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 People

Travel

[프랑스 5] 카르카손의 콩탈성, 아를과 반고흐

Onepark 2023. 5. 2. 21:10

패키지 투어의 중반에 도달했다. 일행 중에는 가정주부가 숫적으로 압도적이었으므로 인솔자 길벗에게 생필품을 살 수 있는 수퍼마켓에 데려가 달라고들 아우성이었다. 프랑스에는 카르푸, 오샹 같은 수퍼체인이 많다. 혼자 온 나로선 관심 밖이었지만 어젯밤 호텔 체크인 후 몇 사람은 가까운 수퍼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서울에선 생각할 수도 없는 새벽(현재 서머타임 실시 중) 6시 반에 호텔의 널찍한 다이닝 홀에서 동남아에서 온 여러 단체 투숙객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그리고 정확히 8시 20분에 버스는 반고흐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아를[1]을 향해 출발했다.

인솔자는 우리가 가는 길이 멀지만 도중에 카르카손(Carcassonne)에 들를 예정이라고 했다. 일단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는데 콩탈 성 공방전에서 유래한 카술레 요리를 먹고 중세의 성채를 구경한다고 말했다. 아를에서는 반고흐의 발자취를 따라가 볼 예정이며 로마 시대에 건설된 대극장과 원형경기장이 잘 보존되어 있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점에서 서로 연관이 있다고 설명했다.

 

* 우리 일행이 카술레 식사를 한 성 안의 전통 식당
* 돼지고기와 콩, 채소를 질그릇에 담아 뭉근한 불로 끓여서 먹는 카술레 요리
* 이베리아 반도에서 올라온 무슬림들이 기독교 군대와 장기 농성전을 벌였던 콩탈성 입구. 카르카스 왕비의 석상이 서 있다.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비좁은 성채 안을 이리저리 다녔지만 나의 관점에서 콩탈 성 (Château Comtal)은 특별한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 이유는:

- 무슬림 군대의 장기 농성전과 콩을 먹인 돼지를 성밖으로 내던져 전세를 전환시켰다는 것은 스페인 알함브라 궁전의 비사(悲史)에 비하면 덜 센티멘털하다. 무슬림은 돼지고기를 먹질 않는데 성안에 아직 먹을 것이 풍부하다고 판단한 것은 성을 포위하고 있던 기독교 군대가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중세의 도시나 성벽을 재현해 놓은 유적지는 유럽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독일의 로텐부르크 민속촌은 중세시대의 라이프스타일을 직접 체험해 볼 수도 있다.

- 귀중한 유물을 발굴했다는 것도 진짜 유물은 박물관으로 모두 옮겨놓았다.

- 다만, 군사적인 견지에서는 이중으로 성벽을 구축한 요새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느 일행이 코멘트한 바와 같이 우리에게는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물리친 것이 더 대단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이드의 설명을 들어보니 이 성벽이 철거의 위기에 처했다가 어느 역사학자(Jean Pierre Cros-Mayrevieille, 1810~1976)가 앞장서서 지역주민과 힘을 합쳐 복원 사업을 벌였다고 한다. 그 결과 19세기 말에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1997년 UNESCO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은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되었다.

어느 것보다도 역사적인 팩트가 가미되어 콩과 돼지고기를 질그릇에 담아 뭉근한 불로 푹 끓여서 먹는 향토음식이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거나, 여러 차례의 전쟁을 겪고도 잘 보존되어 있는 교회의 스테인드 글래스는 우리 같은 관광객들의 찬탄을 자아내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전쟁으로 인한 파괴를 면하기 위해 성도인 주민들이 미리 분담하여 스테인드 글래스를 떼어다가 집에서 안전하게 보관하였다니 말이다.  

 

* 콩탈 성의 복원에 크게 기여한 Jean Pierre Cros-Mayrevieille의 흉상
* 성 안의 극장은 음향효과가 좋아서 지금도 공연무대로 이용되고 있다.

 

우리 일행이 카르카손 성채 방문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아를로 향할 즈음 오토바이에 탄 사람들도 출발했다.

프랑스 고속도로에서는 오토바이도 달릴 수 있다. 그러자 불현듯 35년 전 마르세이유에서 렌트카를 하고 액상프로방스로 가다가 겪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오토바이 탄 괴한들이 폭력을 써서 조수석의 아내로부터 여행백을 강탈했음에도 나는 꿋꿋하게 아비뇽까지 관광을 마쳤던 것이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용케도 외국 관광지에서 서바이벌 했던 게 천만다행으로 여겨졌다.

 

아를에서 빈센트 반고흐(1853~1890) 역시 여러 가지로 곤욕을 치렀다.

처음 출발은 그가 흥분할 만했다. 증권거래소 일을 그만두고 화가로 전직한 고갱(1848~1903)은 자신의 그림을 알아주고 팔아줄 화상을 찾고 있었는데 빈센트 반고흐의 동생 테오가 '화가 공동체'를 꿈꾸는 형과 다리를 놓아주었다. 테오는 파리에 있는 구필 화랑의 실력있는 직원이었기에 마침 돈이 떨어진 고갱은 테오가 일러준 대로 아를에 있는 빈센트를 찾아갔던 것이다.

아를의 '노란집'(Yellow House)에서 고갱의 도착을 기다리던 빈센트 반고흐는 마음먹은 대로 고갱과 여러 가지 작품활동을 공동으로 수행하였다.  두 사람은 캔버스를 나란히 놓고 공통의 주제와 대상을 그렸다. 카페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압상트 술도 마시면서 토론을 벌였을 것이다. 이들이 9주간 63일을 동거하면서 그린 그림은 아를의 정원(공동묘지), 동네 여인들, 카페 주인(지누 부인), 옆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동료 화가의 모습 등 각기 수십 점에 달했다.

 

그러나 결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림 그리는 스타일, 소재와 착상 등이 크게 달랐기에 빈센트는 고갱과 언쟁을 벌이다 흥분한 나머지 면도칼로 자기 귀를 잘랐다. 크게 고성도 오갔을 것이다. 고갱은 황급히 아를을 떠나고 반고흐는 정신병원에 자진해서 들어갔다.

 

* 반고흐가 고갱과 크게 다툰 후 자진 입소했던 아를의 정신병원 입구. 현재는 상가건물로 사용 중
* 반고흐가 입원했던 병원 건물이 용도는 바뀌었지만 당시의 모습 그대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반고흐는 정신병원 의사와 신부로부터 흥분을 진정시키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는 진단과 처방을 받았다.

그러나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아 이곳에서도 그림을 여러 점 남겼으며, 반고흐가 그림을 그렸던 장소에서 사진을 찍는 게 관광객들의 인증샷처럼 되고 말았다.

노란 채색의 포름 광장의 밤의 테라스로 유명한 카페를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때는 반고흐를 내쫓지 못해 안달이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180도 달라졌다. 곳곳에 반고흐와 관련된 장소를 'Vincent van Gogh trail'이라 표시해 놓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보도록 안내하고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기회를 갖진 못했지만 내가 만일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을 수 있었다면 다음과 같은 Q&A 식으로 진행했을 것이다.

 

① 과연 빈센트 반고흐는 자살을 했나?

  A :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자살은 결코 아니었다. 들판에 그림 그리러 간 그가 권총을 소지한 적도 없고, 자살을 하려는 사람이 급소를 빗맞힐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당시 마을의 불량 청소년들이 그를 혼내주려고 집에 있는 권총을 겨누다가 오발 사고를 낸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빈센트 역시 형편이 어려운 동생 테오에게 더 이상 짐이 되기 싫어 삶의 의욕을 포기했을 가능성이 크다.

 

② 그는 왜 일본 풍속화(우키요에)를 많이 그렸는가?

  A : 일본에서 유럽에 수출하는 도자기의 완충제로 당시 유행하던 우키요에 종이 인쇄물을 포장지로 썼는데 이것이 시중에 대량으로 유출되었다. 색채에 관심이 많은 인상파 화가들이 일본의 우키요에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암스테르담의 반고흐 미술관에도 빈센트가 우키요에를 모작한 그림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③ 유럽에서 그의 서간집이 먼저 알려진 이유는? 그를 세상에 알린 일등공신은?

  A : 테오의 아내 요한나 봉허(Johanna van Gogh-Bonger, 1862-1925)는 전직 영어 교사였다. 형과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던 테오 역시 그녀를 편지로 감동시켰다고 한다. 형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남편 테오가 세상을 떠난 뒤 요한나 봉허는 시숙의 안 팔린 그림은 물론 형제가 주고받은 편지를 모두 수습하여 그 감동적인 편지 내용을 서간집으로 출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상주의 그림은 인기가 없었는데 빈센트가 그림을 그리게 된 연유를 소상히 밝힌 편지글을 읽은 독자들이 그의 그림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반고흐 미술관 로비에도 빈센트-테오 서간집이 전시되어 있다.

신혼 초에 시숙과 남편을 거의 동시에 잃은 요한나 봉허는 그녀의 일생을 테오가 그렇게 사랑하고 안타까워 했던 빈센트 반고흐의 그림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 바쳤다. 큰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은 외아들 빈센트에게 탄생 선물로 받은 '아몬드 꽃' 그림을 보여주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준 큰아버지의 저 그림을 우리끼리만 보고 끝내지는 말자."

 

④ 그의 작품은 누가 많이 소장하고 있나?

  A : 빈센트는 자기 그림이 팔리지는 않아도 생활비와 화구, 물감을 보내주는 테오에게 뭔가 도움을 주고 싶어 그의 그림을 모두 테오에게 보냈다. 빈센트의 그림은 '아를의 붉은 포도밭' 한 점 외에는 모두 테오의 유가족의 소유였으나 요한나 봉허는 빈센트의 그림 전시회를 열면서 그림 홍보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몇 점은 유력 인사들에게 판매했다. 독일의 부호 크뢸러-뮐러는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반고흐의 그림을 모두 팔라고 제안했으나 '밤의 카페 테라스' 등 몇 점만 넘겨받았을 뿐이다. 그 대신 테오의 유가족은 재단을 설립하고 반고흐 전용 미술관을 지어주기로 한 네덜란드 정부에 불우했던 화가의 그림과 편지 등을 모두 영구 임대했다.

 

⑤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영화감독은?

  A : 누구보다도 일본의 쿠로사와 아키라(黑澤明, 1910~1998) 감독이 그를 흠모했다. 쿠로사와 감독의 마지막 작품 <Dreams>(1990)를 보면 그가 화가 지망생이었던 20대에 아를의 들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반고흐(마틴 스코르세지 감독이 빈센트로 분장)를 찾아가고 그의 그림 속을 걷다가 '까마귀떼가 나는 밀밭'을 목격한다는 식으로 묘사했다. 반고흐의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아주 괴기스럽고 난해한 그림을 쿠로사와 감독처럼 이렇게 단순 명료하게 설명한 것을 본 적이 없다.

 

* 3세기 로마 군대가 주둔하였을 때 건설한 원형경기장이 큰 손상없이 보존되어 있었다.
* 반고흐는 당시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칼로 찌르기 아닌 리본 떼기 투우' 경기를 관람하는 관중을 그렸다.
* 아비뇽 교황 때나 반고흐 생전이나 지금도 유유히 흐르는 론 강

 

이러한 점에서 인솔자가 차내 TV스크린에 틀어준 애니메이션 DVD <Loving Vincent>(2017)[2]의 스토리텔링은 영 못마땅했다. 너무나 작위적이고 허구(fiction)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반고흐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노란 자켓의 젊은이가 이곳저곳 찾아다니면서 그의 사인(死因)을 추적 규명한다고? 유감스럽게도 그럴 가능성은 전무(全無)했다. 

그 당시 빈센트 반고흐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진정으로 애도한 사람은 동생 테오 한 사람 뿐이었다. 아를의 주민들은 반고흐가 사고를 치고 정신병원에 입원한 다음 그를 미치광이로 치부했으며, 그가 퇴원한 뒤에는 노란집을 폐쇄하는 등 그를 쫓아낼 궁리만 했다.

보다 못한 테오가 형을 파리 근교의 오베르쉬르와즈(Auvers-sur-Oise)로 옮겨 그림을 계속 그리도록 했다. 하지만 아를에서의 반고흐의 행적을 알고 있는 현지 주민들은, 예술가들과 친했던 가세 의사를 제외하고는 그를 위험인물로 취급했다. 그러니 그가 권총자살한 것으로 믿고 이를 당연히 여기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 아를 시내 곳곳에 표시되어 있는 Vincent van Gogh trail 마크

 

적의로 가득한 주민들 사이에 설 자리 없네
그래도 밝은 빛의 희망으로 감싸준 빈센트

Against van Gogh,
Arles was filled with hostility in the neighborhood.
But Vincent embraced the people of town
with bright-colored touches of hope.

 

* 한 밤중에 모자에 촛불을 세워놓고 반고흐는 론 강 위에 떠 있는 북두칠성을 화폭에 담았다. 가운데는 리버크루즈선.

 

이래저래 우리 일행은 그 옛날 반고흐의 처지를 걱정한 나머지 '생각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아를의 로댕 호텔에 투숙하였다.

 

 

Note

1] '아를(Arles)'이라 하면 못 알아들어도 비제의 관현악 조곡 "아를의 여인"에 나오는 미뉴엣이나 파란돌 곡조를 들려주면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많을 것이다. 본래 알퐁스 도데의 희곡을 연극으로 상연할 때 삽입되었던 음악들이다. 그리고 반고흐가 그린 "아를의 도개교", "아를의 여인" 그림도 유명하다. 쿠로사와 감독의 자전적 옴니버스 영화 <Dreams(夢)>에서도 제3화 까마귀(Crows)의 첫 장면에 물론 세트이지만 아를의 도개교 아래서 빨래하는 아를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2] 영화 <Loving Vincent>는 세계 최초 유화 애니메이션이다. 빈센트 반고흐의 미스터리한 죽음을 모티브로 하여 기획부터 완성까지 총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오디션을 거친 107명의 아티스트들이 그린 62,450점의 유화 프레임을 사용해 만들어 화제를 모았다. 영화는 반고흐가 세상을 떠나고 1년 뒤 그와 친했던 아를의 우편배달부 요셉 룰랭이 그가 배달하지 못한 편지를 아들 아르망에게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반고흐의 작품 130여 점이 이 영화에 녹아들어 유화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였다. Loving Vincent 제목은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쓸 때 마지막 결구로 쓴 '사랑하는 빈센트로부터'에서 따온 것이다.

 

*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 맨 왼쪽이 반고흐 형제의 편지를 나르던 아를의 우편배달부 요셉 룰랭

 

4. 생테밀리옹 와이너리, 보르도

6. 아비뇽과 액상프로방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