 분간하여 와인을 마셨다면, 이젠 제대로 와인 레이블도 읽어보고 어떤 품종으로 어디서 만든 포도주인지 구분은 할 수 있게 되었다.

 

* 왼쪽부터 임대순 교수, 발표를 하는 박찬경 교수, 이기룡 성형외과 원장
* "현대인의 와인 상식" PT 자료 중의 일부

 

그런데 팬데믹 기간 중 와인 소비가 주춤한 반면 위스키는 오픈런이 일어날 정도로 젊은층 중심으로 소비가 급중했다고 한다. 더 놀라운 일은 전문가들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고 진단한 커피의 소비와 원두 수입은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여름이 유난히 더운 탓도 있었지만 한국에서 '아아'는 한류의 영향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줄인말임을 전세계인이 알게 되었다.

 

계절이 '메밀꽃 필 무렵'으로 바뀌면서 마침 우리집 커피 메이커가 고장이 났다.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 에세이를 보면 낙엽을 태울 때에는 잘 볶은 커피 냄새가 난다고 했는데 10년 가까이 썼던 커피메이커를 고쳐 쓰든가 새 것을 사든가 대책을 세워야 했다.

오랫 동안 내 취향에 맞는 커피를 만들어 마셨던 정(情)이 든 물건이어서 그냥 버리기엔 못내 서운했다. 그래서 메이커 홈페이지를 찾아 AS 받을 방도가 없는지 알아보았다.

 

전화로 문의한 후 간단한 고장이 아닐까 싶어 남양주에 있는 AS 센터를 찾아가보기로 했다.

지도를 찾아보니 목적지 전철역이 구리역 다음의 도농역이므로 우리집에서 갈 때 전철을 상봉역에서 경의중앙선으로 한 번만 갈아타면 되었다. 마침 이름도 멋있는 황금산 공원을 돌아가는 길에 도시공원도 조성되어 있기에 시골 길을 걷는 기분을 한번 내어보기로 했다.

 

* 도농역에서 바라본 황금산의 위압적이지 않은 스카이라인
* 황금산을 둘러서 가는 가운로의 가로수는 벌써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 가로수 낙엽이 지기 시작한 보도에는 낙엽이 쌓였다.

 

얕으막한 황금산 공원 주변 가로의 이름마다 다산(茶山)이라는 지명이 붙어 있었다. 다산 정약용은 그가 모셨던 정조대왕 승하 후 유배 생활을 18년이나 했기에 남양주 집에 돌아온 뒤에도 여유당(與猶堂)이라는 현판을 내걸었다. "살얼음판 걷듯이 조심해서 처신하라"는 뜻이었다. 그를 권좌에서 밀어냈던 당시의 권세가들 이름은 아는 사람이 없지만 이렇게 숨을 죽이며 살았던 실학자 정약용은 오늘날 한국 땅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후대 역사의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겠는가.

 

오후 비교적 이른 시간에 도농역에서 내리니 이곳이 언제 이렇게 발전했나 싶게 서울 근교의 주거단지로서 도처에 고층 아파트가 줄지어 서 있었다.

황금산 공원을 돌아 천천히 걸어갔다. 신흥 주거단지답게 산책로와 공원이 예쁘게 조성되어 있었다.

보도 위에는 가로수 나뭇잎이 낙엽이 되어 떨어져 걸을 때마다 사그락 사그락 소리가 났다.

자연히 구르몽(Remy de Gourmont, 1859∼1915)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났다.

 

 

낙 엽 (落葉) [1]  -  레미 드 구르몽

Les feuilles mortes [2] - Gourmont

Autumn Leaves  by Gourmont

 

시몬아, 나뭇잎 떨어진 樹林(수림)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小路(소로, 오솔길)를 덮었다.

 

시몬아, 落葉(낙엽) 밟는 발소리를 좋아하니?
落葉의 빛깔은 좋으나, 모양이 寂寞(적막)하다,
落葉은 가이없이 버린 땅 위에 흩어졌다.


시몬아, 落葉 밟는 발소리를 좋아하니?


黃昏(황혼)의 때면 落葉의 모양은 寂寞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落葉은 소곤거린다.

 

Simone, allons au bois : les feuilles sont tombées;

Elles recouvrent la mousse, les pierres et les sentiers.

 

Simone, aimes-tu le bruit des pas sur les feuilles mortes?

 

Elles ont des couleurs si douces, des tons si graves,

Elles sont sur la terre de si frêles épaves!

 

Simone, aimes-tu le bruit des pas sur les feuilles mortes?

 

Elles ont l'air si dolent à l'heure du crépuscule,

Elles crient si tendrement, quand le vent les bouscule!

 

Simone, let’s go to the wood where the leaves have fallen
The leaves cover the moss, stones, and small paths.

 

Simone, do you enjoy the sound fallen leaves under your feet?

 

The color of fallen leaves is pleasant, but their shape is quiet
Pitifully discarded atop the ground, the leaves disperse.

 

Simone, do you enjoy the sound fallen leaves under your feet?


At twilight, the shape of the fallen leaves is quiet

When the wind blows, the leaves whisper.


시몬아, 낙엽 밟는 발소리를 좋아하니?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아, 낙엽 밟는 발소리를 좋아하니?

 

가까이 오렴, 언제 한 番(번)은 우리도 불쌍한 落葉이 되겠다,
가까이 오렴, 벌써 밤이 되어 바람이 몸에 스며든다.

 

시몬아, 落葉 밟는 발소리를 좋아하니?

 

Simone, aimes-tu le bruit des pas sur les feuilles mortes ?

 

Quand le pied les écrase, elles pleurent comme des âmes,

Elles font un bruit d'ailes ou de robes de femme :

 

Simone, aimes-tu le bruit des pas sur les feuilles mortes ?

 

Viens: nous serons un jour de pauvres feuilles mortes.

Viens: déjà la nuit tombe et le vent nous emporte.

 

Simone, aimes-tu le bruit des pas sur les feuilles mortes ?

 

Simone, do you enjoy the sound fallen leaves under your feet?

 

When the foot crushes them, they cry like souls, 

They make a noise like wings or women's dresses.

 

Simone, do you enjoy the sound fallen leaves under your feet?


Come here, we too will someday become pitiful fallen leaves
Come here, it is night already, wind seeps into the body.


Simone, do you enjoy the sound fallen leaves under your feet?

 

 

시몬은 구르몽이 사랑했던 여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의 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시몬이 되어 가을만 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된다.

"시몬, 너는 좋니? 낙엽 밟는 소리가." 

"Do you like the sound of stepping upon fallen leaves?"

 

 

구르몽의 시 구절 처럼 가로수 낙엽이 땅에 떨어져 제법 쌓인 탓에 낙엽 밟는 소리가 "사그락 사그락" 운치있게 들렸다. 

이곳저곳 해찰을 하며 사진도 찍고 한 탓에 목적지인 현대테라타워까지 30분 이상 걸렸다.

내가 찾는 AS센터는 서울 근교에 많이 지어놓은 도시형 아파트 공장 타입의 오피스텔이었다.

 

밀리타 코리아 AS 담당직원은 멀리까지 손수 들고 오셨냐며 분해해서 살펴본 후 내일 알려드리겠다고 말했다.

5년이면 충분히 오래 쓰신 건데 그 이상 오래 애용해 주셨으니 최선을 다해 고쳐주겠노라고 약속했다.[3]

"이미 단종된 모델이어서 부품을 구할 수 없을 경우엔 새 것을 사셔야 한다"는 말에 나로선 값을 떠나 이걸로 만든 커피를 마시며 한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도 나누고 신문도 읽었노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 남양주시 현대테라타워 B동의 밀리타 코리아 AS센터

 

도농역까지 가는 버스편도 있었으나 주변 경치가 좋아서 처음 갔던 길로 되돌아 나왔다.

이걸 두고 속담은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하지 않았던가!

 

30분여 걷는 길이 무료하지 않게 단시(短詩, 하이쿠) 글자 수를 세면서 도농역까지 걸어갔다.

웬일인가! 경희대 정문 앞의 자주 다녔던 음식점 홍학의 주 메뉴인 개성손만두를 파는 집이 있었다.

크롸상처럼 빚은 왕만두가 푸짐한 만두속과 얼큰한 국물이 입맛을 당기게 하여 날이 추워지는 이맘 때면 자주 갔었는데 생각하자 발길이 절로 그집으로 옮겨졌다.

 

 

고장 난 가전 수리하러
남양주 가을 나들이

I went on a picnic
to visit a home appliance AS center.

공원 억새가
엎어진 김에 쉬어가라 손짓하네

A reeds bed in a park invited me
to have a rest for a while.

개성손만두를 보니
잊었던 추억이 새록새록

Furthermore, a mandu resturant reminds me
of the old good days [on campus].

 

* 나로 하여금 전골 2인분을 테이크아웃하게 만든 남양주의 개성손만두 전문음식점

 

아름다운 외국 시를 우리말과 영어로 옮긴 것을 더 많이 보려면 이곳을 탭하세요.

 

Note

1] 놀랍게도 위의 한글 번역은 일제 치하이던 1921년 광익서관에서 발간한 안서 김억의 <오뇌의 무도(懊腦 舞蹈)> 시집에 실린 것이다. 출처: Kim Ŏk, Onoe ŭi mudo [The Dance of Agony] (Seoul: Kwangik sŏgwan, 1921), The University of Chicago Lyrical Translation; DA Krolikoski, Knowledge UChicago, 2019, pp.59-70.

 

김소월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역자 김억은 번역의 대본이 세계어(에스페란토) 역본이며 이밖에도 영어와 일어를 주로 참고하고 불어도 힘 있는 한 참고하였음을 밝혔다.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시집에는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 등 21편, 구르몽의 「가을의 따님」 등 10편, 사맹의 「반주(伴奏)」 등 8편, 보들레르의 「죽음의 즐거움」 등 7편, 예이츠의 「꿈」 등 6편, 기타 시인의 작품으로 「오뇌의 무도곡」 속에 23편, 「소곡(小曲)」에 10편 등 총 85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재판본에서는 일부 시인의 작품이 삭제되거나 추가되어 초판보다 약 10편이 더 많은 94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같은 작품의 경우에도 끊임없는 퇴고 과정을 통하여 적지 않게 변모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모두 김억의 철저한 리듬 의식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김억이 주로 프랑스의 상징시를 번역한 시에서는 원시(原詩)가 지니고 있는 리듬에는 미치지 못한다 해도, 가능한 한계까지 한국어의 리듬을 살려보려고 섬세하게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뇌의 무도".

 

2] 샹송 고엽(枯葉, Les feuilles mortes)은 이브 몽땅의 구성진 노래로 잘 알려져 있다.

같은 제목의 구르몽의 시 역시 아름다운 멜로디의 샹송으로도 불려지고 있다.

 

* 가을철 꽃향유 속에서 박각시나방이 꿀모으기에 아주 열심이다. 영상제공: 유양수(진안) 

 

3] 내가 방문한 그 다음날 밀리타 코리아 고객센터의 AS담당자는 내게 전화를 걸어 좀 더 쓰실 수 있게 고쳐놓았다고 말했다. 이미 단종된 제품이어서 부품을 구할 순 없었으나 고장난 센서를 다행히 다른 제품의 것으로 교체할 수 있어서 무상으로 수리해 드리겠다고 했다. 정이 많이 들었던 커피메이커는 택배 착불(着拂)로 받아서 좀더 오래 쓸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