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평창은 영동고속도로 평창 나들목(IC)이 아니라 대관령 IC로 나와야 한다. 평창군은 봉평면, 용평면, 진부면, 대관령면(종전의 도암면), 대화면 등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지명 덕분에 우리 귀에도 익숙한 편이다. 평창(읍/邑이 아닌 올림픽 개최지)에서 제일 가까운 KTX 정차역은 진부(오대산)역이다.
요즘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많은 나라가 올림픽 개최를 원치 않는 등 그 양상이 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강원도 평창은 세 번째 도전 끝에 개최에 성공하였다. 2010년은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 2014년은 러시아 소치에 밀렸었다.
2018년 평창 올림픽 때는 역대 가장 많은 92개국이 참가했을 뿐더러 북한 선수단도 참가함으로써 모처럼 한반도에는 평화 무드가 일기도 했다.
그 덕분에 평창 일대는 서구 기준에 비추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다. 네 거리는 회전교차로(rotary)가 많으며 올림픽 대회를 5G 기반으로 치뤘던 만큼 산골 마을 답지 않게 이동통신 네트워크도 완비되어 있다.
동계올림픽 개막식과 폐막식이 열린 곳에서는 스탠드 구조물은 철거되었고 대회 참가국들의 국기만 게양되어 있다.
그런데 이곳에 여러 날 머물면서 부근 일대를 돌아보니까 각 장소마다 어떤 공통점이 확연히 느껴졌다.
o 용평 리조트에는 국내 최장(3,710m)의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어서 발밑의 스키장과 저 멀리 동해안을 바라다 보며 고도가 오르내리는 곤돌라를 타고 해발 1,458m의 발왕산까지 20여분이면 올라갈 수 있다. 산 위에 올라가면 4층 건물의 바깥으로 투명한 유리바닥의 스카이워크가 설치되어 있다. 우리가 올라갔을 때는 사위가 짙은 안개구름으로 뒤덮여 있어 전혀 고소공포를 느낄 계제가 아니었다.
o 용평 리조트는 1975년 쌍용그룹의 최석원 회장이 경영수업을 받을 당시 아직 스키가 보급되지 않았음에도 국내 최초의 선진국형 스키장을 건설하고 스키 리조트 단지로 개발했다. 2006년 쌍용그룹이 해체된 후에는 통일교재단(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유지재단)에서 인수[1]하여 2018년 평창올림픽과 패럴림픽 알파인 스키 종목을 개최하였다.
o 봉평 흥정계곡의 허브나라 농원은 삼성전자 수원공장에 다니던 이두호 엔지니어가 귀농을 결심하고 1993년부터 각종 허브를 재배하는 농원을 일궜다.[2]
10년만에 와보니까 옛날 허브농원 자리는 널찍한 주차장으로 바뀌었고 철제다리로 계곡을 건너가니 대규모 유리온실과 아기자기한 장식을 한 여러 가지 주제의 허브 전시관이 방문객들을 맞고 있었다.
허브나라 상단으로 가자 흥정계곡 물에 발을 담그고 노는 어린이들, 반려견을 데리고 온 방문객들이 쉬고 있었다.
우리도 솔바람을 쐬면서 전주 완산동 같은 동네 사람이 강원도에 귀촌을 하여 20~30년만에 큰 왕국을 이루었구나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봉평 허브나라의 새로운 특색은 기프트숍 2층에 허브 박물관과 역사관이 차려져 있다는 점이었다.
허브에 관한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는데 학생들이나 단체 방문객이 요청하면 가이드가 해설도 해주는 모양이었다.
o 오대산 입구(대관령면 병내리)의 한국자생식물원은 한국의 특산식물, 멸종위기식물, 희귀식물을 포함한 자생식물 1500여종을 수집해 연구ㆍ증식하는 한편 1999년부터는 일반에 공개하여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그 모습을 직접 보고 즐기게 하고 있다. 평생 자생식물의 연구ㆍ보존에 매달려 온 김창열(73) 회장은 2021년 7월 식물원을 국가에 기부함으로써 산림청 산하의 한국수목원 정원관리원에서 국립 자생식물원을 위탁ㆍ관리하게 된다.
오대산 한국자생식물원 입구에는 서가 가득 식물과 관련된 책들이 꽂혀 있고 널찍한 테이블이 있어서 식물에 관한 본격적인 조사연구가 가능할 듯 싶었다. 책 읽는 식물원이라고 '북카페 비안'이라는 이름도 붙어 있었다.
이러한 설립자의 의도는 유리온실 밖으로 나와 보니 점차 분명해졌다.[3]
구역별로 희귀자생식물 보전원, 멸종위기식물 보전원이 조성되어 있었고 다니는 길의 포석 색깔로도 식별할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널찍한 잔디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상단에 소녀상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사죄하는 남자의 조각상이 있었다. 이곳은 '영원한 속죄 조각공원'으로 개인(설립자) 소유물이므로 누구도 함부로 손댈 수 없다는 경고판도 붙어 있었다.
그리고 설립자는 마라톤 매니아로서 100회 이상의 완주 기록을 보유하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 선생의 친필 방문기와 기념식수를 둘러보고 못난이 3형제의 배웅을 받으며 주마간산 격이었지만 자생식물원 견학을 마쳤다.
다시 유리온실 안으로 들어왔을 때 테이블 위에 놓인 식물의 묘목과 산새들을 위한 새집, 원목으로 마감처리된 화장실 등이 자생식물원 설립자의 집념어린 모습을 웅변으로 말해주는 것 같았다.
o 봉평에 있는 이효석문학관은 그의 생가 부근에 건립되어 그 일대의 메밀밭을 배경으로 구경도 하고 맛도 보는 '메밀꽃 필 무렵 효석문화마을'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o 해마다 여름철이면 평창 알펜시아 콘서트홀에서는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음악가들을 초치하여 대관령 음악제가 개최되고 있다.
o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IC로 나오자마자 왼편의 주유소 옆에 아주 이색적인 김치찌개 음식점이 있다. 토굴에서 2년간 숙성시킨 묵은지를 사용하며 반찬은 전주 콩나물무침 한 가지뿐이고 주류는 레드와인 또는 화이트와인을 추천해준다.
이 음식점에서 내놓는 한 가지 메뉴 김치찌개를 허투루 볼 게 아니었다.
토굴에서 2년간 숙성시킨 묵은지의 깊은 맛도 그렇지만 원형 테이블에 키 높은 의자에 앉도록 한 것, 그리고 밥 위에 삶은 감자를 한두 알 올려 놓는 것이 식당 주인장의 소신과 신념을 말해주는 듯 했다. 더욱이 우리 다음으로 들어오는 손님에 대해서는 오늘 준비한 식재료가 떨어졌으니 한참을 기다리시든가 다음에 오시라고 들어오는 손님을 돌려보냈다.
o 대관령면 횡계리에 있는 삼교리 동치미막국수집에서는 살얼음이 껴있는 동치미와 함께 막국수를 내놓는데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많이 넣으면 물막국수, 적게 넣고 양념장을 넣으면 비빔막국수가 된다. 감자 옹심이도 아주 별미였다.
o 강원도에서는 황태가 기본 식재료의 하나이지만 올림픽 기념공원 부근의 황태식당은 버스 여러 대의 손님도 한꺼번에 맞을 수 있는 대형식당이다. 입구에는 사장님의 개성을 엿볼 수 있는 여러 사진, 특히 '권효가(勸孝歌)' 액자가 걸려 있다.
o 대관령 자연애 숯불고기 식당에서 내놓은 유기농 야채와 광릉 숯불고기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가을에 단풍구경하러 평창 갔을 때 눈마을로 상가 2층에서 발견한 음식점이었는데 주된 메뉴는 광릉 숯불고기와 메밀막국수, 평양냉면이었다. 그런데 반찬으로 내놓은 야채 맛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집에서 장기간 숙성시킨 효소로 버무린 것이어서 대량으로 인공조미료를 가미해서 만든 여느 음식점의 샐러드 소스와는 맛뿐만 아니라 질부터 달랐기 때문이다. 이 집 주인의 고집으로 기름을 두르지 않고 구운 메밀전병에 석쇠 숯불불고기와 효소 소스를 버무린 야채를 쌈싸먹는 맛이 일품이었다. 식구들끼리 나눠먹은 막국수도 뒷맛이 고소하면서도 개운했다.
평창에 와서 소문난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만 해도 여러 날이 걸릴 것 같다.
o 오대산 월정사 초입에 있는 '달콤한 게으름'이란 옥호를 가진 파스타 전문점은 주로 브런치 메뉴를 내놓고 있었다. 방역수칙상 테이블을 띠엄띠엄 놓은 데다, 음식의 맛과 퀄리티에 자부심을 가져서인지 예약 손님이 아니면 잘 받지 않았다.
평창에 머무는 동안 이곳저곳 다녀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강원도 평창이 3수를 해가며 동계올림픽을 유치했던 것처럼 주위의 냉소와 반대를 무릅쓰고 오직 외골수로 집념을 불사른 결과 지금은 연중 수많은 관광객, 이용자들이 몰려들고 다른 곳에서도 본따 할 만큼 모범적인 사업모델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평창에 들어오면 "HappY700평창"이라는 슬로건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바로 평균 해발고도 700m에 위치해 있는 평창은 인체에 적합한 기압과 기온분포를 보이며 고랭지 채소나 희귀식물 재배, 건강관리ㆍ휴양ㆍ레포츠 활동을 하며 행복을 추구하기에 적합하다는 뜻일 것이다.
위에서 소개한 여러 시설ㆍ기관ㆍ업소에서 입증한 바와 같이 이곳에서 살 때에는 뭔가 집념을 갖고 꾸준히 노력하면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명당(明堂)인 것처럼 여겨졌다.
평창 지형엔 외골수로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4]
There's something special
in Pyeongchang's terrain
which makes a man single-minded.
Note
1] '통일교' 하면 우리 세대만 해도 전세계인을 대상으로 문선명 교주가 대규모로 집전한 합동결혼식과 박정희 정권 말기 (1977) 미 하원의 Korea Gate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통일교를 대표해 박보희 씨가 열변을 토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한동안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로 일컬어지다가 1996년부터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Family Federation for World Peace and Unification)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2012년 문선명 총재 별세 후에는 통일교, 하늘부모님성회(본부가 가평군 설악면에 소재) 등 여러 가지로 불리고 있는데 여러 자녀가 종교, 교육기관, 언론사, NGO, 기업 등을 나누어 맡고 있어 외부 사람은 자세히 알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도 각처의 종교시설과 부동산 외에도 교육기관(선화예술학교, 청심학원, 선문대학교 등), 언론사(세계일보, 미국의 Washington Times 등), 기업(일화, 일신석재, 한국티타늄, 용평리조트, 북한의 평화자동차 등)을 두고 있어 국내의 신자수는 그리 많지 않으나 경제력은 실로 막강하다. 교수사회에서도 '평화통일', '원리연구' 같은 주제를 선호하고 두둑한 연구비를 주는 스폰서는 통일교재단과 연관이 있다는 조크가 나돌 정도였다.
2] 봉평의 흥정계곡에 허브나라농원을 만든 이호순ㆍ이두이 부부는 똑같이 전주 출신에 서울대 동문이다. 나로서도 나이 차는 있지만 전주 완산칠봉 아래 골목길 끝집에 살았던 공부 잘하는 동네 형으로 알고 있었다. 언론에 소개되기 시작할 때부터 허브나라를 찾아다녔기 때문에 그 발전과정을 잘 알고 있다. 지금도 농원 안쪽에 살면서 허브농원 운영은 서울미대를 나온 따님 이지인 씨에게 맡겼다고 한다. 허브농원이 전국 곳곳에 생겼지만 봉평 허브나라농원의 성공비결이라면 이효석 기념관과 가까이 있어 매스콤을 많이 탄 것, 국내는 물론 해외의 허브도 학구적으로 연구하고 소개한 점, 국내외 식물원의 성공사례를 벤치마킹하고 여가와 여행을 즐기는 시류와 맞아 떨어진 점(코로나 시대에는 허브를 이용한 장아찌 같은 반찬류 통신판매에 진출)을 들고 있다.
3] 2021년 7월 7일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에 있는 한국자생식물원에서 기부협약식이 열렸다. 김창열(73) 한국자생식물원장은 평생 일궈온 식물원의 토지 10㏊(3만여평)와 건물 5개동, 자생식물 1356종 등을 산림청에 기부했다. 한국자생식물원은 2002년 산림청으로부터 ‘사립식물원 1호’로 지정된,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대 자생식물원이다. 이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면 202억원에 이른다. 한겨레신문, "‘100년 식물원’ 산림청 약속 믿고 국민 품으로 보냅니다", 2021. 7. 8.
김창열 원장이 한국의 자생식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설악산에서만 자생하는 한국특산식물 ‘솜다리’ 덕분이었다. ‘한국의 에델바이스’로도 불리는 솜다리는 불법남획으로 개체 수가 급감하여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 원장은 1983년 경기도 남양주 마석에서 솜다리 재배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희귀식물을 키우는 일이 순탄치 만은 않아 해발 700m 이상의 고지대를 찾아 평창군 진부면으로 터전을 옮겨야 했다. 솜다리에서 시작한 ‘초보 원예농’의 관심은 어느덧 벌개미취와 분홍바늘꽃 등 다른 자생식물로 확장됐고, 점차 ‘식물원을 만들어 외래종과 원예종이 범람하는 시대에 우리 고유의 꽃과 나무의 아름다움을 알려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좀 더 넓은 공간을 찾아 인근 대관령면으로 터를 옮겨 1989년부터 본격적으로 식물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999년 한국자생식물원을 개원해 일반에 공개하기에 이른 것이다. 2012년 전기누전으로 식물원에 화재가 나 장기간 문을 닫았다가 마라톤을 100회 완주한 끈기와 집념으로 2020년 북카페 비안과 함께 한국자생식물원을 다시 열었다.
4] 필자가 잠시 평창에 체류한 것만 가지고 용평리조트, 발왕산 케이블카, 봉평 허브나라농원, 한국자생식물원, 대관령음악제 등을 성공적으로 일궈낸 분들의 특장을 '외골수 집념'이라고 재단할 수는 없다. 본인들에게는 무례한 평가일 수도 있으니까. 단지 미국 드라마 Queen's Gambit에서 언급되었던 아포페니아(Apophenia)의 의미를 떠올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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