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TV를 켜자 한 채널에서 각 지방의 풍경과 날씨를 보여주고 조용한 음악을 틀어주었다.
우리도 체크아웃을 서둘러야 했지만 TV 화면을 보는 동안 저절로 마음이 평안해졌다.
다음 행선지는 박물관섬(Museum Island)이었다. 슈프레섬 북단에는 베를린 구 박물관(Altes Museum)을 비롯한 5개의 박물관이 한 군데 모여 있어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나머지 4개는 신 박물관, 구 국립미술관, 보데 박물관 그리고 페르가몬 박물관이다. 5개의 박물관이 1999년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관람객이 제일 많은 박물관은 박물관섬 중앙에 위치한 페르가몬 박물관이다. 그리스와 중동에서 발굴해 온 유물들을 특별히 전시하기 위해 1910년부터 1930년까지 20년에 걸쳐 지어졌다고 한다.
베를린 박물관 섬 중앙의 페르가몬 박물관(Pergamon Museum)은 그리스 유적지 페르가몬(Pergmos)에서 발굴된 유적과 비빌론의 성곽과 이슈타르[1] 성문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곳으로 유명하다.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에 비해서 규모는 작지만 이처럼 고대도시의 유적과 유물을 한데 모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해 놓은 것이 놀라웠다.
독일에서는 건축가 출신 고고학자 로베르트 콜데바이가 이끄는 독일 동양학회의 발굴팀 200~250명을 중동에 파견했다. 독일 식민지도 아닌 터키 현지의 폐허에서 1899년부터 1917년까지 유물을 발굴했다고 한다. 그리고 유물의 파편을 오스만 튀르크 당국의 승인을 받아 합법적으로 반출한 후 마치 퍼즐조각 맞추듯이 거의 원형 그대로 살려놓은 것이다.
페르가몬은 성경 계시록에 소아시아 7교회 중의 하나인 버가모를 가리킨다. 제우스가 탄생한 곳이라 하여 그 제단이 있었고 로마 황제를 모시는 신전도 여럿이 있는 우상숭배의 도시였다.
그곳 폐허에서 독일 발굴팀이 허가를 받고 발굴한 유물들을 베를린으로 실어와 새로 박물관을 짓고 전시했던 것이다. 영국의 외교관 엘긴이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에서 대리석조각을 통째로 반출해 대영박물관에 전시해 놓은 것(Elgin Marbles)이 자극제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2차대전 당시 베를린 폭격으로 일부 소실되었고 상당 부분은 소련이 약탈해가서 아직도 돌려받지 못한 것도 상당량이 된다고 한다. 원천적으로는 독일이 주장하는 유물들도 원소유자가 따로 있는 셈이다.
밀레 시장의 문(Market Gate of Miletus)이 우리를 압도했다.
소아시아 밀레투스의 시장에 있는 로마시대의 건물이었는데 이것을 발굴하여 한 쪽 벽면을 원주기둥까지 통째로 옮겨오다시피 한 것이다. 10세기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무너졌던 것을 독일 고고학 발굴팀이 부분적으로 복원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시장에서는 위 사진에서 보듯이 전쟁포로를 노예로 매매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아울러 로마시대의 건물 바닥을 장식하였던 모자이크 타일도 함께 전시해 놓았다.
다른 방에서는 바벨론의 이슈타르 성문(Ishtar Gate of Babylon)을 거의 완벽하게 복원한 것도 볼 수 있었다. 바벨론은 페르시아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어 발굴 당시 흙과 자갈이 20m 깊이로 파묻혀 있었다고 한다. 수많은 파편이 조각조각 나온 것을 거의 옛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이 너무나 놀라웠다.[2]
그리고 신성시되는 사자 같은 동물을 정교하게 성벽에 조각해 놓은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위세에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축소모형이긴 하지만 방어용 전차 2대가 교행할 정도로 크게 만든 바벨론 성채를 보고 그 어마어마한 규모와 위용을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대의 선지자 이사야는 춘분 날 벌어지던 바벨론의 장엄한 종교적인 신년축제(New Year's Procession)에서 마르둑(Marduk) 신상을 싣고 가는 행진이 한낱 헛된 쇼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사야 46:1-2.
벨(바벨론의 주신 마르둑의 별칭)은 엎드려졌고 느보(마르둑의 아들 신)는 구부러졌도다.
그들의 우상들은 짐승과 가축에게 실렸으니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들이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
그들은 구부러졌고 그들은 일제히 엎드러졌으므로 그 짐을 구하여 내지 못하고 자기들도 잡혀 갔느니라.
선지자의 예언 그대로 그 우상들은 페르시아 대군의 공격 앞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폐허 속에 방치되어 있다가 급기야는 베를린의 한 박물관에서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와 함께 메소포타미아의 함무라비 왕이 마르둑 신으로부터 법전을 계시받는 장면을 묘사한 유물도 비록 복제품(원본은 루브르 박물관 소장)이지만 전시되어 있었다.
후세 사람들은 위 사진의 수메르인이 세운 니므롯의 지구라트와 로마 제국의 콜로세움을 보고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건축하다가 중단한 바벨탑을 상상했다. 아래 그림은 네덜란드의 화가 대 브뤼헐이 그린 바벨탑이다.
페르가몬 박물관에는 이색적으로 이슬람 문명의 유물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어느 모스크의 벽감과 천정을 통째로 옮겨다 놓은 것도 있었고, 정교한 무늬의 카펫으로 장식되어 있는 부유한 상인의 방(Aleppo Room) 하나를 옮겨놓은 것도 우리의 시선을 끌었다.
도슨트의 설명에 의하면 알레포는 시리아의 부유한 상업도시였다.
그곳의 상인은 여러 종교의 고객들을 상대해야 했으므로 벽을 장식해 놓은 태피스트리에 유대교와 기독교, 마호메트교의 설화가 모두 들어 있었다.
페르가몬 박물관 견학을 마치고 나왔으나 우리의 기분이 묘했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하던 19세기 후반 해외 식민지가 많지 않았던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에 뒤질세라 현지 당국의 관헌을 매수해가며 유물을 실어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전시해 놓았다고는 하지만, 루브르와 대영박물관에 가본 입장에서는 전체의 극히 일부분만 보여줬다는 점에서 상대적 결핍감도 느껴졌다.
통일 되어서 구 동독이 소장하고 있던 박물관 유물이 이제 독일 전국민의 자랑거리가 되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소련이 베를린 점령 후 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간 후 돌려주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다.
베를린 점령 후 소련이 세운 전승기념비
치욕의 역사 흔적을 독일이 그대로 보존하는 것은
잘못을 반성하고 후손들도 이를 배우게 하는 대국의 풍모
어제와 오늘 베를린 이곳저곳을 돌아보면서 통일된 독일이 얻은 것이 비단 영토와 천연자원뿐만 아니었음을 알았다. 독일 국민들이 통일된 조국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된 것, 잃어버린 줄 알았던 문화재를 다시 찾은 것, 무엇보다도 장벽에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던 베를린이 새롭게 젊은 도시로 활기를 찾고 부활한 것을 들 수 있다.
독일 아우토반을 쉬지 않고 달려 함부르크[3]에 근접하자 가이드 최 사장이 걱정하기 시작했다. EU의 엄격한 버스운행 규칙에 의하면 버스 기사가 일정 시간 이상 계속 운전을 할 수 없으므로 30분간 휴식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이 근방에는 마땅한 휴게소가 없다는 것이었다.
가이드가 노련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는 함부르크 부둣가 관광을 하고 버스는 이 부근의 안전한 도로에서 정차해 있으면 되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함부르크 부두를 여기저기 돌아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었다.
가장 다행인 점은 당초 일정에 없었던 함부르크의 새 명물 엘프 필하모니 홀 전망대에 올라가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기존 커피 코코아 창고를 벽체만 남기고 리모델링한 후 그 위에 유리로 된 멋있는 콘서트홀과 호텔을 신축하였다.
시 예산과 민간자본을 합쳐 10억 유로의 막대한 건설비가 들었지만 콘서트홀만 해도 공연과 좌석 모두 몇년치 예약이 끝났을 정도로 대인기라고 한다.
Note
1]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에서 이슈타르(Ishtar)는 사랑과 전쟁의 신이었다. 그러므로 수십개에 달하는 이슈타르 성문은 채색타일로 사자 같은 용맹스러운 동물의 형상을 새겨놓아 그 위용과 아름다움을 자랑하였다.
2]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였던 바빌론은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85km 지점에 있다. 기원전 20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흥망을 거듭하며 번성했지만 그 후 알렉산더 대왕 등 강대국의 침략과 자연재해로 폐허가 되고 말았다. 고고학 발굴에 있어 영국과 프랑스에 뒤진 독일이 1900년대 초 발굴한 유적과 유물을 통째로 베를린으로 실어다 박물관 섬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이슈타르 문을 재건하였다. 독일의 박물관 섬은 1999년 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나, 정작 유적지가 있는 곳에서는 이라크 정부가 1983년부터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노력하였음에도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왕궁터에 별장을 짓고 2003년부터 시작된 이라크 전쟁도 유적터에 치명상을 입혀 불발로 그쳤다. 마침내 2019년 7월 UNESCO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라크의 신청을 받아들여 바빌론의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했다.
3] 독일 함부르크는 9세기 초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가 요새 형태의 성의 건축을 명하면서 도시가 건설되었다. 12세기 말부터는 신성로마제국의 자유제국도시(Free Imperial City)의 지위를 얻고 활발한 교역을 벌여 13세기 중엽부터는 한자동맹의 중심지로서 노르웨이, 네덜란드, 영국, 에스파냐와의 국제무역이 성행하였다. 1810년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한때 교역량이 크게 줄었으나 나폴레옹이 패망하면서 브레멘, 뤼베크와 함께 자유도시의 명성을 되찾았다. 1842년의 대화재 등 각종 재난과 전쟁으로 많은 도시시설과 건물이 파괴되었으나 2000년대 초반부터는 하펜시티(Hafencity)라는 도시 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변두리 항구와 도시 구역을 성공적으로 재개발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함부르크의 역사 (두산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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