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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여행지에서 웬지 적대감이 느껴질 때

Onepark 2021. 10. 25. 23:00

자신감을 읽으면 온 세상이 날 적대시한다.
If I have lost confidence in myself,
I have the universe against me!

- Ralph Waldo Emerson

 

여러 나라를 여행할 때 간혹 여행지 사람들이 나에게 적대적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나 역시 벼르고 별러서 프랑스를 여행할 때였다. 마침 파리 시내에서 테러가 발생해 기차역의 물품보관함이 폐쇄되는 바람에 무거운 여행짐을 어디 맡겨놓을 데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짐을 메고 끌고 다니며 개선문과 에펠탑을 구경해야 했다.

그리고 몽마르트르 언덕을 올라가 하얀 돔의 사크레쾨르 성당 (Sacre-Coeur Basilica in Montmartre, 성심교회)를 찾아갔다. 본당 안으로 들어가자 일순간 적막이 흐르고 전면 제단 위의 천장에 낯익은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예수님이 팔을 벌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의자에 앉자마자 가슴이 북바쳐 오르며 눈물이 흘러나왔다. 

 

* 파리 시내 어디서나 보이는 몽마르트르 언덕 위의 사크라쾨르 성당 건물

그 후 암스테르담 대 유학시절에도 독일 베를린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베를린의 유명한 축제기간이라서 도시 전체가 사람들로 붐비고 혼잡해 여행자에게 친절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도심의 쿠담 거리에는 폭격으로 반파가 된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가 있었다. 그 옆 예배당에 들어갔을 때 파란 유리 모자이크를 배경으로 전면에 금빛 찬란한 예수 조각상이 나를 맞아주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처럼 팔을 벌리고 죄짐 많은 우리 인간들을 위로하시면서 하늘로 오르시는 모습이었다. 

 

* 베를린 빌헬름 황제 기념교회 신관의 파란 색유리 모자이크를 배경으로 승천하는 예수 그리스도 상

알고보니 두 곳 모두 많은 내력(behind story)을 안고 있고 또한 공통점도 있었다.

우선 파리의 성당은 1870년 보불전쟁에 패배한 프랑스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 패전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몽마르트르 언덕 위에 세웠다. 바로 프러시아의 빌헬름 황제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격돌한 전쟁이었다. 교회는 로마식 건물 양식인 바실리카 구조를 취하면서 인도 타지마할 비슷한 비잔틴 양식의 아름다운 돔을 갖추고 있어 프랑스 국민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반면 베를린의 교회는 보불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1871년 베르사이유 거울의 방에서 프러시아 제국을 선포한 빌헬름 황제가 1888년 서거하자 그 손자인 빌헬름 2세[1]가 세운 교회였다. 빌헬름 카이저의 위대함을 상징하듯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첨탑을 아주 높게 지어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다. 이 상징적인 건물은 2차대전 연합군의 폭격으로 반파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복원하지 않고 독일제국이 저지른 잘못[2]을 고백하듯이 그대로 남겨 놓았고 그 옆에 현대식 교회건물을 새로 지었다.[3]

 

두 교회 건물의 공통점이라면 둘 다 전쟁에 지고 사기가 땅에 떨어진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건축하였고, 예배당의 상징인 예수 상이 십자가 비슷하게 팔을 벌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덕분에 국내외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 독일제국의 기념교회 답게 부조에는 앉아 있는 근엄한 황제 옆에 아들과 손자 황제가 시립해 있다.
*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의 고전식 건물(박물관)과 현대식 건물(예배당)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낯선 곳에서 현지인들에게 느껴지는 적대감 아니 나 자신의 의기소침 내지 당황스러움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제일 좋은 방법은 뜻이 맞는 친구나 가족과 함께, 여유가 있으면 여행 가이드와 같이 다니는 것이다. 이국적이면서도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사 먹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전에 보았던 영화 속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힐빌리의 노래(Hillbilly Elegy)"에서 켄터키 산골출신 주인공은 세련된 분위기의 테이블에 앉아서 좌우의 물컵과 와인잔을 구별하지 못해 당황스러워 한다.  이라크 전에도 참전했던 해병대원이자 예일대 로스쿨 학생임에도 시골뜨기인 그는 잘나가는 법조인 선배들 앞에서 주눅이 들고 만 것이다. 그때 여친에게 전화를 하여 도움을 청한다. 또 집안일로 말미암아 인생의 고비에 처하여 밤새 자동차를 운전하고 갈 때에도 여친과 마음 터놓고 대화를 나눈 끝에 자신삼을 회복한다.  

 

아니 당장 전화를 걸어 불러낼 수 없는 친구가 없어도 좋다.

기독교인이라면 다음과 같은 찬송(369장의 일부)은 언제든지 목청껏 부를 수 있으니까.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 드려 아뢰세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 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 드리세

 

Note

1] 빌헬름 2세(Kaizer Wilhelm II)는 1859년 프리드리히 3세와 영국 빅토리와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공주사이에서 태어났다. 빅토리아 공주는 아들의 장애가 있는 팔을 고쳐주고자 애쓰는 한편 어린 빌헬름에게 친정 아버지 앨버트 공의 자유주의 사상을 가르쳤다. 빌헬름이 자라면서 할아버지 빌헬름 1세는 그를 모친의 자유주의 사상으로부터 떼어 놓기 위해 빌헬름을 군에 입대시켰다. 빌헬름은 군대를 매우 좋아했고 그의 성격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오직 할아버지만 좋아했다. 1876년 17세가 되던 해에 영국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외손자인 빌헬름 2세에게 생일선물로 아프리카의 최고봉 킬리만자로 산을 선물하기도 했다.

1888년 빌헬름 1세가 91세 나이로 사거하자 프리드리히 3세가 56세에 제위에 올랐으나 후두암으로 99일만에 사망하고, 29세의 혈기 왕성한 빌헬름 2세가 즉위하였다. 평화주의자로서 전쟁과 폭력에 반대한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사사건건 신임황제와 충돌한 끝에 결국 1890년에 사직하였다. 비스마르크는 물러나면서 "이런 식으로 가면 내가 떠나고 15년 후엔 파멸이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1차 세계대전 중 빌헬름 2세는 명목상의 군 통수권자였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힌덴부르크 등 군수뇌부에게 맡겨졌다. 미국의 참전으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독일 각지에서 반전시위와 킬 군항의 수병 반란이 일어났다. 마침내 1918년 11월 막시밀리안 수상이 황제의 퇴위 선언을 함에 따라 네덜란드로 망명하여 1941년 영욕의 생을 마쳤다.

 

2] 독일제국 엄밀히 말해서 빌헬름 2세의 잘못은 나라를 군국주의로 통치한 결과 이웃나라들과의 문제를 전쟁으로 해결하려 든 점이었다. 전임 재상 비스마르크의 능수능란한 외교술과는 사뭇 달랐다. 급기야 독일은 러시아가 독일과 전쟁을 벌이지 못하게끔 스위스에 망명 중이던 레닌을 열차에 태워 러시아로 보내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당시 레닌은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탈출한 스탈린과 손을 잡고 독일에서 받은 1천만불로 무기를 구입해 무장봉기를 일으키게 조종했던 것이다.

1차대전 당시 서부전선이 지루한 참호전으로 교착상태에 빠지자 독일군은 오로지 전쟁에 이기기 위해 연합군 진지를 향해 독가스를 살포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그리고 독일이 패전한 후에는 전쟁배상금을 놓고 국론이 분열되어 히틀러가 집권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렇기에 독일 국민들은 '인류역사 앞에 석고대죄'하듯이 베를린 시내 번화가 한 복판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를 전쟁으로 파괴된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3] 게르만적인 구교회 옆에 1945년 새로 지은 신교회 건물은 독일 건축가 에곤 아이어만(Egon Eiermann)과 프랑스의 유리예술가 가브리엘 루아르(Gabriel Loire)가 두 나라 화합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2만 장의 유리를 사방에 모자이크처럼 두르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형태로 팔을 벌리고 부활 승천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교회는 전체적으로 다각형의 모양이며 교회 안과 밖의 바닥 타일도 비슷한 모양으로 세세한 것까지 신경 써 만들었다고 한다. brunch 독일문화여행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