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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3] 루아르의 앙부아즈와 쉬농소 성

Onepark 2023. 5. 2. 20:50

이번 프랑스 여행은 날짜 별로 주제가 선명해서 좋았다.

첫째 날 찾아간 곳이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명승지라면 오늘은 역사를 품고 있는 고성(古城)들을 돌아볼 차례였다.

 

나도 출발시간에 맞춰 버스를 타러 나갔으나 긴 줄의 꽁무니에 서야 했기에 맨 뒷자리에 앉는 수밖에 없었다. 일행 중 다수를 점하는 나이 든 여성 승객들이 30분 전부터 나와 줄을 서서 앞 자리를 선점한 까닭이었다. 가이드가 한 마디 쓴소리를 했다.

앞으로 여러 날 남았는데 차멀미 방지, 사진촬영 등 필요에 따라 앞자리에 앉아야  할 분도 있으므로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가이드나 버스 기사보다 먼저 나와 계시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공평한 대우를 위해 자기가 강제로 좌석배정을 하는 일이 없도록 자율적으로 서로 양보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나도 여행 블로거로서 전방(前方) 사진을 찍어야 하므로 앞자리를 원한다고 밝혔다. 장거리 여행 중의 전방 사진은 도로상황을 파악하기에도 좋지만 이정표와 함께 찍어놓으면 몇 시 몇 분에 어느 지점을 통과했는지 추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고속도로 연변의 유채꽃밭은 보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식용 및 카놀라유의 원료, 바이오 연료의 원천이 되고 있다.

 

프랑스 중서부 루아르 지방(the Loire Valley between Sully-sur-Loire and Chalonnes)은 천혜의 자연 덕분에 예로부터 '프랑스의 정원'이라 불리던 지역이다. 프랑스에서 가장 긴 루아르강 주위로 숲이 우거진 언덕과 풍요로운 들판 등 천혜의 자연조건으로 투르, 앙제, 블루아, 오를레앙 등 유서 깊은 도시들이 강을 따라 자리하고 있다.

당시 프랑스 왕들은 한 곳에 오래 거주하기 보다 봉건제후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민정을 살피기 위해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그래서 이 지역은 왕족과 귀족들의 거주지나 휴양지로 각광을 받아 수많은 성들이 건축되었다. 2000년 UNESCO가 이 지역의 80여 개 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바 있다. 건축학적으로는 이태리 르네상스 양식이 프랑스 건축에 도입된 것으로 외관 및 구조가 아주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클로 뤼세는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였는데 이처럼 밖을 내다보는 여인의 초상을 내걸어 호기심을 자극했다.
* 정원에는 각종 수목과 화초, 다빈치가 고안한 기계장치의 모형 등을 아주 어울리게 배치해 놓았다.
* 클로 뤼세 성 안의 레스토랑에서는 종업원들이 중세 때의 복장으로 손님을 맞이했다.
* 포도주와 함께 파스텔 톤의 접시에 전식(前食)을 내놓아 우리 일행은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 메인 요리는 연어 살과 두부, 양파, 제철 채소를 소스로 버무려 면병으로 싸고 꼬쟁이로 묶은 만두 비슷한 음식이었다.
* 하트 모양의 담쟁이 넝쿨도 사진촬영의 포인트가 되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흉상
* 다빈치의 대표작 모나리자(복사본)에 대해 설명하는 자원봉사 해설자

 

그 중 첫 번째는 15~16세기 프랑스 왕족이 거주했던 앙부아즈성(Chateau Royal d'Amboise)이지만 우리 일행은 정원도 구경하고 점심을 먹기 위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았던 클로 뤼세(Clos Lucé) 성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이탈리아 원정에 나선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에 감명을 받고 노년의 다빈치를 초청하여 자기의 왕성 가까이에 모셨다.[1] 프랑수아 왕은 마그리트 공주와 함께 지하통로를 이용해 다빈치를 만나러 와서 담소를 나누었다고 한다. 다빈치는 미완성의 모나리자 그림도 들고 왔는데 완성 후 그림을 그의 제자에게 주어 이 명화가 프랑스에 남게 된 것이다.

그 결과 프랑스 정부는 넓은 성 안에 다빈치 공원을 조성하여 우리 같은 관광객 포함 후세 사람들이 다빈치의 창의성과 과학정신을 본받도록 하고 있었다. 다빈치 말년(1516~1519)의 고작 3년간이었음에도 그가 태어난 이태리 토스카나 지방보다도 더 다빈치를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삼고 있는 셈이었다.

 

우리나라에도 그로부터 100여 년 후에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 네덜란드 상선이 일본으로 가던 도중 조난을 당해 벨테브레와 하멜 일행이 26년의 시차를 두고 우리나라에 표착하였다. 벨테브레는 다행히 군사무기를 다룰 줄 알아서 훈련도감에서 군인으로 복무하였다지만, 하멜 일행은 서울의 양반집 잔치에 불려가 광대처럼 춤을 추고 병영에서 풀뽑는 일을 했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청나라에서 알까 두려워 하며 하멜 같은 지식인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했다. 같은 시기에 쇄국정책을 펴고 있던 일본 막부에서는 지볼트 같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파견의사를 중용하여 유럽의 근대문물을 도입하는 기회로 삼았다. 이때 비롯된 서양 근대문물에 대한 시각 차이가 근대화 속도의 격차로 나타났고, 우리 민족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 발루아 왕조의 프랑수아 1세가 거주했던 앙부아즈 성의 입구
* 앙부아즈 성에 걸려 있는 앙리 2세와 카트린 사이의 샤를르 8세와 왕비의 초상
* 프랑수아 왕의 집무실
* 원근법을 적용한 의자 등받이
* 프랑수아 1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 앙부아즈 성의 정원

 

앙부아즈 성은 입구부터 색색깔의 꽃들이 장관을 이루었다. 이 곳은 요새로도 사용되었던 만큼 왕족의 거주지인 왕궁과 그들의 휴식공간인 정원, 그들을 지키는 군사시설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현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왕궁의 이곳 저곳을 돌아보며 중세 시대 프랑스 왕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고민하였을지 돌이켜 보았다. 무엇보다도 속히 왕자를 생산하여 대를 잇게 하는 것,[2] 어느 곳으로 사냥을 가서 호화로운 연회를 베풀까 하는 1차원적인 고민이 많았다. 그가 계몽군주라면 명망있는 학자와 예술가를 불러 교양과 문화를 선양하는 일에도 힘썼을 것이다.[1] 다만, 16~17세기 역사에 비추어 성격이 완고한 성직자나 뚝심있는 귀족을 만나면 상당히 골치가 아팠을 것임에 틀림없다.  

 

* 쉬농소 성 진입로의 가지치기를 하지 않은 플라타나스 가로숫길
* 셰르 강변에 해자를 만들고 세워진 쉬농소 성

 

오늘 고성 순례의 하일라이트는 쉬농소 성(Chateau de Chenonceau)이었다. 아주 아름다운 이 성은 6명의 여인이 주인이었다고 하는데 그 전후 사정을 알려면 역사적인 배경지식을 필요로 한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가는 금력을 배경으로 교황을 여럿 배출한 데 이어 유럽의 왕가와의 통혼으로 명맥을 유지하고자 했다. 프랑스 왕실은 왕위 계승권자 아닌 앙리(Henri II, 1519~1559) 왕자와 메디치가의 상속녀인 카트린(Catherine de Medicis, 1519~1589)의 결혼을 허락했다. 그러나 왕세자가 급사하는 바람에 프랑수아 1세의 사후 앙리는 국왕에 즉위했고, 그는 19세나 연상인 가정교사였던 디안 드 푸아티에(現 마크롱 대통령의 deja vu?)를 카트린 왕비보다 더 사랑했다.

 

* 검은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의 초상
* 앙리 2세의 사후 카트린 왕비는 디안이 만든 다리 위에 지붕을 올리고 연회장으로 사용했다.

 

왕의 애첩 디안은 왕비보다 막강한 권력을 가졌으나 왕비를 몰아내진 않았다. 카트린보다 더 똑똑한 여자가 왕비가 되면 자기의 입지가 불안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장사꾼의 딸'이라 멸시의 대상이었던 카트린 역시 실권은 없어도 자기가 낳은 왕자들 중에서 왕이 될 먼 훗날을 기약하고 잠잠히 있었다.

그러나 혈기 왕성한 40세의 앙리 2세가 마상 창시합을 벌였다가 눈에 부상을 입고 수술까지 받았음에도 감염증으로 고통스럽게 죽고 말았다. 앙리 2세의 죽음을 예언한 노스트라다무스는 국왕의 고통어린 죽음보다 더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이 유럽을 휩쓸 것이라는 예언집을 남기기도 했다. '공포의 대왕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전율을 안겨주니 말이다. 

자기가 낳은 왕자가 프랑수아 2세로 즉위하자 섭정이 된 카트린은 쉬농소 성을 차지하고 있던 디안에게 피의 복수를 하는 대신 쉬농서 성과 보석을 전부 반환하게 하고 앙리 2세의 장례식 참석을 불허하는 선에서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쉬농서 성에서 디안의 흔적을 지우는 일에 힘썼다.[3]

 

* 어린이와 강아지에 둘러싸인 왕의 애첩 디안 (Diane de Poitiers)

 

카트린은 그후 30년간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번영과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 노력했으나 가톨릭 교도인 앙리 공작의 견제가 심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왕권은 적대관계에 있던 부르봉 왕조로 넘어갔다. 처음에는 메디치가의 유일한 상속녀로서, 그후 프랑스 왕실의 왕비로서,[4] 나중에는 자식들이 왕위에 오르고 섭정을 맡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듯 보였으나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하고 모두에게서 잊혀진 채로 임종을 맞았다.

 

가장 큰 이유는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세력을 확장한 개신교도인 위그노(Huguenot)들이 기존 세습 귀족과 가톨릭 교단을 공격하면서 종교적ㆍ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모호한 입장을 취한 채 실리만을 얻고자 했던 카트린은 일반 시민들에게 미움을 받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극(St. Bartholomew's Day massacre) 배후 인물로 몰렸다. 정작 카트린 자신은 신ㆍ구교도의 화합을 위해 반대파를 총리로 임명하고, 딸 마르그리트(영어식으로는 '마고')와 위그노인 앙리 나바르(훗날의 앙리 4세)를 혼인까지 시켰던 만큼 억울한 누명을 쓴 셈이었다.

 

 

카트린의 아들들도 왕권 강화에 실패한 채 후사[2]를 얻지 못하고 일찍 죽자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까지 왕위에 오른 앙리 나바르에 의해 프랑스의 정치권 판도가 재편되었다. 가톨릭 세력이 허무하게 몰락한 후, 나바르 왕국의 앙리는 자기 나라로 돌아가 힘을 기른 다음 잉글랜드를 비롯한 주변 여러 나라의 개신교 군대의 도움을 받아 파리로 진격하여 앙리 4세로 즉위하였고 카트린의 딸 마고 역시 부르봉 왕가의 첫 왕비가 되었다.

발루아 왕실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마고가 후사를 얻지 못함에 따라 이혼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정치에 초연하고 앙리 4세의 왕자인 루이 13세를 귀여워하여 비교적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5]

 

 

프랑스에서 제일 예쁜 성을 떠날 때에는 웬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가이드는 우리의 기분을 알아채고 앙부아즈 성 부근에 있는 이 지역의 명소인 동굴 레스토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시원한 맥주와 함께 먹는 큼직한 닭다리와 구운 감자는 우리의 허기진 뱃속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Note

1]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국의 통치자는 그 나라의 최고 학자로부터 제왕학을 배웠다.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친 아리스토텔레스가 대표적 사례이다. 근대 유럽에서도 프랑수아 1세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르네상스 문물의 스승으로 모셨던 것처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를 상수시 궁에 수시로 초청하였다 한다. 바이에른 공국의 건축광 루트비히 2세는 논란이 많은 바그너를 초빙해 그의 창작활동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와 같은 왕실의 메세나(Mecenat) 전통은 피렌체의 메디치가에서 확립되었는데, 프랑수아 1세는 메디치가의 상속녀 카트린에게 이 점에서 후한 점수를 주었던 것 같다.

 

2] 프랑크 왕국의 중심 부족인 살리족의 법전인 살리카법(Lex Salica)은 게르만족의 관습법을 성문화한 것이다. 이 법에 의하면 "딸은 토지를 상속받을 수 없다"는 규정이 있는데 작위는 토지에 따라다니므로[附從] 여성은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남자는 토지에서 얻은 소출로 무장을 하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으므로 남자에게 병역의무를 부과하는 근거가 되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국제관계와 정치권력의 판도에 따라 왕위 계승에 영향을 미치는 등 이 법규범이 맹위를 떨치기도 했다. 

 

* 부활절을 맞아 쉬농소 성에서 꽃장식 전시회가 열린다는 포스터. 전시회는 끝났지만 제대로 구경할 수 있었다.
* 부활절 기념 꽃장식이기에 Easter Egg를 여러 개 올려놓았다.

 

3] 쉬농소 성은 루아르 강의 지류인 셰르 강변에 세워져 있다. 교량 부분은 앙리 2세의 애첩 디안이 강건너로 가기 편하게끔 만들었던 것이나 카트린느가 그녀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벽과 지붕을 올리고 연회장으로 사용했다.

전체적으로 쉬농소 성은 물위에 떠 있는 구조로 되어 있어 풍수지리(風水地理)의 관점에서 적잖은 흥미를 자아낸다. 집의 기초가 물 위에 떠 있어 기반이 취약할 수 있으므로 이곳에서 오래 생활하게 되면 자식과 재물, 관심사가 산일(散逸)될 수 있다. 생산력 같은 가치보다 돈 걱정 없이 꽃장식 같은 심미적 센스, 분위기 등을 중시하는 귀부인에게나 어울리는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정확히 입증되었다.

 

4] 프랑스 귀족층은 메디치가의 카트린을 경멸하였음에도 피렌체의 메디치가는 문화 면에서 프랑스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그 당시 카트린이 프랑스 사회에 전파한 것은 식탁에서 음식에 따라 여러 종류의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는 것, 의상 코디네이터를 두고 옷 맵시나게 코르셋을 착용하는 것, 정원을 다채롭게 가꾸는 것 등이었다. 카트린이 분투 노력한 선례에도 불구하고 루이 16세와 결혼한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트와네트 공주도 초기에는 외국인 신부로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생각해 보면 카에사르와 결혼한 외국의 여인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선입견이 부지불식간에 서양 사람의 통념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5]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권력다툼과 애증관계, 종교적 갈등은 알렉산드르 뒤마의 소설 <카트린느 메디치의 딸>(1845) , 그리고 이사벨 아자니가 주연을 맡은 영화 <여왕 마고>(Queen Margot, 1994) 등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2. 몽생미셸과 생말로

4. 생테밀리옹 와이너리, 보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