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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제주 산방굴사 탐방기(漢詩)

Onepark 2021. 8. 10. 10:30

부산 사는 시인・여행가 박하 박원호 선생이 제주도 여행 중에 발굴한 한시(漢詩)를 몇 편 보내주셨다. [1]

박하 선생의 시는 전에도 세연정 등 몇 편을 영어로 옮긴 적이 있기에 이번에는 그가 한시를 번역해놓은 것을 나는 다시 영어로 옮겨보기로 했다. 나 역시 서귀포 부근의 산방굴사[2]를 오래 전에 가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1983년 신혼여행 때 그곳에 들렀다가 산방굴사 앞에 신부와 나란히 앉아서 바다풍경을 바라보며 10년 뒤에 또 오자고 약속했었다. 그 약속을 지킨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더 지나서였는데, 나는 그 사이에 유럽과 미국에서 여러 해 살면서 이곳보다 경치 좋은 곳을 많이 가보지 않았느냐는 핑계를 댔다.

 

* 신혼여행 중에 정장을 한 것은 다른 허니문 커플들과 차별화를 위해 그랬던 것 같다.

 

山房窟寺 - 李漢雨

      산방굴사 - 이한우

Small Temple Sambang in a Cave  by Lee Han-woo  

 

化工*多巧斲靑山 洞設僧門雲掩關
鍊石乾坤包上下 孔針世界穿中間

      조물주 재주로 청산을 깎아내어
      굴속에 절 짓고 구름빗장 걸었네
      돌을 다듬어 천정, 바닥을 감싸고
      침으로 구멍 뚫어 세상은 그 중간에 만들었네

When Creator skillfully cut the blue mountain,
A small temple door took place in a cave with clouds crossed.
Then the ceiling and floor were elaborately made of stone.
In between, a Zen world was developed with needle-like thoughts.[3]

 

倒懸樹色千年戱 點滴泉聲萬古閑
寒榻香消雙佛坐 幾時甁鉢*鶴飛還

      거꾸로 매달린 나무는 천년을 희롱하고
      뚝뚝 듣는 낙숫물은 만고에 한가롭네
      향기 사라진 차디찬 좌대, 부처 두 분 앉았는데
      언제쯤 큰 스님이 학을 타고 오시려는고

As a tree is hung archly upside down for a long time,
Spring water drops falling in a leisurely mode.
While the incense is gone, twin Buddha statues sit on the podium
Waiting for a great monk flying in aboard a crane with wide wings.

* 化工 : 조물주

* 甁鉢 : 스님이 손씻는 물을 담는 항아리

 

위의 한시는 조선조 후기 제주 토박이 문인 이한우(李漢雨 1823~1881, 자는 次文, 호는 梅溪, 초명은 李漢震)가 지었다. 그는 아버지가 서당을 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한문에 접할 수 있었다. 향시에 합격하여 여러 차례 전시에 응시하였으나 멀리 탐라섬에서 올라온 선비가 급제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결국 고향에 돌아와 독서에 몰입해 천문・산경・지리・병서 등에 통달하였으며, 특히 시에 능하였다.[4]

 

1853년 제주 목사 목인배는 그의 글을 보고 남국 산두(南國山斗, 남국의 태산이요 북두칠성)라 극찬하기도 했다. 당시 제주도에 유배 중(1840~1848)이었던 김정희, 제주 문인 오태직, 김용징 등과 교류하였고, 여러 제자를 길러냈다. 제주에서 경관이 뛰어난 영주 십경을 시로 읊었으며, 《매계선생문집(梅溪先生文集)》을 남겼다.[4]

따라서 그의 시에서는 행간에 다음과 같은 사연이 깃들어 있다.

 

* 백록담은 화산 분화구이지만 산방산과 묘하게 요철을 이룬 것처럼 보인다. 이하 사진제공 박하.

 

1. Legend about Mt. Sambang-san

 

누군가 '설문대할망'의 옆구리를 쑤시는 바람에 할망이 화가 솟구쳐 일순간 한라산 꼭대기를 마개 뽑듯 뽑아 던졌다. 그 결과 꼭대기 뽑힌 곳에는 백록담이 생기고, 한라산 마개가 떨어진 곳에 산방산이 생겼다. 깎아지른 바위산의 중턱에 있는 굴에 모신 부처님이 곧 산방굴사이다. 매계(梅溪) 시인은 이곳에서 조물주가 청산을 자귀로 깎아낸(자귀로 깎아낸 착/斲) 것이라 하고, 동굴 앞에 어린 구름을 빗장으로 묘사했다.[4]

 

그리고 산방굴사 입구 천정에는 천 년 전부터 나무가 물구나무를 선 채 자란다는 이야기가 전해 왔다. 토박이 문사 이한우는 아마 어릴 적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시에 담았다. 천정에서 뚝뚝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예스럽고 처량한데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까닭에 향촉은 꺼져 있고 두 부처만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공양을 받드는 스님도 보살도 불자도 없으니 좌대 위 두 분 부처는 꼼짝 없이 굶기를 밥먹듯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탁발 나간 노승이 언제쯤 공양 바리를 채워 이 높은 곳에 학을 타고 돌아을까 상상하였던 것이다.[4]

 

* 산방굴사에 모셔진 부처님. 동굴 앞에는 조계종 사찰 산방사가 새로 지어졌다.
* 결혼 3년 후 암스테르담 대학으로 유학을 갈 때 우리 부부는 함께 네덜란드로 떠났다.
* 산방산 앞 용머리 부근 해변은 태풍에 조난당한 하멜 일행이 실제로 표착한 곳이다.

 

2. Relationship with famous Scholar Chusa

 

매계 이한우는 유배 와서 8년간이나 위리안치(圍籬安置, 가시나무 울타리 밖으로 못 나가게 하는 가택연금)되어 있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를 만나러 갔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초봄이면 수선화가 지천으로 꽃을 피우던 적소(謫所)로 찾아가 배움을 청했고, 교유를 지속했다[5] 추사는 매계와 40년 가까운 연차가 있었지만 둘은 망년지교(忘年之交) 사이였다고 전한다.

 

추사는 제주 유배 2년 만에 아내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해 있었다. 그때 추사의 동갑내기 벗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가 겨울 바다를 건너와 추사를 위로하고 추사부인의 49재를 치러주며 여섯 달을 함께 지냈다. 초의선사는 산방굴사를 자신의 암자삼아 머물렀던 것이다. 그런 연유로 추사가 필사하여 초의에게 전해준 반야심경이 전해 온다.[4]

 

* 허소치, "삿갓 쓰고 나막신 신은 완당 선생", 한겨레 2019.11.26.

 

3. Footsteps of Hendrick Hamel

 

이색적이게도 산방굴에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용머리 해변에 하멜(Hendrick Hamel 1630~1692) 일행이 1653년 표착했다. 하멜 일행은 조정에서 부를 때까지 1년 가까이 제주도에 머무르며 통역하러 온 같은 화란인 벨테브레를 만나기도 했다.

 

유럽의 대항해시대 네덜란드에서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바타비아와 타이완에 잠시 들렀다가 일본 나가사키로 가는 길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았을 텐데 태풍에서 살아남은 것은 천행이었지만 답답한 제주도 생활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지금은 하멜 기념관[6]과 하멜이 탔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선 슈페르웨르 호가 복원되어 전시되어 있다.

 

* 제주도 산방산 아래의 산방사 가는 길

 

17세기 하멜 일행,
지구 반대편 일류 기술자

In the 17th century, drifted by storm,
Hamel and his fellows arrived
Here in Jeju.

우리에겐 조련사가 없으니
어릿광대 취급

Tho’ they were skillful engineers,
Joseon government  ill-treated them
merely as clowns.

곳곳에 기념관 세워도
개척정신 없인 후진국

Now Hamel memorials are built
[Here and there but they're nothing]
Without pioneership in our mindset.[7]

 

Note

1] 박하(薄荷) 박원호 선생은 직업이 토목건설 엔지니어인 까닭에 현지답사를 중시하는 분이다. 나와는 몇 차례 단체 해외여행을 다녀온 바 있는데 엔지니어의 관점에서 여행기를 쓰고 책으로도 펴냈다. 최근에는 북한 답사여행을 꿈꾸면서 지금 시점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끌어모아 북한의 도시 이야기를 발간하기도 했다. 향토 부산의 명승유적지를 유적지를 돌아보고 그것에 얽힌 역사와 시문(詩文) 같은 인문지리를 망라한 여행안내서를 책으로 펴냈다.

* 낯설어도 훈훈한 페르시아 실크로드를 가다 : 詩와 정원의 나라, 이란 견문록, 지식공감, 2019. 2.

* 북한의 도시를 미리 가봅니다 : 평양에서 혜산까지, 책으로 떠나는 북한여행, 가람기획, 2019.10.

* 좌수영 수군, 절영도 사냥을 나가다 : 옛 詩 따라 다시 부산 산책, 은누리, 2020.10.

* 합강정 아래 놀이배 띄운 뜻은 : 옛 詩 따라 낙동강 누정 산책 (강경래와 공저), 은누리, 2021. 7.

 

2] 산방굴사는 고려 때 스님 혜일이 창건한 이래 장구한 세월 제주의 애환을 지켜보고, 또한 제주인과 유배객의 영혼을 따뜻하게 품어준 도량이었다.

 

3] 불가에서 참선을 할 때 가장 많이 떠올리는[이를 참구(參究)라 함] 화두(話頭)는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없다"라고 답한 조주(趙州) 선사의 "무(無)"라고한다. 그 다음으로 많이 쓰이는 화두가 운문(雲門) 선사가 말씀하신 "부처는 마른 똥막대기니라"이다. 옛날 농가에서는 용변을 본 후 두엄으로 쓰기 위해 겨, 마른풀 등과 뒤섞어야 하는 막대기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유학자인 이한우는 산방굴사에서 차마 '마른 똥막대기'를 찾는다고 할 수는 없으니 '바늘로 구멍을 뚫어 세상을 만든다'[孔針世界]고 표현한 것이리라 짐작된다. 그래서 영어로 번역할 때에는 좀더 리얼하게 바늘(=마른 똥막대기) 같은 생각(needle-like thoughts)으로 새로운 정신세계를 여는 견성오도(見性悟道)를 도모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매계 역시 화두 없이 참선한다는 것은 단순한 명상(瞑想)일 뿐 올바른 참선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간화선(看話禪)하는 모습을 이런 식으로 묘사했던 것이다.

 

4] 박하 박원호, 절절漢詩 #293, 고전의 메아리(밴드), 2021. 8. 8.

5] 제주도는 사면이 바다로 막힌 ’절해고도’였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 중앙정부는 제주를 중죄인들의 ‘유배의 섬’으로 만들었다. 조선시대 제주에 유배된 이는 300여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왕뿐 아니라 사대부, 중인, 평민 등도 있었다. 이들 유배인의 삶은 ‘유배문화’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제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허호준, "삿갓 쓰고 나막신 신은 추사…‘제주 유배인 이야기’ 특별전" 한겨레, 2019.11.26.

 

6] 우리나라에는 지자체별로 관광객 유치를 위해 하멜과 관련이 있는 곳에 각기 하멜 기념관을 세웠다. 당시 조선 조정이 해금(海禁)정책을 펴지 않고 그들의 지식과 경험을 살렸더라면 한국이 일본에 앞서 근대화를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는 그럴만한 식견을 가진 지도자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THAAD 못지 않게 청나라와의 외교적 갈등이 더 큰 문제였다.

* 하멜 일행이 처음 표착한 제주도 산방산 앞 용머리 해변 (위의 사진)

* 청나라 사신 앞에서 출국을 호소한 사건 이후 하멜 일행이 쫒겨간 전남 강진의 전라병영 앞. 이후 여수와 순천, 남원 세 곳에 분치되었다.

* 하멜 등 8명이 어선을 몰래 구입해 일본 나가사키로의 탈출을 감행했던 전남 여수항

 

7]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 때 네덜란드 선수단은 오렌지 빛깔의 우산을 쓰고 입장했는데 거기엔 "Netherlander comes in Seoul"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필자는 1986~87년 1년간 네덜란드 정부 펠로우십으로 암스테르담 대학원에서 수학한 적이 있기에 Korea Times에  300여년 전에도 수십 명의 화란인들이 서울에 왔었음을 상기시키고 두 나라의 간략한 역사를 소개하였다. 그때 내 글을 리프린트해서 써도 되겠느냐는 네덜란드 입양 관계자의 연락을 받고 그곳에 한국 입양아가 많이 살고 있음을 처음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