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지만 드레스덴 관광을 하루 만에 끝내고 다음 행선지 상수시(Sans Souci란 프랑스어로 근심이 없다는 뜻) 궁전이 있는 포츠담으로 향했다. 근심 걱정이 없는 상태란 무엇일까?
오늘도 역시 하늘은 푸르렀고 들판에는 가을의 정취가 가득했다.
독일 고속도로(Autobahn)는 전 구간이 무료이다. 그러므로 여행자가 식사를 하거나 생리현상을 해소할 수 있는 휴게소를 도로공사가 관리.운영하는 우리나라와는 크게 다르다. 우리처럼 고속도로에서 바로 접근할 수 있는 주유소가 딸린 휴게소는 Autohof라 하고,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1~3km를 더 가야 하는 휴게소는 Rasthof라 하여 위의 도로표지처럼 무슨 업소가 있는지 안내해준다.
휴게소의 화장실은 대부분 유료인데 입구를 지하철 개찰구처럼 만들어 놓고 50 또는 70센트를 넣으면 50센트 쿠폰을 발급하였다. 이 쿠폰은 해당 휴게소의 매점에서 물건 등을 살 때 그 가액만큼 감해주었다.
독일에서도 고속도로 표지판은 파란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표시되어 있다. 이렇게 표지판을 여러 장 올린 이유는 통일 전에 베를린 가는 길은 모두 동독 영역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서독정부는 동독정부에 그 통행료를 1년 단위로 미리 지급하였는데 동독으로서는 매년 늘어나는 안정된 수입원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서독은행 차관자금의 보증금으로 쓰기도 했다.
가이드 최진홍 사장은 포츠담에 있는 상수시 궁전에 가기 전에 그와 어울리는 유서깊은 호반 음식점으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Braumanufaktur Forsthaus는 1834년부터 문을 열었는데 온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요리는 물론 하우스 맥주를 직접 만들어 팔고 있다.
실내는 이 부근이 왕년에 사냥터였음을 말해주는 등 각종 사슴의 박제가 벽에 걸려 있었다. 날씨가 좋았으므로 저멀리 어린이 놀이터도 있는 옥외에서 생선 요리로 점심식사를 했다.
우리 일행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으로 향했다.
거리는 아주 한산하였고 가을 단풍 속으로 사이클링을 즐기는 시민들, 오토바이를 타고 놀러가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우리는 호엔촐레른 성에 갔을 때 프로이센 왕국의 3대 국왕인 프리드리히 2세(1712~1786)가 유럽에서 손꼽히는 계몽군주로서 독일인들이 그를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ße)'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독일통일의 기초를 놓은 그가 건축한 여름 별궁인 상수시 궁전을 독일 국민이나 관광객들은 중요한 방문지로 여기고 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어려서부터 프랑스 문화와 플루트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좋아한 나머지 군대식이고 독선적인 부왕으로부터 매를 맞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가출을 감행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가 28세에 왕위를 계승한 뒤에는 신.구교의 갈등에 관용을 베풀고 보통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재판과정에서의 고문을 폐지했다. 또한 징병제를 통한 군사훈련을 강화하여 오스트리아 같은 주변 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아버지의 명령으로 사촌인 영국 공주가 아닌 오스트리아 귀족 영양과 결혼하였으나 왕비에 대한 사랑이 없었던 탓에 국정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고 한다. 왕비가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는 상수시 궁전은 그만의 별세계였던 셈이다.
상수시 궁전의 정원 한켠에 있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묘소에서는 아주 이색적인 광경을 볼 수 있다.
첫째는 이름난 계몽군주의 묘가 너무 평범하다는 것과, 둘째로 참배객들이 감자를 바친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왕이 일반백성들에게 감자를 보급하는 일에 힘쓴 결과 기근을 면하게 된 독일인들이 그에 대한 감사 표시로 감자를 바치는 관행이 생겼기 때문이다.
셋째는 대왕의 고독을 달래준 그레이하운드 애견들의 무덤이 프리드리히 대왕의 묘소 옆에 나란히 있다는 것이다.
상수시 궁전은 프랑스 베르사이유에 비해 건물의 규모는 작아도 정원은 더 넓은 것 같았다.
상수시 테라스에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좋아했던 포도나무가 거치대 없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포도 열매를 얻기 위한 게 아니라 무성한 잎을 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 한다.
1747년 완공된 상수시 궁전의 외관과 내부 인테리어는 당대 최고의 건축자재와 기술을 동원한 것이었다. 방은 10개에 불과했지만 가구 집기와 그림, 장식이 당시 부국강병에 힘썼던 프로이센의 국력과 프리드리히 대왕의 취향을 짐작하게 했다. 대왕은 특히 프랑스풍의 로코코 양식에 심취하였으며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를 초청하여 오랜 기간 대담을 나누었다고 한다.
상수시 궁전 안에서 현지 독일인 가이드는 매우 학구적으로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건축 및 장식은 로코코 스타일이며 샹들리에에서부터 가구 집기, 그림, 장식에 이르기까지 무슨 유래와 내력이 있는지 설명했다. 지루해하는 일행도 있었지만 그녀는 대충 하는 법이 없었다.
이 궁전의 주인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상과 그가 사용했던 탁자이다.
이 궁전은 여름별장이기 때문에 벽난로는 거의 사용한 적이 없었다.
난방이 필요 없는 이 하계별장에서
완벽주의 계몽군주의 근심은
아무 걱정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 그 자체
그러나 어찌 하랴,
우리의 삶 자체가 걱정이고 근심인 것을
상수시 궁전과 정원을 돌아보고 나오면서 우리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근심 걱정이 없는(sans souci) 상태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1) 포도나무를 잘 가꿔 맛좋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 2) 뜻이 맞는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것, 3) 좋은 그림을 소장하고 때때로 감상하는 것, 4) 널찍한 정원을 애견과 산책하는 것, 5) 종종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그리 많은 돈이나 시간,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베를린은 나에게 매우 특별한 도시이다. 1986년 아무런 정보도 없이 네덜란드에 유학을 왔다가 처형이 사는 베를린에 잠시 들른다는 것이 둘째를 이곳에서 낳았기 때문이다. 도로표지에서 스티글리츠 지명을 보는 순간 그때 생각이 나서 전율에 휩싸였다.
1986년 말 아직 분단 상태의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베를린 장벽을 보았고, 쿠담의 번화가를 걷기도 했었다. 그 후에도 베를린에 들를 때마다 카이저 빌헬름 교회 옆 새교회를 찾아가 예수 상 앞에서 기도를 올렸던 것이 생각났다.
* 2016년 12월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린 교회 앞에 트럭이 돌진하여 수십명이 죽고 다친 사고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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